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는, 일론을 바라보는 이가 정우현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우 재단의 관리자인 엘라였다.
엘라가 그런 일론을 한 번 보고서는 정우현을 불렀다.
“우현 님.”
“예?”
“제약 회사를 그냥 재단에 편입시키는 건 어때요? 그룹의 사장이 영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은데?”
순간 일론이 고개를 들고 엘라를 노려봤다.
엘라가 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후의 사장이 사업 논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뭐야!”
“그만하세요.”
정우현이 말했다.
이에 일론은 물론, 엘라도 정우현의 눈치를 보며 잠시 말을 아꼈다.
엘라와 일론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우현을 정점으로 둘은 각기 재단과 사업의 이인자로서 몇 번 함께 만난 일이 있었다.
한데 둘은 첫 만남부터 서로를 좋게 보지 않았다.
일단 엘라는,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는 일론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끄럽고 볼썽사나우며 예의 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때는 천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일론의 진취적인 기업가 정신과 전력을 다해 일에 몰입하는 열정, 또한 기계 공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능력은 엘라 또한 잘 알고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만약 세상에 그보다 뛰어난 정우현이란 사람이 없었다면, 곧잘 거드름을 피우는 일론이 오만한 모습으로 모든 걸 다 가진 양 언행을 일삼았을 게 눈에 선히 보였다.
반면, 일론도 엘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론이 보기에 엘라는, 일단 속을 알 수 없었다.
항상 사람들의 뒤편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다가는 자신이 해야 할 일만 하고, 어딘가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에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엘라의 출신 성분도 마음에 걸렸다. 뭐가 어쨌든 슈타지 요원의 딸이라는 것에서 엘라의 존재는, 일론의 어두운 과거를 상기시켰다.
일론은 학창 시절 남다른 성격으로 곧잘 다른 아이들에게 폭행과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이다.
즉 엘라의 아버지가 생전 온갖 수단을 사용해 폭압적으로 사람들을 대했다는 것에서, 일론은 괴롭힘을 당했던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며 그런 사람의 딸인 엘라가 부정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일론 또한 안다. 그것은 엘라가 아니라 엘라 아버지의 잘못임을. 나아가 그로 인해 엘라가 부유한 삶을 살기는커녕 오히려 비참한 삶을 살아왔음을.
그럼에도 인간의 이해는 때로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더군다나 뼈에 사무치도록 힘든 경험이 있었던 사람은 더 그렇다. 일론은 엘라의 배경에 관해, 그녀를 비난하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녀를 싫어하는 감정을 물리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실제 만난 그녀의 태도를 보니 그런 감정이 오히려 정당해졌다. 그녀가 자신에게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론은 어디서든 사람의 관심을 즐긴다. 그만큼이나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사람에게 거절당하는 순간이다. 사람의 주목을 받고 싶은 사람은, 사람에게 무시당할 때 크나큰 고통을 받는다. 무언가를 원하는 만큼, 그 무엇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괴로워질 수밖에 없으니까.
한데 재단의 관리자인 엘라를 만나 보니, 그녀는 자신을 거의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정우현만큼은 아니지만, 어딜 가든 대단한 사람으로 칭송받는 일론 마스크 자신을, 엘라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무시를 했다.
너스레를 떨며 자신이 우스갯소리로 무언가를 말할 때마다 깔깔 웃거나 관심을 보이는 사람 가운데 오직 한 명, 한 명만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 사람이 바로 엘라였다. 일론은 그런 엘라가 싫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엘라에게는 무언가 비밀스러운 느낌이 났다. 그녀의 어릴 적 과거와 출신은 뒤로하고, 그녀가 이후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러다가는 대체 어떻게 정우현의 눈에 들어와 우 재단의 관리자라는 직함까지 올랐는지, 그게 무척 궁금했다. 어디에서도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밀스러운 그녀의 행적이 그녀를 더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데 그런 무표정하면서도 비밀스러운 그녀가 얼굴에 미소를 띠는 경우가 꼭 있었다. 바로 눈앞에 정우현이 있을 때다. 엘라는 오직 정우현 앞에서만 생기가 있고, 눈웃음을 지었으며, 때론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일론은 엘라의 이 점이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스 정우현의 오른팔은 누가 뭐래도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엘라가 보스와 무척 가깝게 지내며 일정 대부분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이 점이 또 일론의 눈에 거슬렸다.
사실 이는 엘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우현의 가족이나 오랜 친구를 제외하면, 자신이 가장 그와 가깝다고 여기고 실로 그를 애착하고 있었기에 일론이 자신보다 정우현과 가까운 걸 원치 않았다.
한마디로 엘라와 일론은 성향상 애초 서로 상극인 가운데, 정우현을 사이에 두고 질투까지 하는 사이였다. 둘 모두 자신이 능력으로나 친분으로나, 정우현과 가장 가까운 이인자라고 생각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여겼다.
