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유럽으로 향하는 전용기 안.
정우현은 아버지랑 침실을 같이 썼다.
“하하하, 우현아.”
“예?”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옛날에 브래드의 전용기 타던 때 생각난다.”
“하하, 그러게요.”
아버지가 그 당시를 추억하며 미소를 짓고 말을 이었다.
“브래드랑 당구도 쳤었는데 말이지.”
“아버지가 이기셨잖아요!”
“에이, 그건 네가 도와줘서 그런 거고.”
“하하,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아버지가 잘하셔서 이긴 거라니까.”
하고서 정우현이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봤다.
주름살이 늘고 흰머리도 조금 났다.
나이가 쉰이 넘었으니 그럴 만했다.
“왜 염색은 안 하세요, 아버지?”
“늙는 건 자연스러운 건데.”
아버지가 자신의 흰머리를 거울을 통해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숨겨서 달라질 게 있겠니.”
“으음.”
어렸을 때, 정우현이 꾀병을 부려 전생과 달리 천수를 누리고 있는 아버지.
그럼에도 노화는 당연히, 막을 수 없다.
아버지는 늙고 계셨다. 그 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모처럼 마음의 여유를 갖고 가족과 여행을 가게 되니 그런 것들이 보였다.
“그래도 아빠는.”
아버지가 사뭇 밝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참 행복하다. 아들 잘 둔 덕에 남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어.”
“아버지가 절 잘 키워 주셔서 그렇죠.”
“아니다.”
순간 아버지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의 모든 아버지가 최선을 다해 자녀를 양육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들이 우현이 너처럼 꼭 다 잘되지는 않아.”
“….”
“그런 면에서 난 행복하고,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정우현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난 생에선, 자신이 제대로 성장하는 것조차 보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허무하게 생을 다한 아버지다.
한데 그런 아버지가 지금은, 이렇게 흰머리가 날 정도로 오래, 그리고 건강히 살아계신 채 눈앞에 있다.
때로는 이 사실이 자신이 이룬 그 어떤 업적보다도 훨씬 중요하게 느껴졌다.
“우현아.”
“예, 아버지.”
“난 네가 자랑스럽다.”
하고서 아버지가 정우현을 안았다.
집에 있으면 아버지는 보통, 어머니와 함께하며 익살스럽고 가벼운 모습만 보일 뿐 속에 있는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
한데 이렇게 아들과 단둘이 있으니 모처럼 고마움을 표하며 뜻깊은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
똑똑.
순간 침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예?”
“식사하러 오세요.”
엘라였다, 엘라가 그들 두 부자에게 식사 시간을 알리기 위해 찾아왔다.
이에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아, 엘라. 알았어요, 지금 갈게요.”
* * *
전용기 내 식사 테이블.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엘라가 환히 웃으며 정 씨 두 부자를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가 그들을 보자마자 크게 말했다.
“얼른 와서 먹어!”
“여보, 무슨 좋은 일 있어?”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좋은 일? 당연히 있지! 바로 이 여행이 좋은 일이잖아!”
“아, 하하. 그렇지.”
어머니는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서 고개를 돌려 엘라를 보고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엘라가, 손이 참 야무지고 예의도 바르네. 뭐든지 빨리해 내고, 말도 예쁘게 하고.”
“…감, 감사합니다.”
엘라는 한국에 수년을 살면서 한국어를 집중적으로 연습하기도 했다.
본디 천재인 그녀이기에 학습 속도도 단연 빨랐다.
정우현만큼은 아니지만, 일찍이 언어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구태호 이상으로 언어를 빠르게 학습했다.
물론, 정우현과 함께하며 틈만 나면 개인 교습을 받은 효과도 무척 컸다. 교육자이자 강사로서 구태호를 경찰학교 수석 입학, 권유라는 NIT 장학금 입학, 동생은 국내 최고 대학 약학과에 입학시켜 수석으로 조기 졸업시킨 이가 또 정우현이니까.
“봐 봐! 한국어도 잘하고! 어쩜 이렇게 예쁘게 생긴 애가, 뭐든지 다 잘할까?”
어머니의 칭찬에 엘라가 부끄러운 듯 눈을 돌렸다.
“엘라는 여러 언어를 해요.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 등 유럽의 언어는 거의 다 하죠.”
틈을 놓치지 않고 정우현이, 엘라에 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머니가 엘라를 좋아하며 칭찬하니 괜히 기뻤다.
“…아, 그래도.”
