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정우현이 건넨 종이는 바로, 브래드와 찍을 새 영화의 시나리오였다.
“영화. 이제 또 제대로 된 영화를 한 편 만들어야죠.”
하고 정우현이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오!”
이에 브래드가 탄성을 내뱉고는 기대감이 가득 찬 눈으로 시나리오를 빠르게 살폈다.
“장르가 액션인 듯하더니 드라마구나.”
초반 몇 씬을 읽자마자 그가 말했다.
“예. 근데 종반에 또 액션을 추가할까 생각 중이에요.”
“으음….”
하고 소리를 내며 계속 시나리오를 훑어보는 브래드다.
그러더니 한순간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오오.”
심지어 탄성을 내뱉기까지 했다.
그리고 종반에 이르러서는 감격하고 만족스러운 듯 정우현을 보고 씨익 웃었다.
“어때요?”
정우현이 물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좋다, 아주, 좋아.”
하고서 브래드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아주 좋아할 것 같다.”
“그래요?”
“그럼. 남녀노소 다 좋아할 이야기야. 액션 등 규모가 큰 씬은 초반에 아주 잠깐뿐이지만, 이런 시나리오야말로 우리의 삶에 직접 와닿는, 그런 리얼한 이야기지.”
“아, 정말요? 다행이네요. 대략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잘 전달된 것 같아요!”
“잘 전달된 것뿐만이겠니. 생생해. 아주, 생생해. 인물들이 다 살아 있어. 빨리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다.”
“하하하, 좋네요, 브래드.”
그러고서 정우현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브래드. 잘할 수 있겠죠?”
“당연하지.”
하고는 브래드가 자신 있게 답했다.
"우. 내가 누구냐. 나, 브래드다. 브래드 퍼트."
"하하, 그렇죠. 세계 최고의 스타, 브래드!"
브래드가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내가 너만 하겠니. 그나저나 우."
“예?”
“캐스팅은 다 된 거니? 그러니까 이 소녀라든가, 아이의 아버지 그리고 부하 군인이라든가.”
“아, 아이만 뽑으면 될 것 같아요. 나머지는 준비됐고요.”
“…오, 그래?”
하고서 둘은 계속 영화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 * *
그리고 캐스팅한 소녀는 링이라는 중국계 6살짜리 아이였다. 아시아계임에도, 아이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연기력이 뛰어나고 촉망받는 아역 배우 중 하나였다.
“…안녕하세요!”
아이가 감독 정우현을 처음 보는 자리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하하, 안녕.”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그래.”
귀여웠다.
정우현과는 국적이 다르지만, 영화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른 나이에 카메라 앞에 선 아이.
이는 과거 <겨울 방학>과 <인크레더블 킹 보이>를 찍을 때 자신의 모습 같기도 했다. 더군다나 할리우드 촬영장에 나타난 아시아계 아역 배우라는 것에서 더 그랬다.
정우현은 아이를 보며, 과거의 어렸던 자신을 사람들이 어떻게 봤을까 뒤늦게 생각했다.
귀엽고 기특하기만 했을까. 한편으로는 조금 안쓰러워 보일 수도 있었다. 한창 뛰어놀 어린 나이에, 철두철미한 어른들의 세계에 진입했으니까.
이제야 아버지를 포함해 스티븐 감독 등 많은 어른이 왜 그토록 자신에게 걱정 어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어른들의 우려를 뒤로하고, 다행히 잘 성장했다.
심지어 배우를 넘어 감독이 되어, 이제 어른의 모습으로 다른 아역 배우 앞에 서 있다.
그런 그가 소녀 링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꼬마야.”
“예?”
“너는 지금 일하러 온 게 아니다.”
“….”
“놀러 온 거다.”
하고서는 옆에 있는 카메라를 보고 말을 이었다.
“카메라 앞에서 맘껏 놀러 온 거다. 그러니까 놀다가 언제든 싫증이 나면,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아이는 정우현의 말에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뒤에는 아이의 부모가 조금 떨어져 서 있었는데, 그들 또한 감독인 정우현의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을 했다.
“정말이다. 이름이 링이라고?”
“예.”
“링은 착한 아이지, 그렇지?”
“…예!”
“그래, 착한 아이는 언제 어디서든 맘껏 놀아도 된다. 그러니까 카메라 앞에 있는 게 재미가 없어지면 언제든 촬영을 중단하고 쉬렴. 알겠지?”
“…알겠습니다!”
링은 정우현의 말에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답했다. 뒤에 있는 링의 부모도, 정우현이 어떤 남다른 뜻 없이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한 말임을 이해하고서는 마음이 놓인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정우현은 이번 영화를 계획하며, 일정을 여유 있게 잡았다.
