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엘라와 일론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 뒤 산책을 하고 있는 정우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 들어섰다.
“아름답군요.”
정우현이 노란 조명 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웅장한 석조 문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그렇죠?”
“예.”
정우현의 옆에는 엘라가 있었다. 일론은 식사 후 사업과 관련해 미팅을 준비해야 한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후 그룹의 사장으로 승진한 이래 더욱 바빠진 일론이다. 그럼에도 그는 일 중독이었기에, 그런 상황이 몹시 만족스러웠다.
물론, 일론이 바빠진 만큼 정우현은 더 한가해졌다.
“이 문은요.”
엘라가 브란덴부르크 문을 올려보며 말을 이었다.
“1870년 보불전쟁 때 프로이센 군이 프랑스를 격파하고, 이 문에서 개선식을 함으로써 독일 통일의 상징이 된 문입니다.”
“그래요, 엘라.”
하고서는 정우현이 곧장 말을 이었다.
“나아가 독일이 분단됐을 때 동서 베를린의 경계가 되어 베를린 장벽의 상징이기도 했죠. 즉 베를린뿐만 아니라 독일 전체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뜻깊은 유적지입니다.”
“…역시 우현 님.”
엘라가 감탄하며 정우현을 바라보고서 활짝 미소를 지었다.
“독일의 역사도 알고 계시는군요.”
“하하, 독일이면 세계 주요 국가니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서 정우현이 엘라를 가만히 바라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엘라랑 베를린에 오니 좋군요.”
“…네?”
엘라는 정우현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부끄러워하며 되물었다.
“하하, 아무래도 엘라의 고향이니까요. 그거 아십니까. 평소보다 엘라의 표정이 좋아요.”
“…아, 그래요?”
“예, 아까 전 엘라가 데리고 간 식당도 무척 맛집이었고요.”
“아마도….”
“예?”
엘라가 눈을 옆으로 돌리며 작게 말했다.
“정우현 님과 함께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하지만 정우현은 엘라의 목소리가 워낙 작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니에요.”
“으음.”
정우현이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해 걸어가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는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엘라.”
“예.”
“비트코인 말이에요.”
“아….”
다시 엘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세상에서 비트코인 프로젝트의 개발자가 그들임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들 자신밖에 없다.
그래서 누가 듣기라도 할까 목소리를 낮췄다.
정우현도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변동이 심하긴 하지만, 가격이 꽤 올랐습니다.”
“…예, 저도 계속 주시하고 있습니다.”
“음, 애초 이렇게 가격이 오를 거라고 예상은 했나요?”
“아니요. 나름의 희소성을 가질 거라고는 확신했지만, 이렇게나 비싸질 거라고는… 저도 생각 못 했습니다.”
“그렇군요.”
“예, 중요한 건 가격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당당히 화폐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사실 가격을 떠나서 변동이 이렇게 크다면, 오히려 화폐로서 기능은 떨어지는데 그게 걱정이긴 합니다.”
“맞습니다. 10억으로 표시된 자산이 하루아침에 5억이 된다면, 그것은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화폐 기능에 큰 결함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 그래서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정우현 또한 비트코인의 미래를 알 수는 없었기에 엘라처럼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 우현 님.”
“예?”
“제가 예전에 드린, 비트코인은 잘 가지고 계신가요?”
수년 전 정우현이 어나니머스의 이름으로 비트코인의 보안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자, 엘라 즉 사토시 나카모토가 고마움의 표시로 양도한 비트코인 100만 개를 뜻했다.
“하하하, 당연히 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도 팔지 않으셨어요?”
“네.”
정우현은 세계 최고의 부자다. 즉 현금 자산 또한 엄청나게 많다. 그런 그가 비트코인을 따로 팔아 자산을 불릴 이유는 딱히 없었다.
“솔직히 저도 놀랍네요.”
엘라가 말했다.
“개발자로서, 제가 초기에 채굴한 100만 개. 100만 개를 정우현 님에게 드렸습니다. 물론 당시엔 100만 개라 해도 경제적으로 그다지 가치가 없었는데 이제는….”
“음… 현재 시세가 약 9,000달러니까 90억 달러. 한화로 약 10조 원 정도 하는군요.”
“…예.”
2020년에는 비트코인의 고점이 9,000달러를 조금 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21년 기준 고점인 60,000달러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약 65조 원 정도의 가치였다.
“….”
잠시 둘은 말을 않았다. 프로젝트의 당사자로서, 비트코인의 경제적 가치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둘의 머릿속은 비슷했다. 그 막대한 가치를 언제 어떻게 현금화해 자산에 편입할까 생각하기보다는, 비트코인 자체의 성격과 미래의 용도에 관한 고민을 했다.
정우현과 엘라는 일반인들처럼 비트코인을 투자 대상으로 생각하고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다. 말 그대로 비트코인을 개발한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열광하고 비트코인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물론, 그들에게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더욱 중요한 건 앞으로의 방향성이었다.
“일단 더 봅시다, 엘라.”
“예.”
그러고서 둘은 계속 길을 걸었다.
