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왜죠, 일론?”
유엔 사무총장을 하지 말라는 일론의 말에 정우현이 곧장 물었다.
“말이 유엔이지.”
일론이 빠르게 대답했다.
“결국 공무원이야, 국제 공무원! 따로 영리 활동을 할 수 없다고. 보스가 더 이상 우후 그룹의 보스일 수 없게 돼!”
“으음.”
정우현은 그 점 또한 알고는 있었다.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는 순간 기업 경영은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 재단에서 의장으로서의 활동도 제약을 받는다.
사무총장은 어디까지나 유엔을 대표해야지, 유엔 및 산하 국제 기구 이외의 특정 단체를 대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해서는 절대 안 돼, 보오스! 이득이 없어, 이득이! 돈을 벌 수도, 사업을 확장할 수도 없는데, 무슨 사무총장이야! 온통 손해뿐인데!”
그러면서 일론은 계속해서 정우현을 설득했으나, 정우현은 엘라에게 한 것처럼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서 진정 홀로 생각에 빠졌다.
우선, 정말 손해뿐인가?
정우현이 생각했다.
물론 사무총장이 되면 영리 활동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정우현은 이미 자산이 300조 원이 넘는 세계 최고의 부자다. 여기서 재산을 더 늘리고자 한다면 늘릴 수야 있겠지만, 그에 따른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이미 돈으로는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영리 활동을 하지 않고, 자산을 그저 은행에 예금해 놓기만 해도 됐다. 자산이 큰 만큼 이자 역시 엄청나니까.
현금 자산 10조 원만 은행에 예금하고, 연리(年利)가 1%라고만 해도, 1년에 1,000억 원의 이자 수입이 생긴다.
이렇듯 돈이 커질수록 퍼센티지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한데 정우현의 자산은 10조 원이 아니라 300조 원이 넘는다.
즉, 정우현은 당장 영리 활동을 하지 않아도 금전적으로 문제를 겪지 않는다. 최소 수천억 원의 이자 수입이 보장되니까.
더군다나 사무총장의 재임 기간은 정해져 있다. 영영 사업을 못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정우현은, 일론의 다른 말을 또 떠올렸다.
정말, 이득이 없는가?
언뜻 보면 없어 보인다. 당장 엄청난 수입을 포기하고, 고작 공무원으로서의 작은 연봉을 지급 받고 업무에 종사하게 되니.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우현이 사업에만 몰두하면 영영 누릴 수 없는 엄청난 이득이 있었다.
바로 국제 사회적인 힘이다.
사무총장이 되면 세계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식적인 권한이 생긴다.
현재로서는 정우현이 어떤 국제적 사안에 관해 말해 봤자 개인적으로 의사 표현을 한 것밖에 안 된다. 즉, 힘이 없었다.
또한 어떤 사안에 관해서는 의사 표현조차 하는 게 거의 금기시 됐다. 예컨대 어렸을 때 겪었던 모스크바 예술극장 테러 사건 시, 체첸과 러시아의 분쟁에 관해 정우현은 양 세력 사이 일종의 눈치를 보느라 말을 아껴야 했다.
하지만 사무총장이 되면 그럴 필요가 없다. 문제를 파악한 뒤 적극적으로 궁리를 하고 산하 수많은 직원을 이끌며 함께 해결에 나설 수 있었다. 국제적으로 무슨 일이 있든 간에 발 벗고 나서 옳다고 판단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가장 큰 이득이었다. 바로 공식적인 힘.
그리고 일론의 말대로 단순히 이득과 손해의 관점으로 해당 일을 판단하는 건 한편으로 무리였다.
왜냐하면 세상일은 이해타산으로만 따지기엔 적합하지 않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사람들은 보통 의미의 범주로 파악한다.
정우현의 이번 일이 그랬다. 만약 그가 정말 유엔 사무총장 후보직을 수락한다면, 손익 계산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우현은 그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오랜만이다!”
정우현이 모처럼 오랜 친구를 만났다.
구태호였다.
머리를 짧게 자른 구태호가 일식 선술집에서 룸을 잡고 정우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 의경 나온 지 오래됐는데, 아직도 머리가 짧냐?”
정우현이 말했다.
