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해가 바뀌어 2017년.
정우현이 미국 할리우드에서 <바이 더 베테랑>을 촬영하고 있는 시점.
한국에선 큰일이 벌어졌다.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탄핵을 당해 파면되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퇴진했다.
그러면서 새롭게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됐는데, 일각에서는 색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40세 미만도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현직 대통령의 탄핵부터 파면, 그리고 새로운 선거까지 모두 예정되지 않은 일이라 워낙 갑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물론, 국회 또한 헌법까지 개정할 여력이 없었다.
다만 새롭게 당선된 대통령이 구두로 약속했다.
자신의 임기 내에 헌법을 꼭 개정하겠노라고.
한편 명시적으로 담론화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대통령 자격 제한 나이를 왜 없애려고 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정우현 때문이었다. 모두 정우현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다.
워낙 어릴 때부터 미디어에 모습을 드러낸 정우현은 국민에게 일단 무척 친근했고, 또한 각종 위대한 업적과 사업 현황에 놀라움과 기대감 그리고 존경심을 안겨 줬다.
나아가 미성년일 때부터 간간이 베풀던 선행을 성인이 되면서 재단을 출범하며 본격적으로 하게 됐는데, 이 점이 특히 국민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의도야 어쨌든 선행이라는 과정과 결과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으니까.
정우현의 우 재단은 세계 최대의 비영리재단이었다. 국가도 아니고 한 사람이 의장이 되어 이토록 큰 재단을 이끄는 사례는 지구상에 없었다. 규모로 따지면 국가 조직이 국제 사회 차원에서 협력하며 세계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국제기구 그 이상이었다.
이에 대한민국 국민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비록 대한민국은 작은 나라지만, 한국인이 이끄는 재단이 세계 그 어떤 기구보다 크고 또한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 나아가 그 재단을 이끄는 사람이 엄청난 천재인 데다 각종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하며 심지어 유명 배우이자 감독이다. 즉 똑똑하고 잘생겼으며, 이미지가 좋다.
일각에서는 이런데도 국민들이 정우현을 가만히 둔다면, 대한민국은 영원토록 약소국으로 남을 만하다고 쓴소리를 할 정도였다.
이에 그들은 어떻게든 정우현을 정치권으로 이끌어 내, 대한민국이라는 함선의 키를 그의 손에 쥐여 주고 싶었다. 그가 재단과 사업을 완벽하게 지휘하듯 국가도 지휘하길 바랐다.
이것이 국민의 마음이었고, 그러기까지 헌법 개정이라는 법률적,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절차가 필요할 뿐이었다.
* * *
“컷, 오케이!”
할리우드의 촬영장.
정우현은 변함없이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다.
이곳 캘리포니아에선 머나먼 땅인, 자신의 고국 대한민국에서 일단의 일로 이른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됐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정우현에게는 자신의 영화를 찍는 게 현재로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으음.”
브래드가 감정을 잡으며 감독 정우현에게 말했다.
“영화가, 이제 제대로 시작이구나.”
“하하, 맞아요, 브래드.”
정우현이 답했다.
“우리 영화의 제목은 <바이 더 베테랑>. 즉 퇴역 군인의 이야기죠. 브래드는 이제 퇴역했으니까, 제대로 된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안녕하세요!”
그때 뒤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왔구나.”
소녀 링이었다. 링이 이제 처음으로 자기가 등장하는 씬에서의 연기를 준비하기 위해 촬영장에 왔다.
“잘 지냈니?”
“예! 언제 감독님을 다시 보고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을까, 오래 기다렸어요!”
“하하하, 그래, 그래.”
하고 정우현이 몸을 돌려 브래드와 링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 링. 저번 배우 모임 때 봤겠지만, 브래드 아저씨다. 오늘부터 제대로 같이 연기를 하게 될 거야.”
“…안녕하세요.”
링이 정우현을 대할 때와는 달리 조금은 긴장하며 말했다.
브래드에게서 중년 특유의 무게감과 세월의 깊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퇴역 군인이라는 극 중 캐릭터에 걸맞게 분장을 해서 아이가 보기엔 다소 무서워 보일 만했다.
정우현이 어렸을 때 <인크레더블 킹 보이>로 브래드를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땐 브래드도 쾌활한 청년의 느낌이 사뭇 났다.