“그만하세요, 모처럼 이렇게 유럽에까지 와 함께하게 됐는데, 서로 그런 식으로 대할 겁니까?”
정우현이 다시 한번 꾸짖듯 엘라와 일론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엘라는 즉각 고개를 숙이고 미안함을 표했다.
“흠!”
일론이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정우현을 다시 보고 말했다.
“그나저나 보스. 그래, 알겠어. 당장 사람들에게 약값을 많이 받지 않는다는 방침은 그렇다 쳐도, 독점 판매 기간이 지나면 어떻게 하게? 다른 제약 회사들이 우리 회사의 성분을 토대로 그대로 복제 약을 출시할 텐데, 그때도 원가 비용만 뽑을 수 있게 싸게 팔 거야?”
“그건.”
정우현이 아닌 옆에 있던 엘라가 대답했다.
“그때 가서 결정하면 될 일입니다. 어차피 특허 독점 판매가 끝나면, 우후죽순으로 같은 성분의 약이 출시되어, 가격 경쟁을 하느라 제값을 찾기 마련이에요. 그렇게 되면 우리 우후 제약 회사의 원조 약도 비슷하게 가격을 올리면 됩니다. 비슷한 값이면 무조건, 오랫동안 원조로 자리매김했던 우리 약을 사게 될 테니까요.”
하고 그녀가 옆에 있는 정우현에게 시선을 돌리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렇죠, 우현 님?”
“하하, 맞습니다.”
정우현이 웃으며 화답했다.
“정확하네요. 제 생각이랑. 역시 뛰어납니다, 엘라.”
“…감사해요.”
하며 엘라가 부끄러워했다.
일론은 또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을 치켜뜨고 바라봤다.
이러나저러나 정우현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우후 제약회사는 계속 이런 전략을 취할 것입니다.”
“….”
일론과 엘라가 입을 다물고 정우현의 말을 경청했다.
“신약을 만들면 원가 비용에 사람들에게 보급할 거예요. 그리고 독점 기간이 풀려, 다른 업체가 복제약으로 뛰어들 때 형성되는 시장가로 판매할 것입니다.”
“아아.”
엘라는 감격한 듯 탄성을 내뱉었다.
일론은 계속 잠자코 있었다.
“하여간 그렇게 알고, 일을 추진합시다.”
하고 정우현이 일론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일론. 어쨌든 이렇게 여기서 보니 잘됐네요. 일은 어때요? 뭐, 문제없죠?”
“좋지, 뭐. 모든 사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특히 이번 수두 바이러스 치료제로, 제약 회사의 성장이 훨씬 더 속도를 내게 될 거야. 싼값에 약을 판다고는 하지만, 우리 회사의 연구 능력을 믿는 대형 투자자들이 파이프라인을 엄청 꽂으려 한다고. 벌써 요 며칠만 해도, 미국 3대 은행으로부터 투자 제안을 받았어. 심지어 연기금까지!”
“와우, 연기금까지요? 하하하, 좋네요. 그들은 오히려 우리가 신약을 갖고 폭리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장기간 견실하게, 고객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을 알아봤을 겁니다. 그래서 연기금 같은 보수적인 자금까지 들어오는 것 같네요.”
“으음, 그렇군.”
일론이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듯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보스, 이참에 오늘 새 사업에 관해 제안할 게 있어.”
“…오, 새 사업이요? 얼른 얘기해주세요!”
정우현이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일론의 사업 감각은 정확하다. 가끔은 무모해 보일 때도 있지만, 무모한 일을 기어코 해내는 이가 바로 일론이었다. 따라서 그가 작정하고 회장인 정우현에게 사업 얘기를 할 정도면, 이미 어느 정도 확신에 가득 차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돈 냄새를 맡았다는 뜻이다.
“…비트코인.”
짧은 단어 한마디에 정우현은 물론 옆에 있는 엘라까지 놀랐다.
“비트코인 쪽으로 우리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아.”
“….”
정우현은 잠자코 있었다.
어나니머스와 사토시 나카모토. 즉 비트코인 프로젝트의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비트코인을 언급하는 일론이기에, 당장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처음엔 순 사기인 줄 알았는데 말이지….”
하는 순간에 옆에 있던 엘라가 움찔했다.
비트코인의 창시자인 엘라는, 비트코인을 그야말로 순수한 의도로 만들었다.
어떠한 통제나 권력에도 구애받지 않는 화폐.
한데 그런 의도로 만든 화폐를 두고 사기라는 표현을 쓰니 엘라로서는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보니까 아닌 것 같더라고. 사람들이 점차 열광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각종 기관에서도 비트코인을 사들이고 있다는 말이지.”
“예, 그건 저도 압니다.”
정우현이 모르는 척 말을 받았다.
차마 일론에게, 비트코인 프로젝트의 당사자가 자신과 옆에 있는 엘라라고는 절대 밝힐 수 없었다.
