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영화 <바이 더 베테랑>의 수상은 미국 영화제가 끝이 아니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영화가 세계적으로 흥행한 가운데 일반 대중들 이상으로 열광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평론가 등 각종 영화제 심사 위원이었다.
그들은 넋을 잃었다. 영화가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어 2020년. 정우현은 베를린, 칸, 베니스 등 세계 3대 영화제를 포함한 각종 시상식이 열리는 유럽에 초청을 받았다.
모두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다.
“아아, 대단하다.”
그 소식을 접해 들뜬 정우현의 가족들이 거실에 함께 있는 가운데, 어머니 황희진이 기분이 좋아서 싱긋 웃으며 말했다.
“대단해, 우리 아들.”
“하하, 감사합니다.”
“이번 영화는….”
옆에 있던 동생 정다현이 한마디 했다.
“나도 진짜 재밌게 봤어.”
“오, 그래?”
“응. 슬펐어, 난 그 중국인 소녀의 관점으로 영화를 봤거든.”
아무래도 여자이다 보니, 주인공 브래드보다 소녀 링에게 감정 이입을 한 동생이었다.
“엄마를 잃고, 아빠도 그렇게 잃고 얼마나 절망적이야. 그렇지만 브래드 아저씨를 만나서 다행히 혼자가 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줬지.”
동생이 오빠 정우현의 영화를 찬찬히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삶의 의미를 거의 잃었던 두 존재가 만나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줘. 동네 아저씨와 이름 모를 소녀에 지나지 않았던 둘은, 그렇게 함께하게 되고, 끝내는 일종의 아빠와 딸이 되는 것 같아. 내 말 맞지, 오빠?”
“하하하, 다현이, 영화 제대로 봤구나.”
정우현이 웃으며 답했다.
“사실 작품이란 건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독립적으로 완결성을 갖기 마련이야. 창작자가 그에 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건 좋지 않지. 어디까지나 작품과, 그것을 보거나 듣고 느끼는 감상자만 있을 뿐.”
“음….”
동생이 정우현의 말을 듣고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그래도 창작자의 창작 의도란 건 있을 수 있지. 맞아, 다현아. 글을 쓰고 카메라를 돌리는 내내, 대강 네가 말한,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어.”
“아아, 그렇지?”
“근데 다현아.”
“응?”
“너 우리 스트리밍에 있는 감독판도 봤어?”
“아.”
하고 동생이 당황하더니 조금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응.”
이에 정우현이 곧장 물었다.
“어땠어?”
궁금하고 한편으로는 조금 장난기가 발동하기도 했다.
평소 잔혹한 영상은 거의 보지 못하는 동생이, 종반의 액션 씬을 어떻게 봤을까 하고.
“솔직히 말해도 돼?”
“당연하지!”
“보다가 껐어.”
“…아하.”
“너무 잔인해. 그리고 그렇게 브래드 아저씨가, 링의 복수를 한답시고 사람들을 모조리 다 죽일 필요가 뭐 있어? 어느 정도 혼만 내도 되는 거 아니냐구….”
하고 말끝을 흐리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 정우현이 한편으로는 예상했다는 듯 재밌어서 크게 웃었다.
“하하, 역시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
“아니, 왜!”
순간 아버지 정기석이 불쑥 말했다.
“난 그게 훨씬 재미있더만! 아주 시원하고!”
그러고서는 그 자신이 마치 영화 속 브래드가 된 듯 미간을 찌푸리며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못된 놈들은 그렇게 당해도 싸요! 그럼, 그럼!”
“여보.”
그 순간 어머니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어제 몇 시에 들어왔어?”
“…아.”
“응?”
“열두 시 전에는 들어온 것 같은데….”
“열두 시는 무슨, 새벽 두 시야. 그것도 두 시 이십 분! 내가 여보 집에 왔을 때 다 확인했다고.”
“…자고 있는 거 아니었어?”
“잠이 어떻게 와? 집에 오면서 그렇게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래서 한 소리 하려다가 새벽인데 말만 길어질 것 같아서, 일단 잠든 척한 거라고.”
“…그랬어? 아니, 비즈니스 얘기가 길어져서… 여보도 알지? 부동산업자 최 사장. 이번에 또 건물 하나가 급매로 좋은 게 나와서, 그 얘기로 최 사장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아이고, 그렇다고 얘기를 새벽 두 시까지 하세요?”
어머니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기석 씨.”
“응?”
“뭐, 아까 못된 사람은 당해도 싸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하하, 그건 우현이 영화에 나오는 악당들처럼….”
“대체 약속을 몇 번 어기는 거예요. 아무리 늦어도 자정 전에는 들어온다고 하셨으면서.”