“안녕.”
하지만 브래드가 씨익 웃어 보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오우, 너처럼 귀여운 아이는 거의 20년 만에 처음 보는구나.”
그러자 링이 살며시 웃으며 천천히 답했다.
“…정말요?”
“그래! 20년 전, <인크레더블 킹 보이>로 여기 있는 정우현 감독을 본 이래 처음이라는 거다!”
“와아.”
링이 입을 크게 벌리고 정우현을 보고 말했다.
“저도 봤어요, <인크레더블 킹 보이>! 진짜, 무지, 엄청 재밌게 봤어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어요!”
“하하하하.”
링의 말에 정우현과 브래드가 크게 웃었다.
그러고서는 정우현이 말했다.
“그래, 링. 브래드 아저씨가 우리 링 귀엽다고 칭찬하니까, 아저씨 말 잘 듣고 연기도 잘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내가 저번에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하라고 했지?”
“맘껏 놀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또?”
“싫증 나면 그만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래, 링. 오늘이 첫날이다. 재밌게 놀아 보자고.”
“네에!”
이것으로 감독 정우현과 배우 브래드 그리고 링이 촬영 준비를 마쳤다.
* * *
“레디, 액션!”
정우현의 외침에 카메라가 돌아간다.
대낮, 애리조나주의 한 시골. 작은 안마당이 있는 허름한 집. 삐죽빼죽 낡은 울타리 안, 브래드가 볼품없는 옷차림으로 납작한 철제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딱히 하는 건 없다. 그저 가만히 앉아 술을 마시며 밖을 바라본다. 반쯤 풀려 있는 동공. 술을 마시기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팔.
술이라도 마시지 않았다면 흡사 시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그러다가 취기가 잔뜩 올라 졸음이 쏟아지면 허름한 집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자 버린다.
그리고 잠이 깨면 다시 마당으로 나와 납작한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신다. 역시 또 반쯤 풀려 있는 동공을 하고 기계적으로 팔을 움직이며.
며칠 뒤, 여전히 같은 자세로 같은 곳에서 술을 마시는 브래드. 한데 그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링이다. 아직 학교에도 입학하지 않은 어린 링이, 브래드의 집 낡은 울타리 밖 문에 잠자코 서 있다.
“….”
하지만 말이 없다, 브래드도 그리고 링도.
브래드는 여전히 술만 마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는 링. 그러기를 한참 어딘가로 사라진다.
다음 날, 역시 같은 곳에서 같은 자세로 술을 마시는 브래드.
문 앞에는 또 링이 서 있다. 링이 여전히 술만 마시는 브래드를 빤히 본다.
그러다가는 드디어 입을 연다.
“…안녕하세요.”
“….”
하지만 브래드는 말이 없다.
“안녕하세요.”
링이 다시 말한다. 그렇지만 브래드는 또 말이 없다. 잠자코 술만 마신다.
이에 링이 브래드의 눈치를 보더니 용기를 내어 다시 입을 연다.
“…혹시, 말을 못 하시는 건가요? 그… 벙아리(damb)이신가요?”
“벙어리(dumb).”
순간 브래드가 입을 열었다. 이 집에서 살게 된 이래 처음으로 한 말이다.
“벙어리다. 벙아리가 아니라.”
“아….”
하고 잠자코 있는 링.
그러다가 재차 말을 한다.
“죄송해요, 벙어리인 줄 알았어요. 말을 안 하셔서.”
“….”
“전에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벙어리는 말만 못 할 뿐 남들보다 더 잘 들을 수 있고….”
하는데 브래드가 불쑥 말했다.
“가라.”
“….”
“가라, 나는 혼자 있고 싶다.”
그리고 다시 술을 마신다.
링이 가만히 있다가 인사를 하고서는 뒤로 돈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다음 날도, 모레도, 글피에도, 그글피에도 계속 울타리 문 앞에 서 있는 링.
여전히 둘은 말을 않고, 브래드는 술만 마신다.
정확히 하면 링은 말을 하고 싶은 눈치이나 브래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또 다음 날.
비가 내린다.
그럼에도 브래드는 같은 곳에서 같은 자세로 술을 마시고 있다. 그러니까, 비를 맞는 채.