모두 소녀가 나오는 씬 때문이었다.
성인 배우를 다루듯, 아이를 몰아세우며 촬영을 빨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컨디션이 따라 주는 대로 천천히 여유롭게 촬영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만큼 제작비는 증가한다.
촬영 일정이 하루라도 더 늘거나, 연기라도 된다면 그만큼 인력과 장비 면에서 비용이 더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번 영화도 우후 엔터테인먼트의 자본력으로 촬영한다.
즉, 남의 돈을 받아 찍는 영화가 아니다.
그래서 시간과 자본에 여유가 있었고, 정우현은 그 여유를 오로지 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쓰기로 했다.
“링.”
정우현이 다시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예.”
“너의 꿈은 뭐지?”
“…세계 최고의… 아역 배우입니다!”
하는 소녀의 모습에 정우현이 기특함을 느끼고는 홀로 슬며시 웃었다.
“하하, 그래. 링, 너는 꿈을 위해 여기 와 있고, 이제 그 꿈을 위해 걸음마를 떼게 됐다. 그러니까 내가 이제 감독으로서 부탁한다.”
“….”
“꼬마야, 네가 쉬고 싶을 때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카메라 앞에서 맘껏 놀고 싶을 때면, 제대로 놀아 주길 바란다. 링은 아직 어리지만, 네 안에 잠재된 무언가는 세상 그 누구보다 클 수 있다는 걸 카메라 앞에서 보여 주는 거야. 어때, 재밌겠지?”
하는 정우현의 물음에 링이 짧고 크게 답했다.
“…예!”
“그래, 그렇게 링은 세계 최고의 아역 배우가 되는 거야.”
그러고서 정우현이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이에 아이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눈빛을 반짝였다.
그러더니 크게 말했다.
“감독님의 데뷔작 <겨울 방학> 엄청 감명 깊게 봤어요…!”
“오오.”
의외의 말에 정우현이 놀랐다.
<겨울 방학>은 벌써 약 20년 전의 한국 영화이기에 6살짜리 아이가, 그것도 미국 국적의 소녀가 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걸 봤니?”
“예! 부모님이 보여 주셨어요!”
하고서 링은 뒤로 돌아,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서 있는 부모와 시선을 맞췄다.
링의 부모는 자식이 배우라는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전력투구하고 있었는데, 그 일환으로 정우현이 열연한 <겨울 방학>을 일찌감치 딸에게 보여 줬다.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아역이 빛을 발한 영화는 모두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구나.”
하고 정우현 또한 링의 부모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답했다.
“예! 제가 본 영화에서 나온 아이 중에 가장 실력이 좋았어요! 진짜 옆집에 사는 아이 같았어요!”
“하하하하, 그래, 그래, 고맙다.”
“저도 감독님처럼!”
링이 크게 말했다.
“멋진 연기를 하고 싶어요! 그게 제 꿈입니다!”
정우현이 아이의 말에 지그시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렇게 될 거다.”
* * *
그리고 시작된 영화 <바이 더 베테랑(By The Veteran)>의 촬영.
제목은 정우현이 지었다. 극 중 주인공 브래드가 퇴역 군인 역할이기에 이렇게 붙였다.
초반 씬의 무대는 중동의 한 산악이다.
실상 영화의 제작비 상당수가 이 초반 씬에 할당됐다.
브래드의 현역 군인 시절 거대한 전투 씬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하, 긴장되는군.”
전투복 차림의 브래드가 촬영 준비차 전투모를 쓰며 말했다.
“에이, 연기 베테랑 브래드가 무슨 긴장을 해요.”
하고 정우현이 말했다.
한데 정우현이 감독의 자리에 있지 않고, 카메라 앞 브래드 옆에서 말했다.
그러자 브래드가 곧장 답했다.
“그냥 연기가 아니라 너와의 연기니까 그렇지! <인크레더블 킹 보이> 이후 약 20년 만에 아니냐!”
“하하하, 그건 그렇네요!”
하고 역시 전투복 차림의 정우현이 말했다.
정우현은 이번 영화에서, 출연도 한다.
즉, 감독뿐만 아니라 배우로서도 활동한다.
<격분> 때는 첫 연출작이니만큼 오로지 감독 역할에만 전념하며 많은 것을 스스로 깨닫고 성장했다.
그래서 이제는 출연도 할 여유가 좀 생겼다. 그래서 이번 작 <바이 더 베테랑>에서는 첫 씬부터 브래드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하여간 잘해 보자고, 우!”