구태호는 경찰 학교를 졸업하고 2년 간의 의무 경찰 소대장 군 복무를 마쳤다.
“이 머리가 편하다.”
구태호가 자신의 짧은 머리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정우현이 그 모습을 보며 재밌다는 듯 말했다.
“하하, 태호, 너는 어떻게 나이 들수록 점점 머리가 짧아지냐. 초등학생 때가 제일 길었다, 야.”
“그런가, 음. 살다 보니,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걸 알게 돼서 그런 것 같다.”
하고 구태호가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했다.
구태호는 최근 이런 식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아무렇게나 했다.
일종의 아저씨 개그였다.
“어때? 학교는.”
구태호는 의경 전역 후 경위로 임명되어 파출소 근무 중, 일찌감치 퇴직해 버렸다.
그러고는 로스쿨에 진학했다. 아버지를 따라 검사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재밌어. 경찰 학교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재밌어. 진작 그냥 법대로 진학했다가 로스쿨 갈 걸, 후회한다.”
구태호는 파출소 근무 중 워낙 잡다한 사건으로 바쁜 경찰 업무에 실망하고 퇴직했다.
당시 친구 정우현이 2년 6개월 즉 경찰 학교 졸업 후, 순환 보직 기간만 참고 적성에 맞는 자리를 찾으라고 했지만, 구태호가 듣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냅다 퇴직을고 경찰학 교에서의 교육비를 상환했다. 경찰 학교는 졸업 후 6년의 의무 근무 기간을 마치기 전에 퇴직하면 교육비를 상환해야 한다. 국가가 나서서 교육했음에도, 그에 부응하지 않고 다른 길을 찾게 된 일종의 페널티 비용이었다.
“음, 잘됐네.”
정우현이 짧게 구태호의 말을 긍정했다.
과거야 어쨌든 구태호는 현재로선 로스쿨 학생이었기에, 그저 응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어때?”
구태호가 따뜻하게 데운 사케 한 잔을 마시며 말했다.
날이 추워 이만한 술이 없다며, 정우현을 이곳 일식 선술집으로 데려온 구태호다.
“크으으으, 죽인다. 응?”
구태호가 술을 마시고 안주를 하나 집어 먹으며 말을 이었다.
“나야 뭐 잘 지내지.”
“하하, 하기야! 천하의 정우현 님께서 잘못 지내면 이상하지!”
하고서 구태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와, 그나저나 우현아. 그 얘기 좀 해 봐. 소문으로는 네가 콩고에서 반군이랑 직접 대치했었다는데, 사실이야?”
“하하하하!”
정우현이 크게 웃었다.
콩고를 다녀온 후, 정우현의 행적에 관해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했다.
널리 알려진 그의 활동은 그저 에볼라 바이러스 퇴치뿐이었다.
정우현이 무엇 하나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년 전 믿을 수 없는 달리기 및 싸움 실력을 보인 이후 정우현을 향한 음모론이 더 심화되어 그랬다.
물론 정우현은 음모론을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무용담에 가까운 일들을 공식적으로 밝혔다가는 괜한 목소리만 더 커질 것 같아 그저 잠자코 있었다.
“심지어 너 에볼라 바이러스에 걸렸었다며. 그리고 죽기 직전에 살아났다던데? 맞아?”
“야, 그럴 리가 있겠냐, 하하!”
“아냐? 심지어 네가 죽고 나서 살아났다는 얘기도 있어. 직접 만든 치료제 바늘을 죽기 직전 스스로 허벅지에 꽂고, 죽은 뒤 다시 살아났다는 얘기지.”
“하하하하하!”
정우현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엄규환의 얘기였다. 분명 엄규환은 죽다 살아났으니까.
한데 대체 어떻게 소문이 퍼진 건지 구태호가 이상한 말만 하는 게 무척 웃겼다.
“됐어, 아무 일 없었어. 도착하자마자 유엔군이 떡 하니 기다리고 있더라. 그래서 아주 편하고 신나게 잘 다녀왔다.”
“그래? 음, 그럼 또 소문이 다 거짓이라는 거지…….”
하고서 구태호가 괜스레 아쉽다는 듯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크아아, 좋다. 하여간 우현아. 그럼 뭐 제약 사업이고 뭐고 다 좋다는 얘기구나?”
