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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109)화 (109/200)

109화

우후 본사 사장실.

사장석에서 일어나 우뚝 서 있는 정우현을, 권유라가 앞에 두고 잠자코 앉아 있다.

SAT 준비를 도와준다니, 그것도 한 달 동안이나 그런다니 고마웠다. 한데 조금 무섭기도 했다. 정우현의 말을 들어 보면, 공부 과정이 엄청 빡빡할 것 같아서.

그래서 뭔가 질문을 하고 싶기도 했는데, 막상 떠오르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NIT 입학 장학금을 받는다는 자신의 목표를 생각하면, 정우현의 말을 당연히 따라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다가는 끝내 입을 열었다.

“알았어.”

그러고서 고개를 올린 채 오랜 친구인 정우현을 바라보고서는 말을 이었다.

“근데 나, 모레부터 하면 안 될까? 오랜만에 한국 온 김에 내일은 좀 쉬고 싶어서.”

이에 정우현이 미간을 찌푸리고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권유라는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됐다.

* * *

다음 날, 오전 6시 5분.

트레이닝복 차림의 권유라가 머리를 덜 말린 채 우후의 사장실에 도착했다.

“…어?”

한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넓은 사장실 내부가 흡사 독서실처럼 변했으니까.

사장실 한편에는 커다란 서재와 여러 책이, 그리고 반대편에는 값비싼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전방에는 화이트보드가 있었고, 그 앞 중앙에 정우현이 꼿꼿이 서 있었다.

“…우현아!”

“늦었네.”

정우현이 건조하게 답했다.

그는 이미 친구라기보다는 선생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 미안, 알다시피 미국은 한국보다 등교 시간이 늦어서… 이렇게나 일찍 일어나는 건 진짜 오랜만이야….”

하고서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워낙 정신없이 집을 나와서 드라이를 할 시간도 없었다.

“그래, 하여튼 자리에 앉아.”

하고 정우현이 말했으나 권유라는 어쩐지 머뭇거리며 책상 앞으로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는 정우현의 눈치를 슬며시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데 우현아. 배고픈데 나, 뭐 좀 먹고 시작하면 안 될까.”

그러자 정우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에 권유라가 간청하다시피 말했다.

“…아니, 뭐 대단한 걸 바라는 건 아니고, 그냥 빵 같은 거 하나랑 우유 정도만….”

“안 돼.”

정우현이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권유라.”

“…응?”

“오늘 아침은 원래, 영양과 맛 모두 수험생에게 가장 좋은 식단이 한식과 양식 두 가지로 준비되어 있었어.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의, 우리 회사 구내식당 조리팀이, 오로지 널 위해 만든 음식이지. 즉 너는 한식과 양식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아침 식사를 할 예정이었다.”

“…아, 그럼 지금 선택할래! 나, 먹을 수 있어…!”

“하지만 안 돼.”

권유라는, 태어나서 이렇게 단호한 정우현은 정말이지 처음 봤다.

“지각했기 때문에 안 돼. 5분을 늦었든 1분을 늦었든, 너는 어제 우리가 한 약속을 처음부터 어겼어. 6시, 정확히 6시까지 오라고 했잖아.”

“아, 우현아, 그건 내가 워낙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느라…. 그리고 또 미국이랑 시차도 있고.”

“그런 마음가짐이.”

정우현이 얼른 그녀의 말을 받았다.

“입시를 실패하게 만드는 거야.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 정도까지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나약한 마음이! 너를 목표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거다. 권유라, 하루아침에 태평양까지 건너서 한국에 온 이유를 잊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너의 실력을 입증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

정우현의 말에 권유라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옳은 얘기였다. 고작 5분이라 할지라도, 그 시간이 쌓이고 쌓이면 50분이, 나아가 150분이 된다. 150분, 즉 2시간 30분이면 한 과목의 점수가 바뀔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5분 늦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세계 최고 공과 대학인 NIT에 입학할 내로라 하는 글로벌 수재들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알았어.”

끝내 권유라가 짧게 대답하고는 준비된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정우현의 말대로 공부를 위한 마음가짐이었다.

고작 한 끼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NIT의 입학 장학금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새롭게 시작되는 성인으로서의 삶이 꽤나 달라질 것 같았다. 그것도 안 좋은 방향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서 권유라는 가방을 열고 준비해 온 노트를 꺼냈다.

