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영국 여왕의 훈장을 거절하겠다는 정우현에게 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좋은 일이니, 그냥 받으면 되는 일 아닌가요?”
“아닙니다, 엘라.”
하고서 정우현이 말을 이었다.
“영국 여왕이 주는 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나라도 아니고 타국이 만든 질서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에 편입된다는 뜻이에요.”
“….”
“영국 여왕이나 저나,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이나 그저 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누가 누군가에게 어떤 상 같은 걸 준다고 해서 엄청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상이란 것은 받음으로써 주는 사람의 권위가 확인될 뿐이죠.”
“…하지만.”
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들, 살면서 이제까지 수많은 상을 받아 왔잖아. 지금 막 영국에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것도 그렇고.”
“하하, 그건요, 어머니.”
하고서는 정우현이 살짝 미소를 짓고 말했다.
“제가 만든 영화에 주는 상이잖아요. 그리고 오래전에 받았던 엔진상과 수학상 모두 제가 한 일에 관해 주어지는 상이죠. 하지만 이번 일은 달라요. 한 나라의 왕이라는 사람이, 자국민도 아니고 외국인인 저의 삶을, 인정하겠다는 의미로 권위를 내세워 주는 훈장입니다. 딱히 받아야 할 이유도, 의무도 없죠.”
“…그렇지만 우현아.”
이번엔 아버지가 말했다.
“예전에 너 말이다. 그 모스크바에서 사람들을 살리고 테러를 평화적으로 해결했을 때는, 대통령의 훈장을 받았지 않냐.”
“예, 그랬죠.”
“그건 왜지?”
“하하. 제가 대한민국 국민이니까요! 그러니 대한민국 대통령의 훈장을 거절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버지.”
“응?”
“다른 것 다 떠나서, 당시 저는 어렸잖아요. 사실 훈장을 거절하고 말고 할 나이도 아니죠.”
“으음, 그건 그렇지.”
당시 정우현은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도 초청을 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체첸 등 국제적 분쟁에 괜히 개입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계 영토의 4분의 1을 지배했던 대영 제국 시절은 과거가 된 지 오래였지만, 영국은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다.
먼저 가장 잘 알려진, 북아일랜드. 영국은 북아일랜드 땅을 두고 아일랜드와 오랫동안 피를 흘리며 싸웠다.
그리고 인도양의 차고스 제도를 두고 모리셔스와, 남대서양의 포클랜드 제도를 두고 아르헨티나와, 지중해의 지브롤터를 두고 스페인과 분쟁을 벌이고 있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 정우현이 영국 여왕의 훈장을 받으면, 의도했든 아니든 영국과 분쟁을 벌이고 있는 국가에 적대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아쉽군요.”
잠자코 정우현이 말을 듣고 있던 엘라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엄청 영예로운 훈장인데….”
엘라는 독일인이다. 즉 유럽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대영 제국 훈장에 일종의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서양 사람들이 영국의 왕자나 공주들을 할리우드 배우 못지않게 동경하는 것처럼.
“으음, 의외인데요, 엘라.”
정우현이 곧장 말했다.
“엘라는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
이에 엘라가 조금 부끄러워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정우현의 말대로 엘라는 오랫동안 홀로 지내 세상 돌아가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만화책과 사이버 세계에만 몰두했을 뿐.
하지만 그녀도 젊은 아가씨는 아가씨였다. 어쩌다가 이따금 접하는 영국 왕실과 그들만의 세상이 인상적으로 보일 만도 했다.
그럼에도 이내 정우현의 말에 빠르게 자신의 내면을 살핀 엘라가 잠시 입을 다물고는, 한순간 미소를 짓고 말했다.
“…우현 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생각이 좀 짧았네요. 남들이 다 좋다고 해서, 꼭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죠.”
“제가 꿈꾸는 세상은.”
정우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입니다. 영국 여왕이 훈장을 수여하든 말든, 제가 훈장을 거절하든 말든 그리 중요할 건 없는 세상이요.”
“만세!”