한편 울타리 문에 링이 역시 서 있다. 하지만 노란 우산을 쓰고 있어 비는 맞지 않는다.
“….”
가만히 비를 맞으며 술을 마시고 있는 브래드를 보는 링.
끼익.
그러다가는 한순간 울타리 문을 열고 작은 안마당 안으로 발을 들인다.
며칠을 잠자코 내내 문밖에 서 있던 링의 첫걸음이다.
“….”
그럼에도 가만히 있는 브래드.
투둑투둑.
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찰박 찰박.
그 와중 링이 몇 발자국 걸어 브래드에게로 다가온다.
그러고는 비를 맞고 있는 브래드를 위해 우산을 씌워 준다.
“….”
그럼에도 역시 잠자코 있는 브래드. 그러다가는 한순간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본다.
링이 들고 있는 노란 우산이 비를 막고 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려 전방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는 브래드.
시간이 지나 비가 멈춘다.
날이 밝아지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
그때야 링은 우산을 접으며 빗물을 털어 낸다.
그러고서 브래드에게 한마디 한다.
“비 맞으면 안 돼요, 감기 걸려요.”
“…걸리라지.”
브래드가 짧게 답한다.
“감기 걸리면 아파요.”
“아프라지.”
“아프면 괴로워요.”
그러고서 소녀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짧게 말을 이었다.
“…괴로우면 죽을 수도 있다고요.”
그러자 처음으로 브래드가 고개를 돌려 링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반쯤 풀린 동공에 모처럼 힘이 실려 있다.
“너.”
“예.”
“죽음이 뭔지 아냐.”
“….”
대답을 않는 링.
그러고는 다시 몇 발자국 걸어 울타리 밖으로 나가며 한마디 한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길을 나서는데 뒤에서 뜻밖의 소리가 들린다.
“고맙다.”
브래드다.
며칠간 잠자코 있던 브래드가 드디어 처음으로 진심을 표했다.
“고맙다, 오늘.”
이에 링이 뒤로 돌아 말은 없이 고갯짓으로 인사를 한 뒤 다시 갈 길을 간다.
“오케이, 컷!”
정우현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만족스러웠다. 브래드와 소녀 링이, 시나리오를 정확히 이해하고 알맞은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브래드는 역시 세계 최고의 스타답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고, 링은 링대로 뛰어난 아역 배우답게 어린 나이임에도 깊고 진실한 감정을 드러낼 줄 알았다.
“하하하, 아주 좋은 영화가 탄생할 것 같습니다.”
정우현이 다시 웃으며 배우는 물론 스태프들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얘기했다.
“우.”
이에 브래드가 답했다.
“네가 다 좋은 얘기를 써서 그런 것 아니겠냐.”
하고는 카메라를 보고 말을 이었다.
“또 거기에 연출까지.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포인트를 잡아 주니 나로서는 훨씬 편하게 연기하게 된다.”
“맞아요!”
링도 브래드를 거들고 나왔다.
“집에서 엄마 아빠랑 대본 리딩할 때는 알 수 없었던 것을, 감독님과 함께할 때는 훨씬 쉽게 캐치할 수 있어요!”
그러고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역시 카메라를 보고 힘차게 얘기했다.
“감독님!”
“응?”
“감독님이 그러셨죠? 카메라 앞에서 놀라고. 그것도 맘껏.”
“그렇지.”
“지금이, 지금이 딱 그때예요! 엄청 재밌어요! 카메라 앞에 있는 게.”
“하하하, 잘됐구나.”
“절대 질리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떡하죠? 얼른 또 다음 씬을 찍고 싶어요!”
“그럼 또 찍어야지!”
하고 정우현이 스태프들에게 촬영 준비를 알렸다.
아역 배우는 다루기가 쉽지 않다. 나이가 어린 만큼, 아역 배우의 컨디션을 따라 촬영장의 분위기 또한 오르고 내린다.
그런데 소녀 링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이다. 나아가 실제로 아이가 보여 준 연기는, 진정 뛰어났다.
“자, 자, 또 찍읍시다, 또 찍어요!”
하고 정우현이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영화를 만드는 일. 이보다 즐거운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자 한껏 독려하고서 또 외쳤다.
“좋습니다, 좋아. 자, 그럼… 레디, 액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