* * *

그렇게 권유라의 입시 공부가 시작됐다.

그녀는 이내 서재에 있던 책들이 어떤 책인지 알게 됐다.

모두 영어로 된 책이었다. 물론 미국 입시를 치러야 하니 영어로 된 책으로 공부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분야가 대부분 문학과 철학 쪽이라는 게 중요했다. 즉 그 책들은 하나같이 인문학 서적이었다.

“유라야, 너는.”

“응?”

“수학 부문은 뭐 만점이고 중요한 건 리딩인데.”

“…응.”

“아마 그쪽으로도 자연과학 분야의 지문은 그다지 문제없었을 거야.”

“맞아.”

그러고서 그녀가 빠르게 답을 이었다.

“내가 항상 틀리는 쪽은 그런 거야. 막 뜬구름 잡는 문제들. 막 이상한 사상이니 예술 사조니 가져와서, 코에 붙이면 코걸이, 귀에 붙이면 귀걸이 같은 그런 문제들 있잖아. 그런 거에서 항상 점수가 나가.”

하고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했다.

“솔직히 어이없어. 막 수학처럼 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A로 해석하면 A가 맞고 B로 해석하면 B가 맞는, 그런 문제들을 왜 잡고 씨름을 해야 하는지.”

과학 영재인 권유라다운 고충이었다. 권유라는 정확히 자신의 그런 면 때문에 SAT에서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기 힘들었다.

“그래, 나도 너의 그 점을 잘 알고 있지.”

하고 정우현이 서재로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는 한 달 동안 여기 있는 문학과 철학 서적들을 독파하게 될 거야.”

권유라가 깜짝 놀라서는 답했다.

“…저 책들을 전부?”

“응. 물론, 정독하자는 건 아니야. 사실 정독을 하는 게 가장 좋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부족하지.”

하고 정우현이 서재에 꽂힌 책 한 권을 빼서 손에 들고는 권유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니까 속성으로, 내 강의와 함께 책을 요약하는 식으로 학습할 거야. 그렇게 오전에는 내가 강의하고, 오후 낮에는 너 스스로 학습하며, 저녁 이후에는 낮에 공부한 것들을 함께 검토하는 시간을 가질 거다.”

“…아아.”

권유라는, 수업 방식이 굉장히 체계적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친구이자 선생이 된 정우현에게 더 믿음이 갔다.

“이렇게 딱 30일, 30일만 하는 거지. 그러면 넌 이전에 비해 훨씬 독해 문제를 잘 풀게 될 거야.”

“아,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유라, 너는 나만 믿고 잘 따라오도록.”

“…알았어!”

권유라가 힘차게 답했다.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됐다.

첫 번째 강의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였다. 해당 소설은 워낙 영미 문학의 고전이기에 SAT에 단골로 등장했다.

“아, 이건 나도 읽었어! 위대한 로맨티스트 개츠비!”

시작부터 자신이 아는 소설이 나오자, 권유라가 모처럼 해맑게 웃으며 소리쳤다.

“개츠비가 로맨티스트라고?”

“당연하지! 이루지 못한 사랑을 위해 전 인생을 걸고 끝내는 파멸까지 했잖아! 이보다 더한 로맨티스트가 어디 있어?”

“개츠비가 정말 오로지 사랑을 위해 그랬을까?”

“…응?”

권유라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정우현은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개츠비는, 보잘것없던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 그랬던 게 아닐까? 가난했기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냉혹한 현실에서, 부잣집 딸이었던 데이지는 일종의 상징이었던 거지. 그의 삶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

“중요한 건 데이지가 개츠비의 사랑을 끝내 받아 주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야. 데이지를 위해, 그의 삶이 바뀌었고, 가난했던 그가 부자가 되었으며, 끝내는 과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졌다는 거지.”

권유라가 정우현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개츠비가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극복한 건 아니야. 데이지를 향한 부자연스러운 집착과 그리고 죽음이, 결국 이를 나타내고. 하여간 유라야.”

“…응?”

“네가 아까 이런 문제들은 답이 정해져 있지 않고,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했지?”

“…맞아.”

이에 정우현이 모처럼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실 그 말도 맞아. 해석에 따라 네 말대로 개츠비는 위대한 로맨티스트로 비칠 수도 있지.”

“….”