순간 어머니가 양팔을 펼치며 말했다.
“우리 아들, 만세!”
“하하하하!”
이에 아버지와 엘라가 크게 웃었다.
* * *
그렇게 정우현은 훈장 수여 거절의 뜻을 밝혔다.
다만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어떤 말을 했다가는, 언론과 대중이 때때로 괜히 말꼬투리를 잡고 남다른 해석을 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결정에 영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했으나, 이내 수그러들었다.
영국 여왕의 훈장을 거절하는 게 엄청 이례적인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우현 같은 외국인은 물론 영국 국적의 사람들조차도 자국의 여왕이 내리는 훈장을 거절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유는 저마다 다양했다.
한편 모든 영화제의 수상과 오랜 유럽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시점 한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현아!”
권유라였다.
“오, 유라. 잘 지냈어?”
“아니, 못 지내고 있어!”
“…왜?”
“우현이 널 못 본 지 너무 오래됐잖아!”
“…아.”
예나 지금이나 직설적인 성격의 권유라다.
“너, 아직 유럽에 있니?”
“응, 이제 돌아가려고.”
“아니야, 오지 마!”
“…뭐?”
“오지 말라고, 한국.”
“왜?”
“내가 갈 거니까!”
“…어딜?”
“유럽!”
그렇게 해서 며칠 후, 권유라가 순식간에 유럽에 왔다.
옆에는 그녀의 아버지, 즉 에이치자동차 사장이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우현아.”
희끗희끗한 머리의 에이치자동차 사장이, 정우현을 보고는 환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정우현도 그가 몹시 반가워 곧장 악수했다.
권유라의 아버지가 크게 말했다.
“정작 한국에서는 거의 못 보고, 이렇게 외국에 나와야 널 볼 수 있구나!”
“하하하, 그러게요.”
라고는 했지만, 한국에서 정우현을 보기 힘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간 영화 촬영을 하는 한편 제약회사 사업에 집중하느라 주로 미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권유라의 아버지 또한 사업으로 바빴었다.
“비즈니스차 유럽에 오신 건가요?”
정우현이 물었다.
이에 권유라의 아버지가 씨익 웃고는 답을 했다.
“뭐, 비즈니스라고도 할 수 있지만.”
“….”
“그보다는 일종의 대관식이라고 할 수 있지!”
“…대관식이요?”
“그래!”
정우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와 그의 딸 권유라를 번갈아 봤다.
“하하.”
이에 권유라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우현아!”
“…응?”
“우리 아빠, 에이치그룹의 공식 회장으로 추대됐어!”
“아아.”
“아직 언론에는 발표 안 했어. 그래서 현재까지 극소수만 알고 있지.”
“잘됐다.”
“하하, 네 도움이 컸다.”
에이치그룹의 회장이 된 권유라의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유라와 함께 충전소 사업에 나서서 에이치자동차의 매출이 급격하게 올랐지. 뭐, 네가 만든 엔진 덕에 에이치자동차는 오랫동안 승승장구하고 있었다만, 이번 충전소 건으로 결정타를 날릴 수 있게 된 거다.”
“하하, 잘됐네요, 사장님. 아, 아니, 회장님.”
“하하하! 그러고 보니 우현이 너도 회장이지 않냐! 정 회장! 나보다 선배였네!”
“에이, 회장님 밑에서 일을 배운 게 엊그제 같은데요. 하여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고맙다!”
“그런데.”
하고서 정우현이 여전히 의아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유럽에는 왜 오신 거예요?”
에이치그룹 회장으로 추대된 것과 유럽 방문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는 정우현이다.
“아아.”
권유라가 소리를 내고는 곧장 답했다.
“세계 기업인 모임이 있대. 그래서 아빠가 참석하러 온 거야.”
“…세계 기업인 모임?”
정우현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엄연히 세계적 그룹이 된 우후를 이끌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처음 들어 본 모임이기 때문이다.
“응! 생소하지? 나도 이번에 아빠 때문에 처음 알았어. 언론은 물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다소 폐쇄적인 사교 모임이라 그렇대.”
