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약 한 달 전 정우현은 엘라를 만나기 위해 독일 베를린으로 향했다.
정확히 하면 어머니와 집에서 대화를 나누고 이틀 후에 갔다.
엘라는 갑작스러운 정우현의 방문에 조금 당황하면서도 이내 기쁜 마음으로 그를 맞이했다.
워낙 그를 믿는 데다, 현재 함께하고 있는 비트코인 프로젝트가 무척 순조로웠기 때문이다.
벌써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비트코인을 소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소수의 사람은 이미 비트코인을 거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와 같은 거래는 대부분 국가나 법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음지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다. 비트코인 자체가 제도권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이처럼 제도 밖에서 먼저 사용되는 것은 당연했다. 점차 사람들이 더 많이 비트코인을 사용하고, 그 결과 제도권 내에서도 공공연히 비트코인을 소유하게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엘라는 생각했다.
“오랜만이네요.”
엘라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정우현에게 미소 지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우현이 곧장 입을 열었다.
“엘라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 * *
정우현은 빠르게 자신의 계획을 모두 설명했다.
비영리 재단의 설립과 해당 재단의 관리자로 엘라가 힘써 주길 원한다고.
엘라는 당황했다. 과거 아버지가 의문의 이유로 죽고, 어머니마저 병으로 세상을 다해 고아원에 들어가게 됐을 때, 다시는 자신의 신분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전 세계 해킹 대회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해서였고 결정적으로 가명을 사용하는 등 신분을 속였다.
“엘라.”
정우현이 그녀를 바라보고 말했다.
“엘라가 아니면 마땅한 적임자가 없어요.”
그러자 엘라가 천천히 답했다.
“…정우현 님의 재단이니만큼 정우현 님이 직접 운영하시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예. 제가 설립했으니, 의장으로서 모든 것을 책임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두를 실무 차원에서 총괄하고 지원할 유능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고서 그는 엘라가 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이에는 엘라, 당신밖에 없습니다.”
“…음.”
엘라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일단, 정우현이 자신을 중책의 자리에 앉히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었다.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실제로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그리고 행여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 괜한 곤욕을 치르지는 않을지 그게 문제였다.
“…정우현 님, 감사합니다만.”
하고 엘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프로그래머일 뿐입니다. 어릴 적 이후로 계속 작은 공간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하고 만화책만 보고 사는 한낱 프로그래머일 뿐이에요. 그런 제가 어떻게 세상에 나가, 그런 큰일을 할 수 있을까요?”
“엘라는.”
이에 정우현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엄청난, 비트코인이란 걸 만든 장본인이잖아요. 심지어 엘라가 비트코인을 만들었다는 사실조차, 여태 세상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등 계획한 대로 일이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죠.”
“그 말은 틀렸어요, 정우현 님. 그 사실을 정우현 님이, 그러니까 어나니머스가 알고 있잖아요.”
엘라가 불쑥 말했다.
그러자 정우현이 살짝 웃으며 답했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저에게 발각되고 나서, 어떻게 하셨어요? 대담하게 저한테 만날 것을 먼저 제안하고서는, 끝내 저를 프로젝트에 참가시키고 동료로 만들고서 비트코인을 존폐의 기로에서 살려 내는 한편 보안을 강화시켜 한층 더 탄탄하게 재탄생시켰죠. 위기관리와 문제 해결. 이야말로 엘라의 엄청난 능력을 보여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
엘라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오로지 비트코인을 살려 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보니 정우현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어쨌든 그녀는 엄청 대단한 일을 해냈다.
“그리고.”
정우현이 계속 말을 이었다.
“엘라의 꿈이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어떤 권력이나 통제로부터 벗어나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닙니까?”
엘라가 또다시 가만히 있다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정우현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와 같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이 방법이 최선이에요. 어떤 국가나 조직의 이해관계와 관련이 없는 비영리 재단을 설립해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발로 직접 뛰는 것. 이야말로 엘라가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우현은 우 재단 설립을 계획하며, 곧장 실무적인 부분에 있어 재단을 이끌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사업에서는 일론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처음엔 물론 일론을 떠올렸다. 일론에게 우 재단의 관리도 맡기자고.
하지만 이내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고, 자기애 성향이 지나친 일론을 떠올리며 마땅한 적임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하는 우후의 사업이라면 몰라도, 우 재단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낮추고 진심으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이끌어야 했다. 물론 능력 또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이렇게 놓고 보니 금세 한 명이 떠올랐다. 바로, 비트코인을 개발한 사토시 나카모토, 즉 독일 베를린의 한 작은 집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있는 엘라 로렌츠다. 엘라야말로 이 일을 위한 적임자였다.
“…제가 그런 일을 하리라….”
엘라가 한참을 생각하고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제 존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건… 역시 좀 두렵습니다.”
비극적인 가정사에 겁내고 있는 엘라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에 정우현이 얼른 답했다.
“엘라는 이제껏 살아온 대로 가명을 사용하면 됩니다. 그에 맞춰 우리가 얼마든지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요.”
엘라를 보호하기 위해 주민등록번호 등 여러 개인 정보와 이력 등을 가상이지만 실제처럼 완벽하게 만들자는 뜻이었다. 동시에, 엘라 로렌츠를 본명으로 하는 원래 그녀의 신분은 역시 보안 시스템을 마련해 은폐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 것쯤은 정우현과 엘라, 즉 각국 모든 정보기관을 한 손으로 주무를 수 있는 어나니머스와 사토시 나카모토의 기술력이면 쉽게 하고도 남았다.
