167화
사실 정우현은 러시아 대통령이 정우현에게 만남을 청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인도와의 교류가 끊김으로써 전쟁을 장기적으로 이끌기 힘들어졌으니까.
물론 중국이 있기는 했지만, 마냥 중국만 믿고 있기에는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중국의 입장이 이전보다 난처해졌기 때문이다. 인도까지 돌아선 마당에, 국제 사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중국 홀로 러시아를 두둔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대통령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이처럼 판을 짠 장본인인 유엔의 사무총장 정우현이었다.
한데 정우현은 의아했다.
보통 이런 갈등 상황에서 두 지도자가 만나면, 당사자 국가가 아닌 제삼국에서 만나게 된다.
그럼에도 러시아 대통령이 정우현에게 크렘린에 방문할 것을 청하는 것에서, 초대 의도가 무척 의문스러워졌다.
“…그럼 만날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울상을 짓는 것을 넘어 거의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유엔 주재 러시아 대표가 맥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정우현이 가만히 있다가 답했다.
“그쪽에서 그렇게 원하시니, 일단 만나 보겠습니다.”
“아아!”
마치 목숨을 건지기라도 한 듯 러시아 대표가 크게 탄성을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무총장님!”
“그 대신 제가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조건으로 만나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제가 적극 반영해 보겠습니다!”
* * *
그렇게 해서 성사된 유엔 사무총장과 러시아 대통령의 만남.
장소는 터키 이스탄불이었다.
터키는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에서는 대의와 국제적 흐름을 따라 러시아를 비판하면서, 양국 사이의 평화 협상을 주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에 정우현은 이스탄불에서, 중재국인 터키 인사와 러시아 측인 중국 인사, 그리고 유엔 측인 미국 인사까지 포함해 총 다섯 명이 만나기로 제안했다.
한편 회담 내용은 모두 영상으로 촬영하기로 했다.
러시아 대통령과 정우현 말고도 세 명의 인사를 더 참가시키고, 영상까지 촬영하는 이유는 객관성과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이에 러시아 대통령은 승낙했고, 드디어 만남이 이뤄졌다.
“안녕하시오.”
블로디미르 푸틴(Vlodimir Putin).
티브이에서 본 모습과 다름없었다.
호리호리하고 민첩해 보이면서도 위엄이 있는 가운데 눈빛이 강렬했다.
이 자가 러시아에서 20년 넘게 군림하고 있는 독재자였다.
“반갑습니다.”
정우현이 굳은 표정으로 의례상 한마디 했다.
“하하하, 소년 정우현이 이렇게나 성장해서 제 눈앞에 있군요. 그때 제 초청을 받아들였으면, 훨씬 쉽게 만나 얘기를 나누고 더 좋지 않습니까?”
20여 년 전 모스크바 극장에서의 테러 사건을 언급하는 푸틴이다. 당시 정우현은 그의 초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푸틴이 여전히 대통령이라는 게 정우현은 무척 못마땅했다.
그가 현재까지 독재자로서 군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됐고, 당장 현안이나 얘기합시다.”
정우현이 곧장 말을 이었다.
“얼른 철군하세요, 다른 안은 없습니다. 저는 타협하기 위해 이곳에 나온 게 아닙니다.”
“…허허, 성격 급하시네.”
푸틴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래도 좀 초면인데, 서로 덕담도 주고받고 그렇게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니오? 나는 실상, 좀 놀랐소. 원래 유엔은 이런 일이 벌어지면 힘도 없이 팔짱을 끼며 입으로만 떠드는데, 이번엔 꽤 적극적으로 나서더군?”
하고서 푸틴이 자신의 정장 상의 안에서 휴대용 위스키병을 꺼냈다.
“이보세요, 젊은 사무총장 나리.”
정우현은 러시아도 아니고 이곳 터키까지 술을 챙겨 온 푸틴이 의아했다.
