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정우현의 도움으로 권유라는 SAT 점수를 원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그러고서는 곧장 서류를 만들어 NIT에 지원했다.
“정말 고마워, 우현아.”
권유라가 미국에서 정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요즘 부쩍 정우현과 통화를 자주 했다.
“하하하, 대체 몇 번이나 고맙다고 하는 거야.”
“…글쎄. 진짜 근데 계속 고마운데 어떡해. 아, 근데 우현아.”
“응?”
“나 사실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 네가 나 가르칠 때 말이야.”
“응.”
“책 엄청 많았잖아.”
“아, 그랬지.”
그 책들은 순전히 권유라를 위해 정우현이 따로 준비한 책들이었다.
“너는 그거 다 읽어 본 거야? 그러니까 나처럼 요약식으로 공부한 게 아니라, 일일이 다 읽어 봤냐는 거지.”
이에 정우현이 가볍게 답했다.
“응, 그러니까 내가 요약을 해서 널 가르칠 수 있었던 거지.”
“…와, 대박.”
놀라울 따름이었다. 두꺼운 각종 영미 소설은 물론, 어렵기 그지없는 철학책들 예컨대 <존재와 시간>이나 <논리철학논고> 같은 책들도 잔뜩 있었으니까.
“…대체 언제? 언제 그걸 다 읽은 거야?”
“어렸을 때.”
과거 배우가 되기 전, 집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마구 읽었을 때 모두 정독한 책이었다.
그것도 그는 원서로 읽었다. 즉 영미 소설은 영어로, 프랑스 소설은 불어로, <존재와 시간> 같은 독일 철학 책은 역시 원서인 독일어로 읽었다.
“…넌 정말.”
권유라가 모처럼 정우현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대단해.”
“대단하긴. 그냥 재밌어서 읽은 거지.”
하고서 정우현이 밝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나저나 유라야.”
“응?”
“내년에 너랑 태호, 계획대로 입시 결과 나오는 거 보고 한번 모이자.”
“오, 좋아!”
“그러니까 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 나도 내 일에 집중하고 있을 테니까.”
“아아, 우현아.”
“응?”
“우리, 내년에 성인 되잖아!”
“그렇지.”
“그럼, 그때 술 먹자! 셋이 모이면.”
정우현이 잠자코 있다가는 답했다.
“…너, 먹어 봤어, 술?”
“아니, 근데 궁금해서!”
권유라는 활달한 성격으로 미국에서 친구들을 곧잘 만들었지만, 정우현과 구태호처럼 오랜 시간 함께한 가까운 친구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내년, 자신의 생애 첫 음주를 그들과 함께하기로 일찌감치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하하, 그래, 그럼.”
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 정우현이 답했으나, 내심 걱정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술을 먹어 봤기 때문이다. 물론 전생에서.
한데 잘 마시지 못했다. 원체 관심도 없었는데, 어쩌다가 술을 먹게 되면, 금세 취하고 힘들어졌다. 즉 그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생의 죽마고우인 권유라가 벌써부터 술 얘기를 하고 들떠 있으니, 조금 걱정이 됐다.
* * *
며칠 후 권유라는 감사의 표시를 말로만 하지 않았다.
정우현의 계좌에 무려 돈을 입금시켰다.
그것도 10억 원이나.
이에 정우현은 놀라고서는, 10억 원을 곧장 다시 권유라에게 송금했다.
그러자 그녀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우현아, 뭐야. 내가 고마워서 입금한 건데.”
“유라야.”
하고 정우현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나랑은 친구지?”
“…그렇지.”
“근데 왜 입금해. 내가 무슨 과외 선생도 아니고, 대가를 바라고 널 도와준 게 아닌데.”
“…그건 그렇지만, 그냥 고마워서 선물처럼 줄 수 있는 거잖아. 친구끼리도 충분히. 그리고 얼마 하지도 않는데, 뭐….”
재벌 집 외동딸답게 10억 원이나 되는 금액을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권유라다.
물론 엄청난 기업인이 된 정우현에게도 10억 원이 무척 큰돈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액수의 문제가 아니었다.
“됐어, 난 그런 거 원하지 않아.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장학금 받고 NIT에 입학하게 되면, 한턱 크게 쏴라.”