“예!”
영화 속 소년 왕 정우현과 고고학자 브래드가 시간이 흘러, 중동에 파견된 미 해병 소속 일병과 상사의 모습으로 함께하게 됐다.
감독인 정우현 대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연출 스태프가 레디 액션을 외치고, 이에 따라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내 정우현이 연기를 한다.
대낮 협곡에 숨어 망원경으로 전방을 바라보는 정우현.
그러다가는 옆에 있는 상사 브래드에게 말을 걸었다.
“대체 왜 항복을 안 하는 걸까요? 상사님.”
“시발 거. 저 새끼들이 항복이란 걸 하겠나, 일병.”
“….”
“쟤네들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야. 종교적인 신념으로 뭉친 무장 단체지.”
“아하.”
“그러니까 항복을 안 하지. 너, 신을 믿나?”
“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아, 하하. 그렇네요. 아니요, 안 믿습니다.”
“시발 거. 그러니까 네 인생이 이따구인 거야. 이런 병신 같은 곳에 와서 병신 같은 놈들이랑 싸우느라 병신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지.”
“…그건 상사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런 시발 거. 내 말에 토 달지 말고.”
“아, 네.”
“하여간 신을 믿는데 항복을 한다면, 신을 부정하는 셈인 거지. 자신의 신을 부정하느니, 그냥 죽어 버리는 게 훨씬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저 족속들이다.”
“으음… 그렇군요.”
하고서 정우현이 브래드를 슬며시 보고 말을 이었다.
“와, 근데 상사님 대단한데요. 맨날 욕만 해 대서 이런 건 잘 모를 줄 알았는데.”
“시발 거. 여기에 온다는 놈이 어떻게, 적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오냐.”
“아, 하하. 그냥 나쁜 놈들인 줄만 알고 왔죠.”
“홀리 쉿.”
브래드의 말을 끝으로, 잠시간 대화가 멈췄다.
그러고서는 정우현이 망원경을 통해 다시 한번 적진을 살핀다.
고요하다. 어떤 움직임도 없다.
“긴장되지만, 한편으로는 지루하군요.”
“조심해라, 그러다 훅 날라 온다.”
“와, 상사님. 근데 저번 전투 진짜 멋졌어요. 혼자 8명을 죽이고, 또 아군은 3명이나 살리셨죠?”
“….”
“어떻게 그러시는 겁니까? 그것도 저번 한 번뿐이 아니잖아요? 지지난번도 그랬고, 또 지지지난번에도 그랬고 또 지지지지난번에도… 진짜 상사님은 영웅이십니다. 전쟁이 끝나면, 상사님은 무조건 최고 훈장을 받으실 거예요.”
“시발 거. 말 존나게 많네.”
“아, 하하….”
“그나저나 너는, 어쩌다 이런 병신 같은 곳까지 오게 됐나? 그것도 아시아계가?”
“에이, 상사님 저도 엄연히 미국인입니다.”
“그건 알지. 어쨌든 아시아계는 맞잖아.”
“예, 한국계입니다. 무일푼의 부모님이 이민 오셔서요, 돈을 모아 세탁소를 차리고, 자리를 잡고, 저를 낳고 키우셨습니다.”
“그렇고 그런 흔해 빠진 스토리군.”
“하하. 흔해 빠진 스토리지만, 어쨌든 진짜배기라는 말입니다. 부모님은, 만족하셨어요. 소소하게나마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셨다고 했죠. 그리고 단란하고 행복하게 가정을 이루셨죠.”
“….”
“저도 행복했어요.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온통 좋은 기억밖에 없어요. 세탁소의 그 스팀 냄새와 오고 가는 손님들이 도란도란 얘기하는 목소리. 그리고 부모님의 웃음소리. 그런 모든 것들을 떠올릴 때면, 저는 지금도 홀로 미소 짓게 됩니다. 모두 부모님이 미국에 와서 찾게 된 행복이죠.”
“…시발 거. 너는 짧은 얘기도 늘리는 재주가 있구나.”
“하하하, 어쨌든 저는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미국인으로 태어나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조국인 어메리카에 보답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돌아가서 부모님의 세탁소를 이어받을 겁니다.”
“….”
“아, 부모님 얘기하니 갑자기 엄청 보고 싶네요. 상사님도 가족이 보고 싶으시죠? 그렇죠?”
하고 뒤를 보며 말하는 정우현에게 브래드가 소리쳤다.
“앞을 봐라!”
취이이이익!
타당!
적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군인 수 명이 산악 한가운데서 갑자기 나타나 정우현과 브래드를 급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