“그렇지, 뭐. 아, 근데.”
하고서 정우현 또한 술을 한 잔 마시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좀 고민거리가 있다.”
“……고민? 뭐?”
구태호가 날카로운 눈을 제법 크게 뜨고 말했다.
“세계 최강 정우현 님이 고민이 있다고? 뭐냐, 진짜. 설마 내일 운석이 지구에 떨어지기라도 하나? 아니면 외계인이 침공하기라도 해?”
“하하, 야, 그만하고.”
하고서 정우현이 말했다.
“백악관으로부터 직접 연락받았는데.”
“오, 응. 흥미로워, 벌써부터 스케일 크네.”
“미국이 나를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추천하겠대.”
“…….”
이런저런 농담을 지껄이던 구태호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래서 다른 안보리 상임 이사국인 영국이랑 프랑스는 이미 찬성한 상태고, 중국이랑 러시아만 남은 상태야. 근데 그 전에 내가 마음을 정해야 할 것 같아서.”
구태호가 순간 사케를 한 잔 원샷했다.
그러고서는 두 번을 더 따라 첫 잔까지, 연거푸 세 번을 원샷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정우현이 말했다.
“야, 야, 천천히 먹어라. 또 만취해서, 너 집까지 케어하기 싫다.”
“……지금 내가 술을 천천히 먹을 수 있겠냐.”
하고는 다시 원샷을 하고 말을 잇는 구태호다.
“내 불알친구 정우현이 유엔 사무총장 후보에……!”
그러는데 정우현이 팔을 뻗어 구태호의 입을 막았다.
비록 룸으로 잡았지만, 구태호의 목소리가 워낙 크기에 그의 말이 괜한 사람의 귀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정우현은 유엔 사무총장이 되기는커녕 공식적인 후보자가 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태 스스로 마음을 정하지도 않았다. 후보자가 될지 말지.
한데 이런 상황에 괜한 말을 사람들에게 흘리고 싶지 않았다.
“……하아, 하아, 대박.”
구태호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숨을 거칠게 쉬었다.
“……우현아, 너 진짜 최고다.”
구태호는 전직 검찰총장의 아들이다.
그런 그가 지금 아버지를 따라 검사가 되려고 로스쿨을 다니고 있다.
구태호는 어릴 때부터 고위 공직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아버지가 검사였던 만큼, 그에게는, 높은 자리에 있는 공직자들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경찰 학교에 진학하기도 했다.
사실 구태호가 어릴 적부터 권유라를 그리 대단하게 생각지 않은 이유도 여기 있었다.
그는 누가 얼마나 돈이 많든, 사기업 부문에서 얼마나 큰 그룹을 이끌고 있든 그리 부러워하거나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꿈은 사적 부문이 아닌 공적 부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자리는, 대한민국 대통령만큼이나 멋져 보였다.
평소 세계 최고의 직업이라면, 국내에선 대통령 국외에선 유엔 사무총장을 꼽는 구태호였다.
“근데 뭐? 뭐가 고민이야!”
구태호가 계속 큰 목소리로 말했다.
“사무총장 까짓것, 그냥 하면 되지! 뭐가 문젠데?”
“아직 결정을 못 했어.”
“뭐?”
구태호가 이번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왜? 대체 왜?”
“…….”
“우현아. 유엔이야, 유엔 사무총장. 세계 최고라고. 한마디로 역사지. 네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게 된다고!”
정우현은 딱히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역사에 이름이 남고 말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일을 통해, 정우현 스스로 무언가를 더 이루고 성장하며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순간 구태호가 자신의 술잔을 테이블 위에 거꾸로 엎어 놓았다.
정우현은 술 먹자고 만난 애주가 녀석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의아해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언젠가 구태호는 남자라면 술자리에서만큼은 한 잔의 후퇴도 없이, 오직 진격, 진격만 있을 뿐이라는 등 이상한 말을 할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뭐 하냐, 지금.”
정우현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술잔은 뒤집어 놓은 채 구태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현아.”
“왜?”
“너, 그거 해라.”
그러고는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무총장, 해라. 나 그럼 술 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