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계속 이어지는 <바이 더 베테랑> 촬영.
비가 온 다음 날. 브래드가 여전히 납작한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신다.
한데 평소와는 모습이 조금 다르다.
반쯤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멍하니 전방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있던 어제까지와 달리, 한곳을 때때로 바라보고 있다.
바로 울타리 문이다. 소녀 링이 서 있던 울타리 문.
링이 없다. 며칠 전 브래드의 눈앞에 나타난 이래, 오늘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아이.
아무렇지 않은 듯 술을 마시면서도, 아이의 부재가 계속 신경이 쓰이는 브래드.
급기야 술을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울타리 문까지 몇 발자국 걸어간다.
문밖 주위를 둘러보는 브래드. 하지만 역시 링은 없다.
브래드가 그대로 뒤로 돌아, 다시 마당 한가운데 의자로 와 철퍼덕 앉는다.
그리고 다시 술을 마시는 브래드.
다음 날. 그가 같은 곳, 같은 자세로 술을 마시고 있다.
한데 어느 순간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아주아주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는 브래드.
링이 나타났다.
어제는 없었던 링이, 오늘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링이 인사한다.
“…안녕.”
그러자 브래드도 인사를 받는다. 실상 링의 인사에 답인사하는 건 처음이다.
“….”
그런데 링이 평소와 달리 어딘가 좀 울적해 보인다.
또한 평소였다면 브래드의 답인사에 신이 나서 이런저런 말을 했을 아이가, 가만히 있는 것도 조금 이상하다.
브래드가 그런 아이에게 말을 걸까 고심하다가는 단념하고 그저 술을 마신다.
그러자 아이가 한순간 몸을 돌리며 말한다.
“오늘은 이만 갈게요.”
“….”
“아저씨, 잘 있는지, 보러 왔어요.”
“무슨 일.”
이에 브래드가 얼른 말한다.
“있니?”
브래드의 말에 아이가 다시 뒤로 돈다.
“아빠가… 아파요.”
“….”
“어제 밖에서 넘어지셨어요. 다리가 새파랗게 멍이 들었어요.”
이제야 브래드는 아이가 어제 왜 자신의 집 앞에 오지 않았는지 알게 된다.
“…병원은.”
브래드가 조금은 어색해하며 말을 잇는다.
“가 봤니?”
“안 가도 된대요… 어차피 나을 거라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답하는 링.
“기다려 봐라.”
브래드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비가 오든 햇볕이 내리쬐든 맨날 앉아서 술만 마시던 브래드가 자발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기다려.”
하고는 집으로 들어가는 브래드.
이윽고 다시 마당으로 나오는 그의 손엔 오랜 군용 구급함이 들려있다.
링이 보는 곳에서 구급함을 열고는 붕대와 연고를 꺼내 사용법을 가르치는 브래드.
이내 그것들을 아이에게 건넨다.
“…감사합니다.”
놀란 눈을 하고 말하는 링.
이에 브래드가 답한다.
“그래도 가능하면 병원에 가 봐야 한다. 이렇게 임시로 치료하는 것과 의사가 보는 것은 확연히 다르지.”
그러자 소녀가 살포시 웃는다.
“왜 웃어.”
브래드의 말에 머뭇거리다가 말을 하는 링.
“아뇨, 맨날 여기서 술만 드시는 아저씨가,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하는 게 조금 이상해서요.”
“음….”
“하여간, 감사합니다.”
하고 링이 다시 인사를 한다.
그리고 사라지는 소녀를 바라보는 브래드.
다시 납작한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신다.
“오케이, 컷!”
정우현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크게 외쳤다.
“자, 순조로워요.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합시다!”
그러자 스태프들이 크게 답했다.
“예에에!”
* * *
하지만 이내 문제가 생겼다.
영화 내적인 일은 아니었다.
촬영은 했다 하면 정우현의 연출 아래 완벽한 씬이 나오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촬영 외부에 있었다.
아역 배우 링이 아팠다.
처음엔 미열이 있어 단순 감기인 줄 알았다.
한데 곧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수두였다. 즉 링은 헤르페스 바이러스 3형인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Varicella-Zoster Virus)에 감염되었다.
