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김도진의 연기가 물이 올랐다.
비록 영화 <격분>의 시나리오상 김도진은 딸이 실종된 아버지가 되어야 했지만, 그는 지금 딸이 아닌 반려견의 실종으로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모습이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딸을 잃든, 반려견을 잃든, 부모님을 잃든, 김도진은 배역에 걸맞게 극도로 분노하는 모습을 잘만 보여주면 되니까.
“컷, 오케이!”
정우현이 오케이 컷을 외쳤다.
짝! 짝! 짝!
스태프 중에는 손뼉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김도진이 엄청난 연기를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삼촌, 잘하셨어요!”
“…하하, 그래?”
연기에 몰입한 김도진이, 여전히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감독 정우현을 보며 살짝 웃었다.
배역에 집중한 만큼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로 돌아오기까지 아주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 모습을 보고 정우현이 말했다.
“삼촌, 그냥 지금 이대로 한 씬 더 갈까요?”
원래는 이번 씬을 찍고 조금 휴식을 취하려 했다.
“그럴까?”
“예, 지금 삼촌 감정선이 너무 좋아서요. 이대로 쭉 촬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좋았어!”
하고 김도진이 다시 감정을 잡았다.
잃어버린 자신의 애완견을 찾아야 하는 절박한 남자.
10년, 무려 10년을 함께한, 자신의 모든 것을 줘도 전혀 아깝지 않은 존재.
반려견 해피.
해피를 찾아야 한다.
“얼른, 얼른 다시 시작하자.”
김도진의 얼굴이 또다시 어두워지고, 눈빛은 번쩍이는 가운데 촬영이 진행됐다.
* * *
“아아아아아악! …그게 말이 됩니까!”
영화 <격분> 촬영장.
단순 실종으로 사건을 종결하는 경찰들 앞에서 김도진이 오열을 한다.
“컷, 오케이!”
한 번에, 단 한 번에 종료했다.
그리고 다른 씬.
딸을 잃어버린 놀이공원으로 돌아가, 완전히 처음부터, 스스로 단서를 찾는다.
그러고는 끝내 2개월 전,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해당 놀이공원에서 실종됐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 3개월 전, 다른 놀이공원에서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실종됐음을 확인하고서는 소름 끼치는 얼굴을 한다.
“컷, 오케이!”
이 역시 모두 단번에 촬영이 끝났다.
그렇게 극 중 김도진은 자신이 추적한 아이들 실종 사건을 재차 경찰에 신고하지만, 당국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며 코웃음을 친다. 심지어 어떤 이는 단순 가출일 수 있다며, 딸을 찾고 싶다면 소매치기 소굴이나 아이들 쉼터를 알아보라고 한마디 한다.
“…야이 개새끼들아아아아아아아아!”
결국, 참다못한 김도진이 분노하며 욕설을 해 대며 경찰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그는 이미 단순히 딸이 실종된 아버지라기보다는, 딸은 물론 연쇄적인 아이들 실종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추적자로 변모되어 있다.
“오케이, 컷!”
이 역시 한 번에 촬영이 끝났다.
* * *
촬영이 중반에 접어들었다.
이제 김도진은 이 실종 사건의 배후에 국제적 범죄 조직, 즉 아이들을 납치해 인신매매하는 단체의 존재를 알게 된다.
범죄 조직인 만큼 그들에 맞서는 일은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김도진은 마음을 먹는다. 어떻게든 침투를 해서 악인들을 모두 처치하고, 자신의 딸은 물론 다른 아이들도 모두 구출하기로.
그것도 오직 혼자서.
경찰에게는 이미 큰 실망을 하고 모든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매일 운동을 하기 시작한다.
달리기를 하고 산을 오르고, 윗몸 일으키기를 하고, 팔 굽혀 펴기를 한다.
사실 이는, 원래 김도진의 장기였다.
대중적인 액션 스타.
그게 김도진을 수식할 때 항상 붙는 말이었으니까.
“…으음.”
하지만 운동 씬을 위해 상의 탈의를 한 김도진의 몸은, 생각보다 형편없었다.
군살이 많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도진도 자신의 몸을 보다가 괜히 조금 민망했는지, 은근한 목소리로 정우현에게 말을 했다.
“…하하하, 내가 말이지. 원래는 안 이랬는데, 나이가 드니 어쩔 수 없더라고.”