엘라가 한국어로 말했다.
“정우현 님보다는 한참 부족합니다. 제가 할 줄 언어는 대략 스무 개 남짓. 하지만 정우현 님은 거의 백 개 이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하, 엘라.”
정우현이 말했다.
“어머니는 엘라의 언어 능력만 칭찬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죠, 어머니?”
“맞아.”
어머니가 빠르게 말했다.
“엘라처럼 예쁘고, 여성스러우면서도 똑똑하고 착한 사람은 처음 봐.”
하더니 시선을 돌려 동생을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 두 번째인가? 우리 아기가 있으니!”
어머니는 동생 정다현을 여전히 아기라고 즐겨 불렀다.
“…아니에요.”
이에 동생이 부끄러워하면서도 천천히 할 말을 했다.
“저는 엘라 언니 발끝에도 못 따라가요. 언니가 저보다 훨씬 똑똑하고 예쁘니까요.”
“아닙니다!”
엘라가 놀란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소 목소리를 높였다.
따뜻하고 애정이 넘치는 한 가족의 대화 주제가 자신인 데다, 한결같이 엄청난 칭찬을 하는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됐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내면을 꽉 채우는 행복감에 몰래 입술을 깨물고 바르르 떨어야 했다.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호의와 애정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태어났을 땐, 세상 온갖 비난을 받았던 아버지가 의문을 죽임을 당하고 어머니는 매일 눈물을 흘리며 우울증을 앓다가 병으로 죽었다.
이에 들어가게 된 고아원에선 어른은 물론, 또래 아이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남에게 무시를 안 당하고 빵이라도 하나 더 챙겨 먹을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그런 그녀가 세상으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고, 골방에 틀어박혀 자신의 천재성에 홀로 눈을 뜨고 오로지 사이버 세계에만 집중하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데 그런 그녀가 지금, 디지털 세계도 아닌 현실 세계에서, 한 가족으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칭찬을 받고 있다.
이것은 그녀의 삶에 있어,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따스하기 그지없는 경험이었다.
“하하하, 그만하자꾸나.”
아버지가 크게 웃으며 역시 다정한 눈빛으로 엘라를 보고 입을 열었다.
“우리 엘라가 많이 당황하는 것 같다.”
“맞아요.”
정우현도 옆에서 거들었다.
“엘라는 아직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을 거예요.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죠, 엘라?”
“…예, 맞습니다, 우현 님.”
엘라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하하, 저 또한 엘라가 기뻐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지만,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자, 모두 밥 먹읍시다!”
하고 정우현이 숟가락을 드는데 엘라가 불쑥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에 정우현 가족이 모두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우현 님을 따라 저의 작은 공간을 뛰쳐나와 이렇게 여기에 있을 수 있게 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의 그 결단이 참 옳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고서 그녀가 가족들에게 머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저는 이런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익숙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이러면 이럴수록, 더, 정우현 님에게 잘하고 여기 계신 가족분들에게도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잠시 테이블 위 정적이 흘렀다.
엘라가 이렇게 진지하게, 그리고 마음을 다해 감사함을 표할 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하.”
그러다가는 아버지가 어색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녹였다.
“여보 말이 맞네!”
“응?”
“정말 말을 예쁘게 하고, 아주 예의 발라!”
“그렇지? 요즘 엘라처럼 좋은 사람, 찾기 힘든데.”
“맞아요.”
동생까지 동의하는 모습에 엘라가 다시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하하“
정우현은 그 모습이 재밌어서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만 해요! 이러다 엘라 체하겠어요!”
* * *
식사 후 취침 시간.
아버지가 정우현을 불렀다.
“우현아.”
“예?”
“엘라, 어떻게 생각하냐?”
“엘라요?”
하고선 정우현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
“엄청나죠! 제게 큰 힘이 되고 있어요. 분명 재단 일만 맡겼지만, 엘라는 정말 모든 면에서 저의 힘을 덜어 주고 있어요. 아주 든든하고요, 또 믿음직스럽습니다.”
“흐음….”
아버지가 소리를 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 거 말고.”
“….”
정우현이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없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여자로 어떻냐는 거지.”
“…여자요?”
“그래. 네 나이, 이제 스물여덟 아니냐. 마냥 어린 나이도 아니고, 음.”
하더니 아버지가 정우현의 눈치를 슬쩍 보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연애 경험이 또 없진 않을 테고. 물론, 아빠는 모르지만, 하하.”