“중요한 건 개츠비가 어느 하나로 고정할 수 없는 입체적인 인물이라는 거야. 그리고 실제 인간과 현실은 이렇게 입체적이기도 하고. 결국 핵심은.”

하고서 정우현이 다시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와 같은 모순과 여러 관점 그리고 의미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거지. 이게 인문학 분야의 지문을 대했을 때의 기본자세다.”

“아아.”

권유라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이와 같은 훈련을 반복할 거야. 주어진 텍스트를 해석하고 의미의 다양성 이해하기.”

“알았어!”

* * *

그런 식으로 정우현의 수업과 권유라의 학습은 계속됐다.

우선은 문학과 철학의 역사를 빠르게 되짚은 뒤, 특정 작품이나 도서를 요약해 공부를 진행했다.

“플라톤 이래 서구의 정신사를 지배하고, 현재로선 과학 문명을 토대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상이 뭐랬지?”

“이성… 중심주의?”

“좋아, 그에 관해 가능한 반론은?”

“으음….”

하고서 권유라가 지난번 정우현의 강의를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성은 필연적으로 무엇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진리를 바탕으로 하는데, 진리는 개념상 비(非)진리 즉 진리가 아닌 것을 설정할 수밖에 없어. 따라서 진리는 그 자체로 옳은 것이기에, 비진리를, 즉 진리의 관점에서 틀린 것들을 억누르게 된다.”

그러고서 그녀가 자신의 노트를 살피며 말했다.

“이처럼 진리라는 개념이 특정 이데올로기나 종교, 또는 사상과 하나가 되었을 때 인간은 종종 정의라는 미명으로 전쟁과 박해를 하게 된다.”

“좋았어.”

정우현이 권유라의 대답에 만족하며 말했다.

“…근데 진짜야?”

“응?”

“이게 진짜냐고. 그렇다면 세상의 진리란 진리는 모두 사라져야 해?”

권유라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하하하하.”

이에 정우현이 웃었다.

“일단은 유라야.”

“응.”

“우리는 단순히 공부하는 중이잖아. 심지어 입시를 위한 공부를.”

“그렇지.”

“그러니까 그렇게 엄청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어. 당장 그런 사상이 있고, 강점과 약점 등 어떠한 내용이 있구나 일단 알고 가면 돼.”

하면서도 정우현이 권유라를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예전보다 실력이 훨씬 늘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분명 좋은 성적을 낼 것 같았다.

* * *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날.

정우현과 권유라는 30일간 함께 학습한 내용을 빠르게 되짚었다.

중간중간 권유라는 정우현의 물음에 거의 막힘없이 답할 수 있었다.

“대단해, 유라.”

“아….”

권유라도 이런 스스로가 조금은 기특해 탄성을 내뱉었다.

“역시 너는 이런 걸 못 하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 안 하는 것뿐이었어. 봐봐, 이렇게나 잘하잖아!”

“…하하하, 다 우현이 너 덕이지.”

“음, 유라야.”

“응?”

“그래도 리딩 시험을 볼 때는 말이야.”

“아, 응.”

“수학처럼 딱 떨어지는 답은 없어. 내가 말했지, 인문학은 해석의 학문이라고.”

“…응.”

“그러니까 보기 중 가장 그럴듯한 것, 말이 되는 것을 찾아. 그게 답이니까.”

“알았어.”

“좋아, 그동안 고생했다, 권유라.”

“…네가 더 고생했지, 괜히 나 때문에….”

하고선 권유라가 순간 감정이 북받쳐 이런저런 말을 더 하려고 하는데, 정우현이 불쑥 말했다.

“아니야. 그런 말들은, 너, 돌아가서 시험 잘 보고, 그때 가서 얘기 나누자.”

“…아.”

권유라가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알았어. …고마워.”

* * *

그리고 1개월 후. 

“...우현아!”

“응?”

미국에서 권유라가 SAT 시험을 치르고 정우현에게 전화했다.

“나 대박 났어!”

하고서 그녀가 기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만점이야! 리딩에서 만점 받았다고!”

그제야 정우현은, 오랜 친구의 입시에 관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고서는 진심을 다해 천천히 말했다.

“축하해, 유라야.”

“꺄아아아아아아!”

권유라는 너무 신나고 기뻐서 소리까지 질렀다.

“….”

그리고 한참이나 입을 다물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감정을 다해 말을 이었다.

“…하, 진짜, 우현아. 넌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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