“괜찮아요.”
이에 정우현이 답했다.
“어차피 훈련 씬 초반에는 평범한 중년 아저씨의 몸이어야 하니까 지금이 오히려 현실적이고 좋아요.”
그러고서는 정우현이 김도진의 몸 여기저기를 주의 깊게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인데, 살은 쭉 빼고 근육이 잡혀야 하거든요.”
“…그래, 그래.”
하고 대답하는 김도진을 보며 정우현이 말했다.
“할 수 있죠, 삼촌?”
“해야지, 해야 하는데… 예전처럼 운동해도 어쩐지 근육은 덜 붙고 살은 더 잘 찌더라.”
“기초 대사량이.”
정우현이 얼른 말을 받았다.
“떨어져서 그래요, 뭐, 나이 때문에 그런 것도 있고요.”
“…하하.”
김도진은 그저 자신의 몸을 보며 멋쩍게 웃고만 있었다.
“삼촌.”
그런 김도진을 정우현이 불렀다.
“응?”
“운동해요.”
“…그래, 해야지.”
“저랑 같이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네가?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헬스장 가서 트레이너한테 말하고 좀 더 빡세게 코칭받고, 식단도 하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아니요, 저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운동하면 좋잖아요. 건강해지고, 몸도 좋아지고. 그러니까 내일, 아니, 오늘부터 당장, 당장 같이해요!”
“음….”
그렇게 해서 정우현과 김도진은 영화를 위해 같이 운동하게 됐다.
김도진은 이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는데, 정우현의 체력이 엄청나다는 점이었다.
아니, 엄청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산인 북한산을 오르는데, 정우현은 지상에서 꼭대기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오르는 것은 물론 땀마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김도진이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그런 정우현을 놀란 눈으로 보고서 물었다.
“…넌 어떻게 하나도 안 힘들어하냐.”
“하하하, 삼촌! 저 스무 살이잖아요!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고요!”
무얼 하든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됐다.
김도진이 팔 굽혀 펴기를 50개 연속으로 하고서는 잠시 숨을 고르고 몸을 풀며 정우현에게 시선을 돌리면, 그는 쉼 없이 말 그대로 기계처럼 계속 팔 굽혀 펴기를 했다.
윗몸 일으키기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로 교대로 하체를 잡아 줬는데, 100개쯤 되면 복부가 떨리고 시야가 노래지는 것만 같은 김도진과 달리 정우현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우현아.”
결국, 김도진이 정우현을 보고 말했다.
“예?”
“…넌 대체, 뭐냐, 진짜.”
“하하하, 건강한 스무 살의 대한민국 청년입니다!”
“…으음.”
물론 그러는 와중 김도진 본인 또한 몸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모두 정우현 덕이었다. 그 어떤 헬스 트레이너보다 완벽하게 김도진의 운동 자세를 잡아 주고 있었고, 운동 방법을 알려 주고 있었다.
심지어 식단 조절까지 둘은 같이 했는데, 김도진의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정우현이 여지없이 잡아 줬다.
“삼촌!”
“…으응?”
김도진이 촬영 중간 휴식 시간에, 몰래 컵라면을 먹다가 감독인 정우현에게 걸렸다.
“라면 드시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우현아, 너무 허기져서 잠깐 맛만 본 거다. 두 젓가락, 아니, 한 젓가락만 좀 먹을게….”
“안 돼요!”
하고서 정우현이 간식용 도시락을 그 앞에 내밀었다.
닭가슴살이었다. 오직 김도진을 위한 특별 맞춤 간식이었다.
“하아….”
김도진이 닭가슴살을 보고 질린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에 정우현이 입을 열었다.
“삼촌.”
“…응?”
“지금은 고되지만, 나중을 생각해 보세요. 스크린 위, 수많은 관객 앞에서, 완벽한 몸을 선보일 그 순간을요.”
“….”
“세월이고 뭐고 삼촌 앞에서는 다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영영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거예요.”
정우현의 말에 김도진이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한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놀랍게도 먹고 있던 컵라면을 버리고서 굳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알았다.”
* * *
이렇듯 정우현이 심신을 다해 김도진과 운동을 함께하니, 그의 몸이 하루하루가 달라졌다.
“음, 이제 촬영해도 될 것 같아요.”
정우현이 김도진의 상체를 보고 말했다.
“…벌써?”