SNS에 거의 중독되다시피 한, 떠들기를 좋아하는 일론이 알게 되면, 곧 세상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개발자가 드러나지 않은 유일한 가상 화폐라는 비트코인의 최대 이점이 사라지게 되어, 가상 화폐 열풍을 타고 마구잡이로 등장한 투기 목적의 여타 코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게 된다.
또한, 엘라와의 약속도 있었다. 이런저런 상황을 다 떠나서, 정우현은 엘라에게 비트코인 개발자라는 비밀을 결코 밝히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그녀를 베를린의 골방에서 건져 냈다.
즉, 정우현과 엘라는 둘 사이 비트코인 프로젝트라는 비밀을 중심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마음을 열었다. 따라서 이 사실을 일론에게 알린다면, 무조건 엘라를 잃게 된다.
“그래서 우리도 엄연히 이윤 창출을 위한 기업으로서, 가상 화폐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말이지.”
일론이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이었다.
그는 실제 전생에서도 가상 화폐에 관해 무척이나 낙관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오죽하면 자신이 만든 전기차를 비트코인으로 결제 가능하게 하기도 했고, 회사의 막대한 자금을 비트코인으로 소유하기도 했다.
“솔직히 원리는 되게 간단하단 말이야. 내가 자면서도 이틀, 아니, 하루면 만들 수 있는 걸 뭐 그리 대단하다고 열광하는지….”
하고선 일론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일단 돈이 될 것 같으니, 뭐.”
“말만 번지르르하시네요.”
가만히 있던 엘라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뭐?”
“말만 잘하신다고요. 그렇게 비트코인이 시시한 거였으면, 애초 일론이 만들지 그랬어요?”
“이게 아까부터 자꾸 시비를 거네?”
“시비는 당신의 오만불손한 태도 자체에 있습니다, 일론.”
“뭐라고?”
하고서는 일론이 마구 윽박지르고 싶은 것을 정우현의 눈치를 보며 가까스로 참았다.
그대로 그는 엘라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하! 재단의 관리자 아가씨. 그나저나 언제 봤다고 자꾸 내 이름을 불러? 나는 우후 그룹의 사장이야. 사장이라고!”
“자, 자!”
정우현이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안 되겠네요. 두 분, 자꾸 왜 그러는 겁니까!”
“….”
정우현의 목소리에 엘라와 일론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개인적으로 누구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 엄청 싫어하는데, 어쩔 수 없네요. 일과 관련해서는 두 분의 공식적인 상사로서, 이 시점, 제가 한 가지 지시를 하겠습니다.”
정우현의 말에 엘라와 일론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정우현이 무슨 말을 할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엘라.”
“예.”
“일론.”
“…응.”
“두 분 마주 보고 서세요.”
“….”
자신의 말에도 엉거주춤 서 있는 그들을 보고, 정우현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얼른!”
이에 둘이 어색하게 마주 보고 섰다.
“자, 둘이 그럼 악수를 하세요.”
하고 정우현이 눈짓을 하자 엘라와 일론이 결국 억지로나마 손을 잡았다.
“그리고 저를 따라 하세요. 미안합니다.”
“….”
손만 잡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둘을 보고 정우현이 다시 말했다.
“자, 얼른!”
“…미….”
정우현의 다그침에, 엘라와 일론이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좋아요.”
하고는 정우현이 말을 이었다.
“계속 따라 하세요. 멋진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서.”
“…멋진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행복….”
“더 크게!”
“…행복합니다!”
“하하하, 좋습니다!”
짝! 짝! 짝!
정우현이 손뼉을 치며 크게 말했다.
“얼마나 좋아요! 이렇게 동료들끼리 서로를 아끼고 덕담을 하니!”
엘라든 일론이든, 둘이 아무리 천재라도 정우현 앞에서는 그저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둘 다 세상에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우현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나아가 그를 오랫동안 마음 깊이 따라 정우현의 말은 거의 복종하다시피 들었다.
“어때요, 괜찮죠? 기분이 좀 나아지고, 서로 좀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죠?”
하고 웃는 정우현의 말이 또 아예 농담은 아니었다.
정우현에 의해 반강제로 악수를 하고 상호 표면적으로나마 좋은 말을 했지만, 실제 그렇게 하고 나니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면서 이전보다 훨씬 편안한 마음이 드는 엘라와 일론이었다.
사실 이 같은 대화법은 갈등을 겪는 둘 사이를 원만하게 하는 데 실제로도 효과가 있는 심리 치료법이다.
정우현이 과거 학습한 심리학 지식을 바탕으로 즉석에서 활용했다.
“음, 그럼 이 분위기를 살려,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갑시다!”
그러고서 그가 엘라와 일론을 이끌고 앞장서 나아갔다.
“자, 모두 다 같이 웃어 봅시다,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