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브래드의 이름이 불리자 옆에 있던 감독 정우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순간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우현이 쪼그려 앉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브래드 앞에서.
한데 한순간 브래드의 몸이 붕 떴다.
“오오오!”
정우현이 그를 업었다. 즉 브래드는 졸지에 정우현의 등에 업히게 됐다.
“와아아아아!”
그래서,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는 소리를 질렀다.
“오우, 우!”
브래드 또한 정우현의 등에 업힌 채 크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냐!”
“하하하, 브래드.”
정우현이 브래드를 업은 채 성큼성큼 걸으며 답했다.
“주연상까지 받았는데, 이 정도 대접은 받아야죠!”
“우우우!”
브래드 퍼트와 정우현은 체격이 비슷했다.
키 180대 초반에, 몸무게는 70kg대다. 이처럼 둘 다 작은 체격이 아니기에, 한 명이 한 명을 온전히 업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정우현은 브래드를, 가볍게, 마치 깃털인 양 등에 업었다.
“뭐 하는 거냐! 내 발로 걸어갈 수 있다!”
브래드의 말에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브래드.”
그러고는 계속 무대 가까이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기억나세요? 20년 전, 이곳에서 제가 상을 받았을 때, 브래드가 어떻게 했는지.”
“….”
브래드가 그 순간을 곧바로 떠올렸다.
당시 그는 꼬마였던 정우현을 번쩍 들어 목말을 태우고서는, 소리를 지르며 단숨에 무대로 나갔다.
의도된 행위가 아니었다. 너무 좋아서,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한 일이었다.
정우현 또한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온갖 조명을 받으며, 브래드의 어깨 위에 올라 타, 무대 위로 나아갔던 그 순간을.
행복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자신이 정말 <인크레더블 킹 보이>의 소년 왕처럼, 고대의 한 제국의 왕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그가 브래드의 남우주연상 수상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자신에게 온갖 아름다운 추억을 안겨 준, 오랜 친구 브래드 퍼트니까.
그래서 업었다. 덩치는 자신과 비슷했지만, 가볍게 업었다.
정우현은 명실공히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사람이자, WFC 세계 통합 타이틀 챔피언을 단 12초 만에 K.O 시킨 70억 분의 1의 사나이다.
그런 그가 브래드를 가볍게 업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하하.”
정우현의 등에 업힌 브래드가 기뻐하며 웃었다.
20년 전 목말을 태웠던 아이에게, 지금은 자신이 업혀 있다.
그 세월이 오래된 만큼,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 * *
정우현이 무대 위로 올라가 한가운데 브래드를 내려 줬다.
이에 브래드가 조금 엉거주춤하다가는, 마이크 앞에서 복장을 정돈한 뒤 씨익 웃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 어떤 배우가.”
뜨거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감독에게 업힌 채 상을 받으러 나가겠습니까?”
“하하하하하하!”
브래드의 말에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물론, 뒤편에 서 있는 정우현도 웃었다.
그러고서 브래드는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미국 아카데믹 남우주연상 수상.
꿈에 그리던 상이다. 그 상을 정우현의 영화에 출연해 받을 수 있게 됐다.
“여러분.”
잠자코 있던 브래드가 한순간 목소리를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제가 20년 전, 이 자리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인크레더블 킹 보이>로 우리 정우현 감독이 신인상을 받았을 때, 그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라고 했죠? 모든 의미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거라고!”
브래드의 말과 함께 스크린에, 뒤편에 서 있는 정우현의 얼굴이 비쳤다.
“와아아아아아아!”
이미 여러 상을 받느라 수차례 무대 위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음에도, 그의 얼굴이 전면에 비치자 사람들이 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보십시오! 그날 이후 정우현 감독이 얼마나 놀라운 모습을 보였습니까? 학문이면 학문, 사업이면 사업, 그리고 재단에 다시 영화까지! 세상에 이런 사람 본 적 있습니까?”
하고서 정우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보물을 바라보는 듯 반짝거렸다.
“정우현 감독을 만났을 당시, 그때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아주 어렸어요. 정말 아시아의 한 소년이 인형 같은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났죠.”