이곳 이스탄불의 돌마바흐체 궁전에 오기까지 물론 모든 사람이 몸수색 및 금속탐지기를 거쳤다.
혹시 모를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용케도 술병을 가지고 들어온 푸틴이다.
터키 당국이 그 정도는 괜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어쨌든 한 나라의 대통령이 손수 가져온 물건이기도 하니 더 그렇게 생각했다.
“뭐,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긴장 좀 풀어 봅시다.”
그러고는 푸틴이 정우현의 앞에 있는 물 잔을 손에 들고 안에 있는 물을 바닥에 뿌려 비웠다. 그리고는 자신의 잔도 비웠다.
“사무총장 나리가 술이 엄청 세다고 들었소. 하하, 그래서 내가 특별히 준비해 왔지. 바로 이게, 러시아 최고의 보드카라오.”
하면서 정우현의 잔과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정우현은 즉각 술에 집중했다. 병에서 흘러내리는 점성(粘性)과 보드카 특유의 알콜 향으로 판단하기에는 그저 영락없는 술이었다.
“자, 드시오”
그러면서 푸틴이 자신의 잔을 들고 먼저 술을 단숨에 마셨다. 그러고는 크게 말했다.
“크아아아, 좋군. 이제 좀 사나이답게, 허심탄회하게 모든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소.”
정우현은 가만히 자신의 잔을 내려다봤다.
솔직히, 술에 무엇을 탄 게 아닐까 의심이 됐다. 러시아의 대통령이란 사람이, 모스크바에서 이곳 이스탄불까지 안주머니에 술을 챙겨 와, 잔에 따르고 이렇게 마시는 게 너무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치 그런 정우현의 의심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푸틴은 먼저 나서서 술을 마셨다.
“…하하하.”
가만히 잔에 담긴 보드카를 내려다보는 정우현을 보고 푸틴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지금 설마, 의심하시는 것이오? 술에 무언가 탄 게 아닐까 하고?”
“으음.”
정우현이 말은 않고 그저 입소리를 냈다.
“하하하하! 사무총장 나리. 거 아주 어릴 적부터 영화판에서 활약해서 그런지, 상상력이 남다르시네. 첩보 영화 같은 걸 너무 많이 본 게 아니오? 하하하!”
하고서 그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내가 막말로 당신을 암살하려고 했다고 칩시다. 한데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여기 직접 나왔겠소? 밑에 애들을 시키지 않고? 심지어 우리의 만남을 보증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사람이 나와 있는 것은 물론, 영상으로 촬영되고 있는데? 하하하하!”
껄껄 웃는 푸틴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엔, 때론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걸 정우현은 잘 알고 있었다.
정우현이 잠깐 생각하더니, 곧장 잔을 들어 술을 원샷했다.
“오오!”
푸틴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정우현이 술맛을 음미했다. 놀랍게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확실히 최고급 술이라 그런지 향이 특히 좋았다.
그런 정우현을 보는 푸틴의 입꼬리 한쪽이 묘하게 올라가며 씰룩거렸다.
정우현은 물론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계획대로 순식간에 손을 뻗어 푸틴 앞에 있는 술병을 잡았다.
이에 이상하게도 푸틴의 표정이 다소 일그러졌다.
여기서 정우현은 확신했다. 푸틴 이 악당이 수를 쓰는구나 하고.
“왜 놀라요?”
“…아, 아니.”
“술맛이 좋아서 한 잔 더 하고 싶은데, 왜 그렇게 놀라냐고요.”
“…하하하, 그렇지, 그래! 내가 무척 좋은 술을 가져왔소! 자, 그럼 주시오, 내가 따라 주겠소! 하여간 성격이 참 급하시구먼!”
하고 푸틴이 정우현의 손에서 자신의 술병을 빼앗으려는데, 술병이 꿈쩍하지 않았다.
정우현이 계속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음?”