“…으음.”
그래도 엘라가 계속 고민하자 정우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엘라는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언론 등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제가 나서면 되니까요.”
이것이 엘라의 출신 등 과거를 숨기면서도, 그녀를 양지로 이끌어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3일.”
엘라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답했다.
“3일만 기다려 주세요. 3일 동안 생각해 보고 답변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정우현이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 전 3일 동안 모처럼 독일에 여행 온 것으로 생각하고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엘라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하고서 정우현이 엘라의 집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우현 님.”
“예.”
“…어쨌든, 감사합니다. 저를 믿어주셔서, 제게 그런 엄청난 일을 권유하시니….”
그러고는 정우현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괜히 옆으로 돌리며 부끄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우현 님을 만남으로써 제 삶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저는 그저.”
이에 정우현이 짧게 답했다.
“엘라도, 저도, 그리고 세상도 훨씬 즐겁고 밝아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 * *
엘라의 연락이 오기까지 3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루, 단 하루 만에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승낙이었다, 그것도 완전한 승낙이었다.
엘라가 모처럼 가벼운 복장을 하고 정우현과 베를린 시내로 나와, 조금은 흥분한 듯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보면요.”
“예.”
“제가 그렇게 작은 공간에 갇혀 살 필요는 없는 것 같더라고요.”
“맞습니다.”
“과거의 일은 아무렇지 않고 그로부터 나름 자유롭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정작 속으로는 그 일이 사람들에게 밝혀지는 게 두려워 스스로 옥죄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 것입니다. 정우현 님이 돌아가고 나서요.”
“음.”
정우현이 엘라의 말을 경청하며 소리를 냈다.
엘라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예, 저희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일을 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그릇된 신념에 의함이든, 혹은 상부의 지시에 따른 강요에 의함이든 어쨌든요. 그럼으로써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는 게 중요하겠죠. 하지만 우현 님.”
“예.”
“그 모든 걸 제가 한 건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그런 아버지로부터 어떤 것도 물려받은 게 없습니다. 아주 조금의 재산은커녕,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어머니도 결국 잃었죠. 완전한, 완전한 바닥에서의 삶이 제 인생의 시작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아버지의 그림자에 갇혀 영영 음지에서 살아야 할까요?”
사실 이는 정우현이 엘라를 만나고 그녀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끼고 생각했던 의문이었다.
왜 그녀가 이렇게 원래의 모습을 숨기면서까지 살아야 할까.
슈타지 요원의 딸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어서는 안 된다고 해도, 마치 그녀가 죄를 지은 죄인처럼 큰 짐을 짊어진 채 살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지만 정우현은 당시 엘라와의 만남이 워낙 초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녀의 본심을 자극할 수 있는 민감한 이야기였기에 잠자코 있었다. 때로 어떤 문제는 오로지 스스로 직시하고 해결해야 할 때가 있으니까.
한데 방구석에서 뛰쳐나와,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일해 보자는 정우현의 권유에 엘라가 모처럼 자신의 삶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러고는 끝내 큰 결심을 했다. 이제 더 이상 내면의 감옥에 갇혀 있지 말자고.
“물론 아버지의 활동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을 생각하면 여전히 제 마음은 무겁습니다. 아마 이는 평생 제가 안고 가야 할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이제 결심을 한 이상, 제 마음은 이렇습니다. 혹시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그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하고 싶어요. 그렇게나마 그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만 있다면….”
하고서 그녀가 뒤늦게 정우현을 살피고서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아, 죄송해요, 너무 제 얘기만 했네요. 이제 곧 정우현 님과 엄청난 일을 해야 하는데요.”
“아닙니다.”
이에 정우현이 곧장 대답했다.
“앞으로도 엘라와 엘라의 과거에 관해서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하여간, 엘라. 감사합니다. 이렇게 저의 재단에 합류하신다니.”
“감사는.”
긴 은빛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가운데, 엘라가 거리의 사람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해야죠. 모처럼 이렇게 밖으로 이끌어, 저를 사람답게 만들어 주고 있잖아요?”
그러고는 정우현을 보고 전에 없이 눈웃음까지 짓는 엘라였다.
정우현은 엘라가 이렇게 밝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새삼 생각했다.
그러고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여간 잘됐습니다. 그럼 엘라, 저는 이만 한국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재단 설립을 준비할게요. 엘라는 일단 큰 변화 없이 여기 베를린에서 저와 연락을 취하며 기다리면….”
하는데 엘라가 불쑥 말했다.
“아니요.”
“…예?”
정우현이 의아해져서는 곧장 물었다.
“저도 이대로 정우현 님과 함께 한국에 가고 싶어요. 그리고 정우현 님을 따라 기자 회견에도 참석하는 등 본격적으로 재단 일을 하고 싶어요.”
“….”
엘라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비록 재단에 참여하기로 결정은 했지만, 그녀에 관한 정보는 완벽히 숨기고 가상의 신분을 내세우기로 했으니까.
한데 이대로 자신과 함께 한국으로 가, 심지어 기자 회견에까지 참석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장 이어지는 엘라의 말로, 정우현은 그녀의 깊은 뜻을 알게 됐다.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을래요. 저, 엘라 로렌츠, 제 이름으로 버젓이, 정우현 님을 돕고 싶어요.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소중한 사람을 위해 당당히 살아갈래요. 그렇게 정우현 님에게 보답하며, 가능한 큰 힘이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