그러고서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의 사람들을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스티븐 스틸버그 감독의 별장이었죠. 저는 일찌감치 도착해서 2층 발코니에서 경치를 즐기며 가볍게 술을 한잔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웬 소년이 스티븐의 영화에 출연한답시고 온다기에, 솔직히 큰 기대를 안 했습니다만, 그 순간. 그날 소년이었던 정우현 감독을 만난 그 순간이 제 삶을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네요.”
“….”
사람들이 조용히 브래드의 말을 경청했다.
“…남우주연상입니다.”
순간 브래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려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러고서 트로피를 든 손을 하늘 높이 올리고는 눈을 질끈 감고 감격에 복받친 듯 잠자코 있는 브래드였다.
천하의 브래드가 말을 잇지 못하고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모두 그를 바라봤다.
꿈꿨다. 오랫동안 꿈꿨다.
브래드는 이 순간을 정말 오랫동안 꿈꿨다.
솔직히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내로라하는 유명 배우들이 연기상 하나 받지 못하고 은퇴하는 일이 꽤 흔하니까.
한데 자신이 상을 받았다. 단순 대중들뿐만 아니라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단점부터 찾는 영화 전문가 등 모든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됐다.
이 모두, 정우현 덕분이었다.
“고맙다, 우!”
그가 다시 뒤로 돌고서는 정우현을 향해 말했다.
이에 정우현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짝. 짝.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순간은 브래드 퍼트를 위한 자리다.
정우현 또한 이 순간을 오랫동안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짝. 짝. 짝.
정우현의 박수에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따라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고서는 끝내 모두 일어나 손뼉을 쳤다.
짝짝짝!
가슴 벅찬 감동에, 브래드가 다시 눈을 감았다.
* * *
사실 정우현은 이번 영화 <바이 더 베테랑>의 촬영을 계획하면서 가장 큰 목표가, 바로 이 브래드의 연기상 수상이었다.
자신의 연출 실력은 한국에서 <격분>으로 이미 입증했다. 물론 감독으로서 할리우드 첫 진출작이라는 의미가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브래드의 수상 여부였다.
즉, 그는 어떻게든 브래드가 상을 받게끔 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실 시나리오도 브래드 중심으로, 그가 최대한 돋보이게 글을 썼다.
장르를 단순 액션으로 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받기 위해선, 인물의 극적인 변화가 잘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시종일관 강력한 모습을 보여 주는, 액션 영화의 히어로 같은 평면적인 인물로는 그런 상을 받기가 힘들다.
그래서 정우현은 상사 브래드를 이야기로써 한없이 무너지게 했다. 그러는 한편 서서히 다시 살아나게 했다.
애초 이렇게 드라마틱한 인물과 서사를 꾀했고, 남은 것은 물론 브래드의 몫이었다.
정우현의 계획대로 브래드가 자신이 만든 서사와 인물에 충실히 한다면, 연기상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하면 어렵다.
한데 다행히도, 그가 잘 해냈다. 당연히 모든 씬마다 감독 정우현이 적절히 연기 지도를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모두를 무리 없이 소화한 사람이 브래드였다.
그 결과가 이렇게, 값진 남우주연상으로 돌아왔다.
모두 정우현의 계획대로였다.
* * *
그리고 남은 최우수 작품상. 정우현이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무대 위로 올라갔다.
최우수 작품상 역시 <바이 더 베테랑>이 수상했기 때문이다.
브래드의 남우주연상 수상으로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뤘다고 생각한 정우현이,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소감을 말했다.
“또 한 번 감사합니다.”
하고서 평소와는 달리 조금은 무거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얘기를 할까 말까 고민했습니다만, 이렇게 좋은 기회를 한 번 더 주셨으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영화가 전쟁에 고통 받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의외의 소감에 사람들이 다시 한번 일어나 뜨겁게 손뼉을 쳤다.
<바이 더 베테랑>은 전쟁의 상흔에 신음하는 사람이 다시 삶을 향한 의지를 찾게 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는 영화 속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렇게 마지막 소감을 다했다.