“촬영을 일단 중단해야겠군.”
우 엔터테인먼트 지사 할리우드 지사 회장실.
브래드가 정우현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죠.”
“너무 무리했나?”
정우현은 촬영의 모든 일정을 아역 배우인 링을 중심으로 진행했다.
링이 컨디션이 괜찮으면 촬영을 이어 나가고, 피곤해하면 예정된 일정을 쉬기도 하는 등 각별히 아이에게 신경을 썼다.
그만큼 제작비가 늘기는 했지만, 정우현의 자금력이 엄청났기에 별일은 아니었다.
돈보다는 작품의 완성도가 중요한 정우현이었다.
“일주일을 쉴 때도 있었는데, 음….”
브래드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아이의 상태가 제일 중요하죠. 일단, 건강히 나아야 합니다.”
“물론 큰 걱정은 않는다, 우. 수두니까. 너도 걸려 봤지, 수두?”
하고 묻는 브래드에게 정우현이 답했다.
“아니요.”
“…아니라고?”
그러고서는 브래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 대단하군! 나 때는 거의 모든 아이가 걸렸었다고! 하여간 걱정 마라, 우. 빠르면 1주, 늦어도 3주 안에는 자연 치료되어서 돌아올 거다. 수두는 그런 병이지.”
어릴 적 수두를 앓았던 경험을 떠올리며 브래드가 말을 이었다.
그러더니 뒤늦게 무언가 생각난 듯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정우현을 바라봤다.
“…우.”
“예?”
“그럼, 넌 수두를 한 번도 안 앓았다는 거지?”
“그렇죠.”
“…그럼 전염된 거 아니야?”
“….”
“그럴 수도 있잖아. 너나 나나 링이랑 계속 붙어 있었다고. 물론 나야 예전에 걸려서 큰 상관 없겠지만, 넌 얘기가 다르다는 말이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바이러스 보균자가 아닌 정우현이 링에게 새롭게 전염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얼른, 얼른 병원에 가서 검사해 봐. 배우는 그렇다 쳐도, 감독인 네가 병에 걸리면 안 되지!”
정우현이 잠깐 생각하더니 답했다.
“알겠습니다.”
* * *
곧장 병원에 가서 바이러스 검사를 받은 정우현.
깨끗했다. 음성이었다.
실상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이래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는 정우현이다.
사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의 몸은 모든 바이러스에 면역이 있었다.
에이즈, 에볼라, 헤르페스 등 생물계에 있는 모든 바이러스와 외부 물질에 면역이 있었다.
어쨌거나 정우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렇다면 링이 얼른 낫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생각했다. 어릴 적 공부한 내용에 따르면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여느 바이러스처럼 완전한 치료가 불가능하다. 현대 의학으로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유전자를 정상화하고, 나아가 바이러스만을 모두 없애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에 이르자 한 명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한국대학교 약학과 학부생, 동생 정다현이었다.
“응, 오빠?”
동생은 물론 대학에서도 모범생으로서 수년째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정우현이 잠깐 안부 인사를 하고서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현아. 수두 바이러스 말이야.”
“…헤르페스 3형?”
“응, 그거. 혹시 치료제 나왔어?”
“있잖아, 항바이러스 의약품들. 먹는 것도 있고 바르는 것도 있고.”
“아니, 그런 거 말고.”
“…그럼 뭐?”
“내 말은 보균자에게서 바이러스를 완전히 없애는 약이나 치료법 같은 게 나왔냐는 거지.”
어릴 적 자신이 공부할 때 그런 치료법은 없었다.
한데 그 후로 약에 관해 따로 학습하지 않았으니, 그동안 혹시 모를 치료법이 개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빠.”
동생이 당황스럽다는 듯 말했다.
“응?”
“그런 게 있었으면… 이미 난리가 났었겠지. 엄청난 일인데.”
“…역시 그렇구나.”
“응, 단순 세균이 아니라 바이러스잖아. 안 사라진다고. 한 번 걸리면 그냥 평생 보균자로 사는 거야. 수두에 한 번 걸린 사람이 면역력이 떨어지면, 바이러스로 인해 대상포진이 발병하는 것처럼.”
“그래, 알았다.”
“근데 왜?”