사실, 구태호도 경찰 학교 입시를 성공적으로 치른 뒤 정우현에게 사례했다.
정확히 하면 구태호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즉 전 검찰총장의 이름으로 정우현의 계좌에 돈이 입금됐다.
1억 원이었다. 한평생 거의 공직에만 전념했던 구태호의 아버지를 떠올리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곧바로 그 돈을 친구 구태호의 계좌로 다시 송금했다.
그러고서는 지금 권유라에게 말했듯, 내년에 원하는 목표를 확실히 달성하면 그때 가서 맛있는 거나 한번 사 달라고 가볍게 얘기했다.
“…그래?”
하고서 권유라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럼, 알았어."
그리고 며칠 후 권유라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
그것도 사진이 한 장 첨부되어 있었다.
바로 자신의 새 차 옆에서 손가락으로 V자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정우현은 단박에 그녀가 이 사진을 자신에게 왜 보내는지 알았다.
해당 차량이 우후의 모델 W였기 때문이다.
즉 권유라는 정우현을 향한 고마움의 표시로 기어코, 우후의 차량을 한 대 샀다.
‘완전 좋음! 소음도 없고, 엄청 잘 나가! 솔직히 전기차, 긴가민가했는데, 지금은 친구들한테 엄청 추천 중!’
하고 메시지까지 딸려 왔다.
권유라는 미국에서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차를 끌고 다녔다.
경호원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니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는 원래 모델 W가 아닌, 다른 차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끄는 에이치 자동차의 승용차 한 대, 그리고 이탈리아 브랜드의 슈퍼카 한 대 이렇게 총 두 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차량이 벌써 세 대가 됐다.
‘하하, 그래, 잘 타고, 홍보도 많이 해 줘.’
이에 정우현도 가볍게 화답을 했다.
* * *
한편, 우후의 주가는 그새 300달러가 되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공장이 신설되며 매출이 증가하고 이익이 늘었다.
그리고 각종 신사업에 대한 기대감도 우후의 주가를 올리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우후의 시가 총액은 약 150조 원에 달했고, 정우현의 자산은 무려 100조 원을 돌파했다.
그리고 며칠 후 일론에게서 전화가 왔다.
“헤이, 보오오스!”
“안녕하세요, 일론!”
“보스, 재밌는 소식이 있다!”
일론의 말에 정우현이 재치 있게 답했다.
“우리 회사의 주가가 상승하는 것 말고 더 재밌는 소식이 있나요?”
“하하하하, 그건 그렇지만.”
하고서 일론이 즐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것도 재밌을 거다. 보스, 지미 킹 알지?”
과거 영화 촬영 경험으로 미국에서의 생활도 익숙한 정우현이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미국 최고의 토크쇼 진행자이니까.
“아, 알죠, 코미디언 출신의 토크쇼 호스트잖아요.”
“그래! 다름이 아니고 그 사람에게서 우리 캘리포니아 지사로 전화가 왔다! 보스를 토크쇼에 섭외하고 싶대!”
“…저를요?”
의아했다. 물론 그가 세계적 인물이고 잘나가는 사업가인 건 분명하지만, 현재로선 딱히 배우 활동을 하지 않는 등 미디어와는 거리를 두고 있으니까.
“왜요?”
“왜요라니, 보스. 보스는 현시점, 미래를 이끌 신기술의 상징 같은 인물이라고!”
“음….”
딱히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기에 일론의 말이 별로 와닿지 않았다.
정우현이 가만히 있자, 끝내 일론이 재차 입을 열었다.
“100조!”
“…예?”
“보스의 자산이 이번에 100조 원을 달성했잖아! 그래서 섭외하는 것도 있겠지. 영 앤 리치! 자수성가한, 세계에서 가장 젊은 부자!”
“아아.”
그제야 정우현은 이해가 됐다. 미국 최고의 토크쇼 프로그램이 왜 자신의 출연을 바라는지.
“출연할 거지?”
얼른 대답을 바라는 일론의 물음에도, 정우현이 잠자코 있었다. 실상 그는 과거 영화 <인크레더블 킹 보이> 이후 언론과의 접촉은 웬만해서 피해 왔었다.
지금처럼 조용하고 편안하게 생활하는 게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보스.”
