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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114)화 (114/200)

114화

그렇게 해서 엘라 로렌츠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비트코인의 개발자라는 사실이 밝혀질까 우려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세상에서 어나니머스가 정우현임을 아는 사람은 엘라밖에 없듯이, 사토시 나카모토가 엘라임을 아는 사람 또한 정우현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또 다른 우려는 곧 실현됐다.

엘라가 독일인이라는 정보를 토대로 독일의 기자들이 곧 그녀의 출신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즉, 그녀가 구동독의 악명 높은 정보부인 슈타지 요원의 딸이라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 * *

종로에 위치한 정우현의 우 재단 본사.

재단의 의장 정우현이, 독일에서 엘라의 정체에 관한 기사가 나오자마자 즉각 엘라를 찾았다.

그러고는 괜찮겠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그러자 엘라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다 각오하고 이렇게 한국에 온 거잖아요.”

하고서 그녀는 자신에 관해 보도하고 있는 티브이 뉴스를 보고 말을 이었다.

한국 언론도 독일의 기사를 따라 곧 엘라의 과거를 조명했다.

“그 작은 집에서 영영 갇히다시피 살 게 아니라면, 언젠가 한 번은 겪었어야 할 일을 지금 겪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엘라.”

이에 정우현이 역시 뉴스를 바라보며 답했다.

“우리가 논의했듯, 엘라의 정체를 숨기고 가상의 신분으로서 어떻게든 일을 추진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제는 지나간 얘기가 되었지만, 저는 걱정이 됩니다.”

그러고서 고개를 돌려 엘라를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엘라가 큰 상처를 받을까 봐요.”

“아니요.”

엘라가 곧장 답했다.

“제가 이 일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러고서 그녀도 티브이에서 시선을 돌려 정우현을 응시했다.

“더군다나 엘라 로렌츠라는 본명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면, 이렇게 양지로 나와 정우현 님과 함께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것도 영원히요. 그저 음지의 해커이자 프로그래머로만 삶을 살았겠죠.”

“음.”

“그러니 걱정 마세요.”

하고 엘라가 모처럼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 * *

엘라는 곧장 성명을 발표했다.

독일 언론이 취재한 대로 자신이 슈타지 요원의 딸임은 맞지만, 그로 인해 살면서 그 어떤 이점도 누린 것이 없음을 강조했다.

오히려 자신이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도 이내 암으로 돌아가시고는, 끝내 아무것도 없이 고아원에서 자라게 됐다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공개했다.

이로써 독일은 물론 한국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그녀를 감싸는 목소리도 나왔다.

엘라는 엘라의 아버지가 아니며, 또 다르다는 얘기였다. 더군다나 그 같은 과거를 딛고 정우현의 우 재단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좋은 일을 하려는 모습이 훨씬 더 대단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특히 한국을 중심으로, 이 같은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왜냐하면 정우현과 연이 있는, 사회의 저명한 사람들이 재단에 합류하며 엘라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은 말입니다.”

한국 공영 방송 KBC의 한 생방송 시사 프로그램.

한 중년의 남자가 출연해 다양한 이유를 들어 엘라를 옹호하고 있었다.

“일종의 연좌제와 다를 바가 없거든요.”

바로, 구태호의 아버지였다.

즉 전직 검찰총장에 현재 유력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구태호의 아버지가, 정우현의 우 재단에 합류했다.

이로써 구태호의 아버지는 과거 모스크바에서 아들 구태호를 구출한 정우현에게 한 약속, 즉 모든 것을 다해 정우현을 돕겠다는 말을 십여 년 만에 지키게 됐다.

정우현이, 그의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오랫동안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이번 재단 출범에 전화를 걸었다.

이에 구태호의 아버지가 흔쾌히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고서는 인맥 등 한평생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다해 우 재단을 위해 힘쓰고 있었다.