영화제가 끝나고 열린 파티.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과 제작자 그리고 배우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있는 가운데, 그중 가장 큰 관심을 받은 사람은 물론 온갖 상을 차지한 정우현이었다.
온갖 유명 인사가 정우현과 대화를 하기 위해 끊임없이 옆으로 왔다.
이에 정우현도 계속해서 바뀌는 상대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는, 분위기가 무르익을 시점 슬쩍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 기쁜 마음을 아버지와 어머니,그리고 동생, 나아가 권유라와 구태호, 또 엘라와 일론 등 평소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
한데 누군가가 그를 뒤에서 불렀다.
브래드였다.
“예?”
“벌써 가는 거냐?”
“아, 좀 쉬고 싶네요, 하하.”
“촬영장에선 몇 날 며칠 카메라를 봐도 피곤해하지 않는 네가, 왜 이런 파티장에서 일찍 집에 가려고 해?”
“하하, 가끔은 쉬기도 해야죠.”
“그건 그렇지만….”
하고서 브래드가 아쉽다는 듯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왜, 재미가 없니?”
파티를 즐기던 브래드가 한순간 고개를 돌려 정우현을 찾다가는, 마침 그가 파티장에서 나가는 게 보여 급히 따라왔다.
“에이,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근데 왜?”
하고서 슬며시 말을 잇는 브래드다.
“…술을 안 먹어서 그래? 우, 네 주량은 또 천하무적이잖아!”
“하하하! 이젠 많이 안 먹으려고요!”
런던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스킨 헤드와 시비가 붙은 이래, 그는 다시는 술을 그리 많이 먹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래? 그거 아쉽구나. 모처럼 오늘 너랑 끝까지 한번 마셔 보려고 했는데.”
하는 브래드에게 정우현은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브래드 또한 남우주연상 수상자로서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이에 그 역시 가만히 있어도 온갖 사람들이 다가와 축하를 하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에게 중요한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오랜 친구이자, 자신을 이 자리에 있게 만든 감독 정우현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얼른 그를 따라 파티장 밖으로 나왔다.
“…우.”
브래드가 순간 진지한 표정으로 정우현을 불렀다.
“예.”
“다시 한번, 고맙다.”
“하하하, 브래드. 대체 저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하는 거예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결국 브래드가 연기를 잘해서 받은 상이잖아요!”
“…그래도, 너 없으면 받을 수 없는 상이었다.”
하고서 브래드가 재차 고마움을 표하더니 경탄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우. 너는 이로써 우리 미국 영화제에서 안 받은 상이 없구나.”
“아니요, 브래드.”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하나 있어요. 남우주연상.”
“아….”
브래드가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듯 소리를 냈다.
정우현이 <인크레더블 킹 보이>로 일찌감치 신인상을 받았고, 또 이번 영화로 워낙 많은 상을 받다 보니, 정작 그가 남우주연상을 받은 일이 없다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이런, 내가 먼저 받아서 어떡하지?”
브래드가 괜히 미안해하며 말했다.
“하하하하, 브래드! 당연히 브래드가 먼저 받아야죠! 저의 연기 대선배이신데!”
“…선배는 무슨. 그냥 너보다 일찍 태어나서 일찍 배우 생활을 시작한 거지.”
“하하하. 어쨌든.”
하고서 정우현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언젠간 받겠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계속 영화를 할 거니까요.”
“그럼, 그럼.”
브래드가 곧장 동의하고 나섰다.
“당연한 말이다. 그때가 언제냐의 문제일 뿐. 우, 네가 장차 남우주연상을 받게 되리란 건 내가 미래에도 멋진 것만큼이나 예정된 사실이지.”
“하하하! 이제야 좀 브래드답네요!”
정우현이 브래드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웃었다.
“궁금하구나, 네가 어떤 영화에 어떤 모습으로 출연해 주연상을 거머쥘지.”
“예, 저도 궁금하네요, 브래드. 앞날은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요!”
하고서 정우현이 브래드와 몇 마디를 더 하고는 금세 또 만날 것을 약속한 뒤 작별을 했다.
이로써 그는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공식적으로 최고의 감독 반열에 오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