정우현은 계속 입을 다물었다.
실로, 연애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생까지 하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제대로 된 사랑 같은 건 하지 못했다.
가난한 형편에 몸이 아픈 어머니와 대학 생활을 하는 동생을 챙기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즉 연인보다는 가족이 항상 우선이었다.
그래서 사랑다운 사랑은 하지 못했다. 어쩌다 이성을 좀 만나면, 사이가 깊어지기도 전에 멀어지면서 결국 헤어지는 등, 그런 연애 같지도 않은 연애가 조금 있는 게 다였다.
“하하하, 아버지.”
정우현은 무슨 그런 소릴 하냐는 듯 웃고 말았다.
“어허, 얘 봐라? 지금 그렇게 마냥 웃을 때가 아니야. 우현이 너 그래, 이루 표현할 수 없이 크게 성공한 건 참 좋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빠의 영원한 자랑거리지. 한데 그렇다고, 뭐, 결혼이라도 안 하고 살겠다는 거냐? 지금처럼 계속 혼자?”
딱히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꼭 여자를 만나야 한다거나,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한 적 없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기.
현재로서 그게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여자와의 만남과 결혼 등은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너 설마.”
“예?”
아버지가 순간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유라 때문에 그러냐.”
“허.”
정우현이 놀라서 탄식을 내뱉었다.
“왜 둘이, 아직도 사귀어?”
“아버지, 저희 한 번도 사귄 적 없어요.”
“하하, 거참.”
아버지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유라한테 가서 말해 봐라. 너랑 한 번도 사귄 적 없다고. 그럼 유라, 걔 성격상 아주 노발대발할걸?”
“아뇨, 아버지. 저흰 진짜 그냥 친구거든요.”
“녀석, 수학이고 바이러스고 온갖 어려운 건 혼자 다 알고 있으면서 여자 마음은 하나도 모르는구나!”
솔직히 하면 모른다고 하기보다는 관심이 없는 거였지만, 아버지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하여간 지금 유라랑 사귀는 게 아니라 이거지?”
“그렇다니까요.”
“그럼 잘됐군.”
“왜요?”
“우현아.”
“예.”
“너, 엘라랑 만나라!”
“…예?”
정우현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엘라랑 만나라고! 얼마나 예쁘고 착하냐? 거기에 똑똑하기까지! 네가 말한 대로, 너한테 또 엄청 도움이 되기도 하고!”
“…아버지.”
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정우현을 보며 아버지가 계속 말했다.
“왜? …설마, 외국인이라 그래? 어허! 괜찮아, 괜찮아! 아빠는 그런 거 전혀 상관 안 해! 일찍이 미국인인 브래드 퍼트와 친구가 된 이래, 나는 스스로 세계 시민이라는 생각을 하고 산단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데 있어선, 피부색이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봐라, 네 엄마랑 내가 피부색이 같고 심지어 국적과 언어도 같다고 해서, 꼭 항상 마음이 통하고 그러진 않지 않냐. 그러니까, 괜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하하하하!”
아버지가 말하는 도중 정우현이 크게 웃었다.
“왜, 왜 웃어?”
“아버지! 어머니랑 아버지는 잘 맞는 거 아니었어요?”
“…잘 맞지, 잘 맞는데… 으음.”
“하하하, 그러잖아도 전에 어머니가 저한테 그랬는데요.”
“응? 뭐? 네 엄마가 아빠에 관해 뭐라 하던?”
“그게 실은….”
하고서 정우현이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고는, 끝내 편안한 비행에 들어설 수 있었다.
* * *
그리고 도착한 독일 베를린.
베를린에 오자마자, 현지 기자들이 정우현을 둘러싸며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정우현은 어안이 벙벙해서 조금 가만히 있었다.
어딜 가든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마치, 무슨 일이 생긴 듯 작정하고 언론이 그를 맞이한 건 생소했기 때문이다.
“우현 님.”
옆에 있던 엘라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예?”
“축하드립니다.”
“….”
“우후 제약 회사의 신 약 WH001이 3상을 통과했습니다. 저도 지금 막 전해 들었어요.”
“아아.”
“이로써 인류를 괴롭히던, 오랜 바이러스 하나를 완전히 정복하게 됐습니다.”
정우현은 이제야 눈앞에 장사진을 친 현지 기자들이 이해가 됐다.
“모두 정우현 님이 이룩하신 일이에요.”
엘라가 자신의 일보다 더 기뻐하며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