물론 엘라를 옹호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3조 3항.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거기에 유엔 및 국제 사회 또한 연좌제를 강력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구태호의 아버지가 계속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 우 재단의 관리자인 엘라 로렌츠를 두고 출신 성분이 어떻다는 등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돌아보길 바랍니다.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자신이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손가락질을 당하고 차별받아야 할 이유는 없으며 절대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구태호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정우현의 우 재단에 합류했다.

일찍이 정우현의 천재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김은정 박사 역시 정우현의 연락으로 함께하게 됐다.

“우리 우현이가 이렇게나 위대하고 멋진 일을 하게 될지 나는 알고 있었어. 근데 재단이 아직 제대로 시작되기 전부터 괜히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있네.”

또한 곽유정 영화 평론가도 합류했다. 오래전 영화 <겨울 방학>으로 정우현과 연이 닿은 그녀가 그의 연락을 받았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좋은 일이라고 하니 힘닿는 대로 노력해 보겠습니다. 제 특기인 말과 글로써요. 일단은 우리 재단의 관리자인 엘라를 지지하기 위한 짧은 논평을 하나 써야겠네요.”

거기에 글로벌 스타이자 정우현의 가장 오랜 친구인 브래드 퍼트도 합류했다.

“하하하하하, 우우우우!”

일찍이 과거 캘리포니아 롱비치 해변에서 그는 정우현에게, 장차 여유가 되면, 좋은 일을 많이 하길 바란다고 했었다.

더군다나 40개가 넘는 자선 구호 단체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이기에, 정우현의 재단에 합류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전화 통화도 브래드가 먼저 했다.

“좋아, 좋아! 아주 잘했어! 이게 바로 성인이 된 정우현의 진면목이군!”

“하하하하, 브래드! 아직 브래드를 따라가려면 멀었어요!”

“으음, 그동안 돈만 엄청 벌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했는데, 이제 한시름 놓는다. 모두 재단을 위한 큰 그림이었구나!”

“하하하, 꼭 그런 건 아니지만요. 뭐, 사업도 잘되고, 그에 따라 재단 활동도 더 활성화되면 참 좋겠네요.”

그리고 브래드는 곧장 한국으로 들어왔다.

구호 단체를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우 재단의 설립과 운영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정우현에 의해 총 관리자로 임명된 엘라와도 안면을 트고 친분을 쌓게 됐다.

우 재단 내 서양인이라는 동질감으로 금세 엘라와 가까워진 브래드는 그녀가 참으로 진실하고 똑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선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 그대로 세상과 장시간 거의 격리된 채 삶을 살아왔기에, 오히려 비현실적일 정도로 맑고 때가 묻어 있지 않은 면이 있었다.

그러다가는 브래드 또한 엘라의 과거를 향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게 됐고, 이에 즉각 그녀를 옹호하고 나섰다.

“좋은 일을 위한 자격이, 따로 필요합니까?”

한국에서 브래드 퍼트가 미국 및 유럽 주요 언론들과 인터뷰를 하며 말했다.

“출생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습니다. 엘라가 원해서 그런 아버지를 둔 건 아니잖아요? 아쉽게도 누군가는, 평범한 가정의 자녀로서 누려야 할 것들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죠. 그런 면에서 엘라는 오히려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고선 그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올바르게 자라, 자신의 과거처럼 불우한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녀를 막아야 하나요?”

이처럼 정우현과 가까운 사람들이 우 재단에 합류하게 되면서 재단이 훨씬 능률적이고 활기차게 운영되기 시작했다.

나아가 주요 인사들은 물론 정우현의 팬클럽 우현수호단과 우현스가디언조차 엘라를 옹호하는 활동을 하면서 그녀를 향한 편견이 조금씩 걷혔다.

한편으로는 엘라가 장문의 글을 써 슈타지의 피해자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한 사과문을 올렸다. 나아가 한국에서 다시 독일로 직접 찾아가 그들 피해자 단체에 직접 사죄하기도 했다.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면서.

피해자를 향한 사과인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향한 회한의 눈물이었다.