푸틴이 놀라서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온 힘을 다해 힘을 줬으나 술병이 빠지지 않았다.
이에 반해 정우현은 가만히 표정의 변화 없이 술병을 쥐고 있었다.
푸틴은 소련의 정보 기관이었던, 악명 높은 KGB 요원 출신이다. 거기에 나이가 들어도, 곧잘 자신의 신체적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정우현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정우현은 인류사 가장 강한 남자니까.
“…으읏!”
푸틴이 당황하며 계속 힘을 쓰는 가운데 급기야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여전히 술병은 움직이지 않았다.
슈욱!
결국, 정우현이 조금 힘을 줘 아예 술병을 자신의 품으로 가져왔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이 회담은 중단합니다.”
“….”
터키와 미국, 그리고 중국 인사는 갑자기 정우현과 푸틴이 웬 술병을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하다가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정우현이 푸틴을 보고 말했다.
“비겁하구나. 한 국가의 원수라는 사람이 이딴 짓이나 하고.”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터키 인사를 보고 말을 이었다.
“이 자, 블로디미르 푸틴을 체포하세요. 사유는, 터키 영토 내에서 살인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친 죄입니다.”
“아아!”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단지 술을 좀 나눠 먹었을 뿐인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정우현은 터키 인사에게 계속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가까운, 화학 연구실이 어디입니까?”
* * *
정우현은 곧장 오늘 회담의 보증인인 국적이 다른 세 명의 사람들과 함께 터키의 국립 과학연구소에 갔다.
그러고는 곧장 푸틴이 가져온 술병의 술을 성분 분석했다.
역시나 해당 술에는 무색 무향 무미의 신형 독극물이 들어 있었다.
냉전 이래 러시아는 생화학 무기를 발달시켰다.
이번 독극물은 암살용으로 개발된 물질이었다. 인체에 들어가면 10시간 후에 사람을 죽인 뒤 깨끗하게 분해되어 검출되지 않는 무서운 독극물이다.
푸틴은 그렇게 흔적 없이 정우현을 죽이려 했다. 10시간 후에 정우현이 죽으면, 사인 불명의 죽음이 될 것이기에 완전 범죄가 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유엔 사무총장 정우현을 암살해, 전쟁을 지속하려 했다. 이번 전쟁에서 지게 되면, 수십 년간 군림해 온 자신의 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것은 뻔한 일이기에 무척 절박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짓을 시도했다.
사실 푸틴이 독살을 시도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 방사성 물질 즉 폴로늄이 담긴 홍차나 노비촉이라는 신형 독극물로 러시아의 반체제 인사가 목숨을 잃거나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이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독극물이 확인되자, 가만히 있던 미국 인사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무총장님! 술을 드셨는데, 어떻게 합니까!”
“…괜찮습니다.”
정우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해독제를 빠르게 만들면 되니까요.”
라고는 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다.
특정 독극물의 해독제를 만드는 것은, 독약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정우현이라 한들 10시간 내로 해독제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는 이유는, 그의 신체적 능력 즉 모든 외부 물질에 면역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술을 마셨다.
“…근데 그 사람은요?”
터키 인사가 말했다.
“푸틴도 술을 먹었잖아요!”
“아아….”
그제야 중국 인사가 입을 벌리며 탄식을 내뱉었다.
정우현이 곧장 말했다.
“그 사람은 괜찮을 겁니다. 이런 독극물을 만들 기술이 있었으니, 독극물에 안전한 약 같은 것 또한 개발 후 미리 먹은 상태였겠죠. 마치 질병의 백신을 미리 접종하듯이요.”
정우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푸틴은 출국 전 독극물을 중화할 수 있는 약을 미리 먹었다.
“…그렇습니까?”
하고는 미국 인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죠?”
이에 정우현이 눈에 힘을 주고 답을 했다.
“응징해야죠.”
하고서 그가 분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쁜 짓을 했으니, 아주 제대로, 응징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