“으음, 여보, 대한민국 사회에서 말이야, 남자가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가장이라는 멍에와 남자로서의 중압감을, 여자인 여보는 결코 알 수 없을 거야.”
“하!”
“아빠, 엄마.”
핀잔을 주는 어머니와 핑계를 대는 아버지 사이, 동생이 그들 부모를 불렀다.
“…응, 다현아?”
어머니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동생에게 시선을 돌리며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목소리마저 다정했다.
“그만하세요, 오늘 모처럼 온 가족이 다 모였잖아요. 오빠도 미국에서 오랜 영화 작업을 끝내고 오고, 저도 회사 파견차 오랜만에 왔는데.”
옳은 말이었다. 이제 네 가족은 이전처럼 항상 같이 있지 않았다.
정우현과 동생 정다현이 장성해 이렇게 모두 같이 있는 날이 오히려 드물었다.
정우현은 세계 곳곳을 드나들며 이런저런 일을 했고, 동생도 미국 우후 제약회사 본사의 연구원이기에 이처럼 따로 한국지사에서의 일을 처리할 때가 아니면 국내에 들어올 때가 적었다.
“…그런데 계속 우리 앞에서 이럴 거예요?”
“하하하.”
정우현은 사실 부모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실상 부모는 정우현이 무척 어렸을 때부터 그랬기에, 이처럼 사소한 일로 가볍게 다투곤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야말로 그들 가정을 상징하는 행복의 증표 같았다.
“…하하하, 알았다, 다현아.”
아버지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어머니도 동생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순간 정우현이 입을 열었다.
“그러잖아도 오늘 우리 가족에게 발표할 중대한 사항이 두 가지 있습니다.”
“뭐?”
동생이 곧장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빠를 바라봤다.
“먼저 우후 제약회사 본사의 정다현 신임 연구원이….”
“….”
동생의 얼굴에 이내 초조함이 느껴졌다.
“이번에 주임 연구원으로 승진하게 됐습니다.”
“와아.”
“또한 회장인 저의 권한으로, 정다현 연구원을 한국 우후 제약회사 연구팀으로 발령 냈습니다!”
“어머!”
이번엔 어머니가 크게 놀랐다.
그러고는 감격한 듯 동생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하하하, 잘됐구나.”
아버지도 기뻐 한마디 했다.
동생은 한국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하고 오빠의 회사인 우후 제약 회사에 취업했다.
동생이 원하기도 했고, 정우현 또한 그녀가 자신의 회사에서 꿈을 실현하면 좋을 거라 생각했기에 이뤄진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채용 절차에 있어서 남다른 편법은 없었다.
동생은 엄청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의 젊은 지원자 중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인재였고, 그에 따라 정식 절차를 통해 그녀를 채용했다. 먼저 미국 본사에서 인턴십 프로그램을 진행한 뒤, 우수한 성과와 실적으로 정식 직원이 됐기 때문이다.
이에 동생은 물론 가족 모두 기뻐했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바로, 부모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것.
이른 나이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바쁘게 살아왔던 정우현과 달리, 동생 정다현은 부모님의 품에 항상 있었다.
그래서 부모로선 그녀를 미국에 보내는 게 쉽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 황희진이 그랬다.
한편으로는 동생도 그랬다. 큰마음을 먹고 미국에 와, 일도 무척이나 즐겁게 했지만, 집에 있는 부모님이 자꾸 떠올랐다.
그러는 와중 한국에서 우후 제약회사 지사가 설립됐고, 내심 한국 지사로 가고 싶어 했다.
그렇다고 회장인 오빠 정우현에게 따로 말하지는 않았다.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괜히 부담을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우현이 즉각 그 점을 포착했다. 부모님에게나 동생에게나 한국에 같이 있는 게 여러모로 좋으리라 판단했다. 한편으로는 새 한국지사에도 유능한 연구원이 필요한데, 한국 출신의 연구원인 동생이 그곳에서 일하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기도 했다.
“와아, 우리 다현이!”
어머니가 기뻐하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엄마랑 다시 같이 사는 거야!”
“…네!”
“좋다, 좋아!”
“음….”
아버지 또한 기뻐하다가는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잘됐다, 다현이, 이대로 엄마 아빠랑 살다가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면 딱….”
“…네?”
순간 동생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집이라뇨?”
“…하하.”
아버지가 괜스레 웃다가는 말을 이었다.
“다현아, 너도 올해 이제 26살이다. 마냥 어린 나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언제까지나 우리랑 살 수도 없고….”
“아니에요!”
동생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정우현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오빠는요? 오빠한테는 그런 소리 한 번도 안 하셨잖아요?”
“…아, 우현이는 워낙 어릴 때부터 알아서 잘했으니까….”