그러고서 그녀는 공식적으로 피해자 단체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정확히 하면 그녀가 아닌 그녀의 아버지를 대신한 사과와 용서였지만, 어쨌든 그들 단체가 엘라를 인정하고 끝내 받아들였다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우 재단의 공식적인 관리자로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고생했어요, 엘라.”

정우현이 우 재단의 본사에서 그녀를 맞이하며 말했다.

그간 근심이 없을 수 없었기에, 원래도 말랐던 엘라가 더 야위어져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전에 없이 빛이 났다.

“아니에요, 정우현 님.”

엘라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이라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리고 미소까지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진정 자유로워졌어요. 더 이상 작은 방이나 사이버 세계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어요. 드디어 엘라 로렌츠로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게 됐어요.”

“맞습니다, 엘라. 모두 당신이 힘겨웠던 과거를 직시하고, 한 치도 물러섬 없이, 스스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간 덕이죠.”

“스스로라뇨.”

엘라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답했다.

“스스로가 아니라 정우현 님 덕분입니다. 그날, 제 작은 집에 정우현 님이 찾아온 순간 이후, 저의 삶은 이렇게나 놀랍게 변했습니다. 정우현 님이 아니면 여전히 저는 가명을 쓰고 가상의 신분 뒤에 숨어서, 만화책을 읽고, 컴퓨터만 하고 살았겠죠.”

하고서 그녀가 강렬한 눈빛으로 정우현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아가 정우현 님은 물론 정우현 님과 친분이 있는 모든 사람, 거기에 정우현 님의 수많은 팬까지 저를 위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목소리를 내주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저 혼자만의 힘으로 일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고서는 엘라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간의 일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삶을 다시 한번 되새기자 순간 감정이 벅차올랐다.

“…우현 님, 저, 말씀드렸다시피, 아주 어릴 적에 아무리 슬퍼도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만, 이 순간… 어쩐지 눈물이 나오려고 하네요…”

이에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울어도 됩니다, 엘라.”

그러고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앞에서는 울어도 돼요.”

“아아.”

정우현의 말에 엘라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그러고서는 정우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정우현 님…”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서,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함과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 나아가 절대적인 위안. 그런 것들을 엘라는 정우현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정우현 님을 위해서라면 제 모든 것을 다할 거예요. …목숨을 바쳐서라도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정우현이 천천히 답했다.

“엘라는, 이제 웃게 될 겁니다. 꼭 그렇게 될 겁니다.”

* * *

이렇듯 우 재단의 성공적인 설립 및 출범과 함께 정우현에게 또다시 좋은 소식이 들렸다.

바로 구태호의 경찰 학교 수석 입학과 권유라의 NIT 입학 장학금이었다.

그들은 친구 정우현의 도움을 받아 계획한 대로 모든 목표를 달성했다.

“하하하, 정우현!”

그리고 며칠 후.

구태호와 권유라가 차를 타고 정우현의 집 앞에 찾아왔다. 특히 권유라는 미국에서 다니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NIT 입학 전 한국에 잠시 들어왔다.

이에 정우현은 기뻐하며 밖으로 나가 친구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약속했던 대로 오늘 목표 달성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를 하기 위해 모였다.

그것도 양평의 최고급 풀빌라를 통째로 빌려 놀기로.

“…이게 뭐지.”

한데 정우현이 자신의 짐을 실으려고 차 트렁크를 열고서는 놀랐다.

이에 구태호가 곧장 답했다.

“뭐긴 뭐야, 술이지.”

소주와 맥주가 무려 한 짝씩, 즉 소주는 30병 맥주는 20병이 트렁크에 있었다.

“오늘 먹고 죽어 보자고오오오!”

권유라가 신나서는 말을 이었다.

정우현이 친구들과 함께한 이래 거의 처음으로, 조금 겁이 났다.

전생에서 잘 먹지 못한 술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이내 그가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그리곤 자신을 믿기로 했다.

모든 것이 가능한 두 번째 삶. 알콜 또한 쉽게 정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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