“…폐쇄적인?”
“그래, 그래.”
에이치그룹 회장이 말했다.
“기업인 가운데 여러 조건을 충족한 사람 중 초대장을 받아야 참석할 수 있는 모임이다.”
“…아.”
그제야 정우현은 자신이 그런 모임을 몰랐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단기간에 엄청난 사업을 일구어 냈지만, 그만큼 인맥이 부족했다. 즉 정우현은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이토록 성장했기에, 다른 유력한 사람들과 함께할 기회가 적거나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런 모임에 초대받지 못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회장님은.”
정우현이 권유라의 아버지를 보고 말을 이었다.
“이번에 초대되신 거예요?”
“아니.”
권 회장이 짧게 답했다.
“나는 승계받았다.”
“…아.”
“우리 아버지, 그러니까 전 에이치그룹 회장님이 이 모임의 회원이었지. 근데 모임 규정상 회원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자신의 회원 자격을 후계자에게 승계할 수 있거든. 즉 아버지가 나에게 이 자리를 물려준 거지.”
“그렇군요.”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게 하나 있는데.”
“…예?”
“20년 이상의 자격을 승계한 회원은 평생 딱 한 명의 사람을 모임에 초대할 수 있다.”
“….”
“그래서 나는 너를 초대하기로 했다. 정 회장.”
무척 폐쇄적인 모임이 틀림없었다.
초대장을 받아야만 갈 수 있는 모임이라기에, 정우현은 모든 회원이 딱히 제한 없이 초대장을 행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우선 모든 회원이 아니라 20년 이상 회원이었던 사람의 자격을 승계받은 사람만이 초대할 수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모임에 참여한 이들의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평생 한 사람만 초대할 수 있다는 것도, 모임의 구성원을 무분별하게 늘리지 않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여러모로 보아 소수의 엘리트만이 참석할 수 있는 사교 집단이 명백했다.
“어때, 갈 거지?”
권 회장이 씨익 웃으며 품에서 검은 카드 한 장을 꺼내 정우현에게 건넸다.
초대장이었다.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네요.”
“왜?”
권유라가 곧장 말했다.
“아니, 한 단체에 참여한다는 게 그리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니잖아.”
하고서 정우현이 고개를 돌려 권 회장을 바라보고 말했다.
“회장님, 바로 말씀드려야 합니까?”
“아니다, 내가 초대장을 줬으니, 마음이 당기면 거기 쓰인 일시와 장소로 오면 된다.”
“…음, 어쨌든 감사합니다, 회장님. 제게 이런 제안을 해 주시니.”
“하하, 정 회장! 내가 누구 덕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나, 하하하!”
그러고서 정우현은 권유라 부녀와 좀 더 얘기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권유라는 정우현과 작별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우현아! 꼭 가 봐!”
* * *
“…저 또한 가 보시는 게 좋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정우현의 호텔 라운지.
엘라가 정우현의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죠, 엘라? 솔직히 전 조금 귀찮은데요.”
“예, 물론 꼭 가셔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현 님은 현재 누가 뭐래도 세계 최고의 자산가에 이런저런 사업을 끊임없이 성공적으로 확장하는 것은 물론, 재단 활동으로도 국제적인 명성을 드높이고 있으니까요. 거기에 영화까지 하면….”
“하하, 알겠어요, 엘라. 그보다는 제가 거길 가는 게 왜 좋은지 엘라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더 성장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
“그런 모임이 실재한다면, 분명 엄청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언론에 곧잘 나오는 그런 세계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그럼에도 세상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그런 비밀스러운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하고서 그녀가 정우현을 진지한 눈빛으로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들과 알게 된다면, 우현 님 또한 지금보다 더욱 잘될 수 있을 거예요.”
“으음.”
“물론 우현 님은 지금도 엄청난 분이기에, 오히려 그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와 우현 님을 어떻게든 모셔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가 보죠.”
순간 정우현이 가볍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