정우현이 대답을 하지 않자 일론이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의 사업을 위해 나간다고 생각해.”
“….”
“보스가 나가서 우후와 제품에 관해 한마디라도 더하면, 그보다 더한 제품 홍보가 또 어디 있어? 무려 미국 최고의 토크쇼라고. 시청률이 장난이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상 정우현의 등장만으로도 우후에 큰 득이 될 게 틀림없었다.
일론의 말과 함께 정우현이 찬찬히 생각해 보고는 끝내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일론,”
“오오!”
“회사와 직원들을 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잘됐군, 잘됐어!”
일론이 진심으로 기뻐하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하하! 사실 내가 나가고 싶었다고!”
일론은 정우현과 달리 언론 노출과 SNS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는 방송 출연이, 그것도 미국 최고의 토크쇼 출연이 구미에 당길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럼 일론이 출연하겠다고 그러지 그랬어요?”
“실은.”
하고 일론이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말해 봤지. 왜 안 해 봤겠어. 보스랑 같이 출연하고 싶다고. 근데 단칼에 거절하더라, 하하하… 그들은 오직 보스만 나오길 바라더군. 그래야 더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다나.”
방송사 측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우현과 일론이 함께 나오는 것보다는, 오직 정우현 혼자 출연하는 게 여러모로 득이었다. 정우현이 워낙 대단한 인물이면서도 남녀노소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반면, 일론은 특유의 자극적인 화법으로 사람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럼 출연하는 것으로 하고, 그렇게 일을 추진할게.”
“알겠습니다.”
* * *
그리고 약 한 달 후.
미국 지미 킹 쇼의 세트장.
코미디언 출신의 지미 킹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술술 말한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쇼 역사상 가장 젊으면서도 부자인 데다 똑똑하고 잘생기기까지 한, 뭐 하나 빠짐없는 사람을 모셨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방청객들은 이미 오늘의 게스트 정체를 알고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바로, 세계적 기술 선도 회사인 우후의 CEO, 정우현입니다!”
“아아아아아아아!”
계속해서 방청객들이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드디어 정우현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멋진 정장 차림이었다. 불과 몇 달 후 성인이 될, 183센치미터 키의 정우현이었다.
그는 오늘을 위해 모처럼 메이크업도 받아서, 그야말로 눈부신 외모를 자랑했다.
정우현이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하고 자리에 앉자, 사회자 지미가 눈을 크게 뜨고 탄성을 내뱉었다.
“와우.”
그러고서는 크게 말했다.
“실제로 보니, 잘생겼다는 말도 부족하네요! 조각이 나타난 줄 알았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정우현이 웃으며 답했다.
“와아아아아!”
“쏘 슈퍼 핸썸!”
“인크레더블 킹 가이이이이이!”
이에 방청객에서 계속해서 소리가 터져 나와, 사회자 지미도 그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하, 대단하군요.”
그럼에도 소리가 작아지지 않자, 그가 검지를 입에 대며 사람들을 가까스로 조용하게 만들고는 곧장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온갖 톱스타는 물론 유력 정치인과 경제인 심지어 유럽과 중동의 왕족까지 나왔었는데, 이렇게나 사람들이 환호하는 건 처음 봅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으음.”
사회자가 조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말입니다, 정우현 님. 처음부터, 정해진 질문 말고 다른 걸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나 인기가 많으신데, 예전처럼 다시 영화를 할 생각 없으신가요?”
“와아아아아!”
사회자의 질문에 사람들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는 분위기에 따라 유연하게 쇼를 진행해 시청자들의 반응을 이끌어 냈다. 이로써 이 방송은 미국 최고의 토크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방청객들을 포함한 미국, 아니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그 점을 가장 궁금하게 여길 것 같은데요.”
“아, 하하.”
정우현이 이에 지그시 미소 짓고는 답했다.
“저 역시 영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말씀드립니다.”
그러고는 이 기회에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아직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계획을 밝히기로 했다.
“할 겁니다. 영화. 다시, 할 거예요. 그것도 이전보다 더, 제대로 즐겁게 할 겁니다.”
“오우!”
생각지도 못한 정우현의 대답에 사회자가 탄성을 내뱉는 한편, 방청객들이 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몹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랫동안, 대중들이 정우현에게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