김도진이 거울을 통해, 역시 자신의 몸을 보며 좀 이르다는 투로 말했다.
“아직 좀 군살이 있고, 근육도 완벽하게 자리 잡지 않았는데…?”
“아니요, 삼촌.”
정우현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삼촌의 변화하는 몸이, 영화에 드러나야 합니다. 평범했던 중년 남자가, 운동을 좀 했다고 어떻게 단번에 조각 같은 몸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지금이 딱 좋아요. 실제 현실처럼, 삼촌이 운동하는 가운데, 조금씩 근육이 잡히는 몸을 카메라 앞에 보이기 딱 좋다는 거죠.”
“…아, 그렇구나.”
김도진이 정우현의 뜻을 뒤늦게 이해하며 답했다.
이에 촬영이 다시 재개됐고, 김도진이 각종 운동 씬을 찍기 시작했다.
모두 정우현과 매일 열중인 운동이었기에 자세도 좋고, 자연스러웠다.
“오케이, 컷!”
정우현의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촬영장 위로 울려 퍼졌다.
* * *
그리고 약 한 달 후.
김도진이 드디어 완벽한 몸을 갖게 됐다.
몸만 놓고 보면, 중년의 남자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실상 헬스 대회에 나가도 손색이 없는 근육이었다.
그 정도로 정우현이 심혈을 기울여 김도진을 트레이닝했다.
“하하하하, 이거 나이 사십 넘어서 이런 몸을 갖게 될 줄이야!”
김도진이 자신의 몸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 삼촌이 열심히 인내하고 집중하신 덕이죠.”
정우현의 말에 김도진이 얼른 답했다.
“우현아, 솔직히 너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너의 트레이닝이 없었다면 아마 씬을 수정해야 했을 거야. 상의 탈의는 일절 없이, 아저씨들이 즐겨 입는 헐랭이 런닝셔츠를 입고 싸우는 씬으로.”
“하하하하!”
그러고서 본격적인 액션 씬이 시작됐다.
김도진은 액션 영화 경험이 많기에 웬만한 액션이라면 도가 텄다.
한데 그가 두리번거리며 감독 정우현이 아닌 누군가를 찾는다.
그러다가는 끝내 다시 정우현을 보고 한마디 한다.
“…근데 그분은 없니?”
“…누구요?”
“무술 감독. 액션을 찍어야 하니까, 무술 감독이 있어야지.”
즉, 인물들의 동작과 동선 등 액션을 연출하고 총괄 지휘할 감독이 따로 없냐는 뜻이었다.
“하하하.”
이에 정우현이 잠시 웃었다.
그러고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응?”
김도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있다니.”
“무술 감독 필요 없다고요! 제가 하면 되니까요!”
“…네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는 김도진이었다.
일반적인 씬과 달리 액션은, 좀 더 전문적인 연출가가 필요하다.
각 배역에 맞는 알맞은 동작과 그에 따른 조화롭고 화려한 연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많은 감독이 액션 씬을 찍을 때는 전문 무술 감독을 고용한다.
그런데 정우현이 그마저도 자기가 한다고 했다.
“…우현아, 너, 뭐, 무술이나 그런 거 전문적으로 배워 본 적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이론은 거의 다 알아요! 예전에 학습했거든요.”
이 말에 김도진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 우현아!”
그러고서는 또 한참을 웃다가 말을 이었다.
“무술이란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더군다나 이론과 실제는 확연히 달라요. 책을 통해 몇 번 본 거랑 실제로 하는 건 천지 차이라는 얘기지.”
그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조각 같은 몸을 보고 말했다.
“물론 우현아, 네 덕에 이렇게 멋진 몸을 갖게 된 건 고맙고 영화에도 참 잘된 일이지만… 단순 헬스와 무술은 달라도 너무 달라서….”
하는데 어디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김도진이 뒤를 돌아봤다.
정우현이었다. 감독인 정우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각종 무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한순간 그가 태권도 자세를 취했다.
“하앗!”
그러고는 엄청난 기합 소리와 함께 마구 뛰어 공중으로 점프를 하더니 무지막지한 돌려차기를 했다.
“….”
김도진은 물론 다른 스태프도 모두 말을 잃었다.
정우현이,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공중회전 돌려차기를 하고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방금 공중에서 여섯 바퀴 반을 돌며 발차기를 했다.
즉, 2,340도 돌려차기를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