하고서 이것저것 묻는 동생에게 정우현은 그저 별일이 아니라고만 짧게 답했다.
“영화 촬영은 잘되고 있어?”
“아, 뭐, 잘되고 있지, 하하.”
“이번에도 사람 엄청 죽이고, 그런 영화야?”
정우현의 연출 데뷔작 <격분>을 언급하는 동생이다.
동생은 당시 오빠의 영화를 보고 재미는 있지만, 너무 폭력적이고 잔혹하다고 말했다.
국제 납치 범죄 조직원들이 말단부터 우두머리까지 김도진 앞에서 한 명 한 명 모두 목숨을 잃으니까.
“아, 그런 씬이 없지는 않은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영화는 아니야.”
“…그렇구나.”
하고서 동생이 말을 이었다.
“나는 오빠가.”
“응.”
“사람을 살리는 영화를 만들면 좋겠어.”
“…하하.”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좋은 약 같은 영화.”
동생다운 말이었다.
“그래, 다현아, 나도 그런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
하고 정우현이 몇 마디를 더 하다가는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 * *
링이 돌아왔다.
“죄송해요.”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로 미안하다고 하는 아이다.
“아니, 뭐가 미안해, 링아. 사람은 누구나 아플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네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준 것만으로 참 기쁘고 감사해.”
하고 말하는 감독 정우현 옆에서 브래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아저씨도 어렸을 때 앓았었다고, 수두!”
그러고서는 소매를 걷어 왼팔 안쪽을 링에게 보여 주기까지 했다.
“여기 자국 보이지? 이거 곰보다, 곰보! 수두 앓고서 생겼던 흉터!”
“아….”
“요즘은 뭐 피부약이 잘 나와서 이런 것도 없겠지. 하여간, 링! 더 쉬지 않아도 되는 거냐?”
“예, 괜찮아요.”
하고 말하는 링의 눈높이에 맞춰 정우현이 쪼그려 앉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링, 저번에도 말했지만, 피곤하거나 하기 싫어지면 언제든 쉬어도 된다. 나는 이 영화를 1년이 아니라 10년, 아니 100년 동안 찍을 수 있어. 그럴 여유와 힘이 있거든.”
“하하하.”
정우현의 말에 재밌다는 듯 링이 웃었다.
“100년이면 감독님도 그렇고 저도, 이 세상에 없을 텐데요?”
“으음, 그런가?”
하고 정우현이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의 영화 <바이 더 베테랑>이 100년은 물론 1,000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거란 건 확실하지.”
“아아.”
링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영화는 그런 거란다. 1,000년이 지나도 영화 속 링은 여전히 6살짜리 링으로 살아 있는 거야.”
“….”
정우현의 말에 링이 이런저런 상상에 빠진 듯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무리해서 급히 영화를 찍을 필요는 절대 없단다. 길이길이 남을 만큼, 한 편을, 제대로 찍는 게 중요하지.”
하고 말하는 정우현에게 링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
“응?”
“바로 촬영할게요. 감독님 말씀을 들으니, 더 열심히, 더 잘하고 싶어졌어요.”
* * *
그러는 한편 정우현은 새 사업에 착수했다.
사실 사업이라기보다는 연구 과정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했다.
바로 제약 회사였다. 우후 제약 회사를 설립해, 바이러스 치료에 뛰어들기로 했다.
일차적인 목표는 링이 앓았었던 수두 대상 포진 즉 헤르페스 3형 바이러스의 완전한 치료였다.
이를 위해 정우현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바이러스 학자 등을 모집했다.
거기에 첨단 시설 등도 도입했다.
그러는 한편 정우현도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수학과 자동차 공학 이후 이렇게나 제대로 된 공부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영화 촬영을 하고 있어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집중했다.
그렇게 해서 설립된 우후 제약 회사.
정우현 회장이 연구원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사람들은 그룹의 회장이자 세계적 유명 인사인 정우현을 우러러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여러분은 인류사에 한 획을 긋기 위해 이곳에 모이게 됐습니다.”
하고서 정우현이 그들을 뜻깊은 눈으로 둘러보고 힘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바이러스. 우리는 함께 지구상의 모든 바이러스를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