포플러 나무의 이파리가 길 위로 떨어졌다. 그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정우현과 엘라는 마음이 잘 맞았다. 서로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했고, 심지어 무언가 서로 통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애써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감정을 상대도 느낀다는 것 또한 서로 알고 있었기에 굳이 이런저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계속 길을 가다가는 정우현이 뒤늦게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엘라.”
“예?”
“일론의 말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
“악의는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세상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이, 오로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에요.”
“예, 알고 있어요. 하지만 너무 시끄럽고, 거만해요.”
“하하하, 뭐,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어쨌든 그런 그가 실제 하고 있는 일을 보세요. 엄청나죠. 엄청난 활동력으로 우리 그룹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모처럼 미국에서 유럽까지 왔으면, 우리처럼 이런저런 좋은 것들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기고 싶을 텐데, 그는 좀처럼 쉬는 일이 없어요.”
“….”
엘라가 잠자코 정우현의 말을 경청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 그것만이 일론의 관심사입니다. 그의 손에서 얼마나 많이 새로운 것들이 창조되어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런 그의 유일한 취미란 아마도….”
하고서 정우현이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언행일 것입니다. 하루가 멀다고 SNS에 이런저런 글을 쓰고, 어딜 가든 튀는 말만 하고. 그럼으로써 일론은, 그런 엄청난 작업량을 소화하는 거 아닐까요? 하하,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란 거죠.”
“…우현 님은.”
잠자코 듣고 있던 엘라가 입을 열었다.
“참 선하세요. 저는 딱히 그렇게 타인의 관점에서 타인을 이해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현 님은 언제나, 한 사람의 강점에 주목하고서는, 그를 기반으로 그 사람의 약점을 포용하려고 해요.”
“으음.”
정우현은 자신의 그런 면을 따로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흥미롭다는 듯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물론, 우현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일론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 이상으로 창조적이고, 모든 면에서 훨씬 뛰어난 데다 괜한 말로써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는, 가슴 따뜻한 사람을 저는 한 명 알고 있습니다. 우현 님, 바로 당신입니다.”
갑작스러운 엘라의 화제 전환에 정우현이 조금 놀라서는 그저 웃었다.
“…하하, 엘라.”
“그래서 제가 우현 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고는 역시 살며시 웃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현 님 말씀대로 일론을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쉽진 않겠지만, 우현 님이 말씀하시는 거니까요.”
“하하하,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엘라.”
그러고서 둘은 다시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산책했다.
그러다가는 호텔에 들어가기 직전 엘라가 갑자기 말했다.
“참 좋습니다.”
“예?”
“…아, 우현 님이랑 단둘이 함께하니, 마음이 산뜻해지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자주, 우현 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 * *
한편 본격적인 영화제가 시작되어, 정우현은 가족 그리고 엘라와 함께 수개월 간 유럽 방방곡곡을 다니고 상을 휩쓸며 이런저런 소감을 말했다.
“감사합니다! 베니스는 여전히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이곳 북유럽의 오로라만큼이나 황홀하고 신비로운 영화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영국.
정우현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바이 더 베테랑>으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가 트로피를 양손에 쥐고는 큰 목소리로 소감을 이었다.
“이제 뒤풀이로 런던 골목의 펍만 안 가면 되겠군요!”
“하하하하하!”
수년 전 <닥터 스트레이트> 홍보 차 런던에 왔다가, 스킨 헤드들에게 습격을 받았던 일을 농담 삼아 말했다.
그렇게 시상식을 끝낸 뒤 가족과 함께한 자리.
“축하해, 아들!”
어머니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하하, 축하한다, 우현아. 근데 이 축하를 대체 몇 번이나 더 해야 하는 거냐.”
아버지의 말에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정우현과 가족들은 반년 넘게 유럽에 체류하며, 각종 영화제에 참석해 상이란 상은 모조리 받고 있었으니 그런 소리가 나올 만했다.
다만, 동생은 유럽에 온 지 한 달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오빠이자 회장인 정우현이 괜찮다고는 했지만, 동생이 더 이상 제약 회사 연구원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현 님.”
그렇게 다시 축하의 파티를 하는 자리.
엘라가 정우현에게 다가와서는 말했다.
“예, 엘라?”
“또 좋은 소식입니다.”
“뭐요?”
“영국의 여왕이 정우현 님에게 대영 제국의 명예 훈장을 내리고 싶다고 합니다!”
“와아….”
“오우!”
그 소식에 정우현보다는 옆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
“어머, 아들. 그럼 여왕님 만나보는 거야?”
“대단하다, 우현아. 네가 이제 공식적으로 귀족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게 되는구나!”
하고서 기쁨에 들뜬 부모 앞에서 정우현이 소리를 냈다.
“음.”
그러고는 짧게 한마디 했다.
“거절하겠습니다.”
“…뭐?”
아버지가 깜짝 놀라서는 되물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거절하겠다고요, 영국 여왕의 훈장.”
“그걸 왜 거절해! 얼마나 명예로운 일인데!”
“…맞습니다, 우현 님.”
엘라도 나서서 말을 이었다.
“실상 국제적으로 가장 영예로운 훈장이에요. 더군다나 영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받는 건 더 힘든 일이죠.”
“아니요, 받지 않겠습니다.”
정우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의 훈장이라면 모를까, 다른 나라의 훈장은 굳이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