같은 자식이었지만 부모에게 두 남매는 인식이 달랐다. 첫째 정우현은,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워낙 놀라운 자식이었기에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둘째 정다현은, 막내라서 그런지 여전히 아이 같았고 걱정이 됐다.
그들 부모는 동생이 미국에 취업해 타지 생활을 했을 때, 애써 표현을 참았지만 내심 무척 걱정했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았다. 그 정도로 부모는 동생을 커서도 아이 다루듯 하며 애지중지 여겼다.
그래서 정우현과 달리 동생은 어떻게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야만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들 부모는 늙는다. 그리고 언젠간 생을 다한다. 한데 부모가 없는 세상에서 첫째 정우현은 걱정이 없었지만, 막내 정다현은 걱정이 됐다. 그래서 그녀를 시집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도 혼자서, 잘할 수 있어요.”
동생이 부모의 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힘을 주어 말했다.
“으흠, 물론 잘하겠지! 하지만 시집가면 더 잘살 수 있다!”
“…아빠.”
“하하하.”
정우현이 그런 아버지와 동생을 보며 크게 웃었다.
동생은 결국 입을 다물고 뾰로통한 표정을 했다.
“근데 아들.”
어머니가 정우현을 보고 말했다.
“예?”
“아까 얘기할 게 하나 더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정우현이 오늘 모처럼 집에 와 가족 모두를 눈앞에 두게 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동생의 승진 및 한국 발령 소식은 실상 전화상으로도 알려 줄 수 있었기에, 한국에 온 진짜 목적은 이 때문이었다.
“제가 여러 유럽 영화제에 초청받았잖아요.”
“그렇지.”
“이 기회에 가족 모두와 유럽 여행을 하려고요!”
“…뭐?”
하면서도 어머니의 눈빛이 밝아졌다.
물론, 그간 이루 말할 수 없이 나아진 형편에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다녔었던 부모다.
한데 네 가족 모두 함께 여행을 간 적은 없었다. 부모는 임대 사업에 힘써야 했고, 동생은 학교를 다니고, 무엇보다 정우현이 이런저런 일로 바빴기 때문이다.
“으음.”
아버지 역시 표정이 상기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현아, 너도 알겠지만, 엄마랑 아빠는 건물 관리를 해야 해요. 유럽에 간다면 최소 일주일은 자리를 비워야 할 텐데, 둘 다 자리를 비운다면 어떡하겠냐.”
“하하, 아버지.”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괜찮아요. 저희 회사 직원 몇 분에게 잠깐 맡기죠.”
“…그래도 되니?”
“괜찮아요! 그만큼 수당을 더 챙겨 주면 되니까요! 하루에 한 100만 원 정도?”
하루에 100만 원이라는 말에 아버지가 조금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했다.
“…그래, 그럼 걱정 없겠구나. 대신 그 일당 100만 원은 우리가 내마. 엄마 아빠 건물을 관리하는데, 네가 왜 비용을 부담하니.”
“아아.”
이러나저러나 어머니는 벌써부터 기뻐서 탄성을 내뱉었다.
“아들 말 들으니 얼른 가고 싶네.”
하지만 동생이 곧장 말했다.
“…오빠, 나는 출근해야 해.”
“아니야, 다현아.”
“…응?”
“너, 근무 다음 달부터야. 한국지사 발령 내면서 내가 날짜를 그렇게 맞췄어.”
“아….”
동생이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놀라더니, 이내 말은 없이 몹시 기뻐했다.
이로써 온 가족이 모두 여행을 갈 수 있게 됐다.
이에 정우현 또한 밝은 표정으로 크게 외쳤다.
“그러니까 모두 가요, 유럽으로!”
* * *
며칠 후 정우현의 전용기에 모두 탑승하는 가족들.
그 뒤를 엄규환이 따르며 말한다.
“…또 유럽입니까?”
정우현의 생애 가운데 위험한 순간이 딱 두 번 있었는데, 그 모두 장소가 유럽이다. 바로 러시아 모스크바와 영국 런던이었다.
그래서 그는 벌써부터 긴장을 했다.
“하하, 괜찮아요, 실장님!”
“…으음.”
“뭐, 또 위험한 사람이 나타나면, 저랑 실장님이 다 혼내 주면 되죠!”
세계 최강 70억 분의 1의 사나이 정우현이니만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에요, 우현 님.”
순간 한 여자가 독일어로 말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애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이번 여행의 모든 사항을 완벽하게 짰으니까요.”
은발의 긴 머리카락을 한쪽 귀 옆으로 넘기며 말하는 여자는 우 재단의 관리자 엘라였다. 정우현의 가족 여행에 엘라 로렌츠 또한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