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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102)화 (102/200)

102화

“…응?”

동생 정다현은 굳은 표정으로 굵은 목소리를 내는 정우현의 모습에 사뭇 위축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오빠의 모습이니까.

“예전에,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지?”

“…뭐?”

정우현의 말에 동생이 가만히 서서는 바닥만 내려다봤다.

오빠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또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기가 조금 겁이 났다.

“뭘 하든, 가족이 먼저라고 하지 않았어?”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이래, 정우현이 가장 우선시하고 있는 가치.

바로 가족.

정우현은 놀라운 능력으로 어디서 무얼 하고 어떤 대단한 성과를 내든 마치 부메랑처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경제적으로도 물론 심리적으로 이미 일찌감치 가족의 품을 떠나 독립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풍요롭게 행복하기.

만약 사랑하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혼자 잘 먹고 잘살자는 마음가짐이었다면, 지금의 정우현은 있을 수 없었다.

물론 정우현은 일찌감치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이와 같은 가치관을 동생에게 교육하고 있었다.

“응?”

잠자코 있는 동생에게 정우현이 답을 재촉하며 한 번 더 묻자, 그녀가 끝내 입을 열었다.

“…맞아.”

“근데 왜 그래? 응?”

하고서 정우현이 눈을 크게 뜨고 조금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현아.”

부드러워진 오빠의 목소리에 동생이 고개를 살며시 들어 정우현의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응.”

동생이 조금은 경청하는 태도를 보이자, 정우현이 표정을 다소 풀고 말했다.

“근데 왜. 요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응?”

“….”

정우현의 물음에 동생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뭐 고민이라도 있어?”

그러자 동생은 역시 또 말없이, 다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 정우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생이 자신에게 이제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털어놓을 것 같았다.

“…뭔데? 뭐?”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이 됐다.

한평생 조용했지만, 누구보다 온화하고 밝게 미소 지으며 가족과 함께했던 동생이다.

그런데 고민이 있다고 하니, 행여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마음이 조금 불안해졌다.

이에 무슨 말을 할까 가만히 동생의 입만 보고 있었다.

이내 그녀가 천천히 작은 목소리로, 그것도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 부정확하게 말했다.

“…진…로.”

“뭐?”

“…진로. 진로가 고민이야, 나중에 뭘 해야 할지.”

“아.”

정우현이 짧게 소리를 내더니 다시 밝은 얼굴이 되었다.

“하하.”

그러고서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

동생은 오빠가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현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나중에 커서 뭘 하고 싶을지 그게 고민이라고?”

“응.”

“그래서 요즘 거실에도 잘 안 나오고 거의 방에만 있었던 거야?”

정우현의 물음에 동생이 역시 부끄러워하더니 끝내 대답했다.

“…응.”

“하하하하하하!”

“학교에서.”

그러고는 그녀가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과제를 줬어. 자신의 장래 희망 직업과 그에 관해 조사하고 발표하기.”

하고서 그녀는 다시 조금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다음 주까지야. 근데 난 하나도 못 했어. 정말 한 글자도 못 썼어.”

“으음.”

정우현이 소리를 내며 동생의 말에 한껏 집중했다.

이제 해결사 오빠의 모습을 보여 줄 때였다.

“다현이 너.”

“응.”

“예전에 병원이 좋다고 그러지 않았어?”

“…응, 맞아.”

오래전, 정우현이 영화를 촬영하고 번 돈으로 동생에게 병원놀이 장난감 세트를 사 준 이래 그녀는 줄곧 병원에 빠져 있었다.

그와 같은 관심은 성장해도 변함이 없었다. 물론 아주 어릴 때처럼 자신의 방을 핑크빛 병원 비슷하게 꾸미는 일은 없었지만.

“그럼, 그쪽으로 쓰면 되잖아?”

“응, 나도 그러려고 했지. 근데 병원에서 일하는 분들도 여러 직업이 있잖아. 간호사 언니들부터 해서, 의사 선생님 등등. 그래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겠는 거야.”

“음.”

생각보다 간단한 고민이었다.

정우현이 잠시 고심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거로 해.”

“…뭐?”

“약사.”

“…약사?”

“응.”

물론 동생은, 병원에서라면 무슨 일을 하든 좋을 것 같았다. 특히나 간호사든 의사든 약사든 흰옷을 입고 열심히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조금 황홀해질 것 같기도 했다. 그만큼 그녀는 그쪽 분야의 사람들을 동경하고 있었다.

“다현이.”

정우현이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응?”

“너, 사람들한테 주사 놓을 수 있어?”

“…아.”

오빠의 말에 동생이 곧장 그 모습을 상상했다. 뾰족한 바늘을 사람의 몸에 찔러 넣는 장면을.

그건 좀, 아니, 어쩌면 많이, 무서울 것 같았다.

“…모르겠어, 좀 힘들 것 같기도 하고….”

“다현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

“나는 널, 좀 알아. 오빠가, 너 아기 때부터 놀아 주고 뭐든 함께했으니 너도 잘 알 거야.”

정우현의 말에 동생은 딱히 부정은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실제 엄마만큼, 아니, 때론 엄마 이상으로 자신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고 일깨워 준 사람이 바로 오빠 정우현이니까.

한편 그녀는 성장할수록 정우현에 관해 생각하면 놀라운 게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오빠가 무척이나 어른스럽고 믿음직스럽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두 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을 되새겨 봐도, 오빠 정우현은 항상 그랬다. 단순히 오빠를 넘어 때론 아빠처럼 때론 선생님처럼 든든하게 그녀를 받쳐 주고 이끌어 줬는데, 오빠 역시 단순히 자신보다 두 살 많은 아이였음을 생각해 보면 의아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래서 이 순간 자신에 관해 말하는 오빠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응.”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야. 좀 힘들 것 같다고? 좀 힘든 정도가 아니라 많이 힘들걸?”

“….”

“너, 네가 주사 맞는 것은 물론 남이 주사 맞는 것도 못 보잖아. 거기에 피 나는 건 더 그렇고.”

그랬다. 동생은 일종의 피 공포증이 있어서, 어쩌다 몸에 상처가 생겨 피가 흐르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몹시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는 다른 사람의 피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영화를 볼 때 조금이라도 잔인한 장면을 보면 또 그랬다. 그래서 그녀는 호러 장르의 영화는 아예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때론 폭력성이 짙은 액션 영화도 보기 힘들어했다.

“그런데 솔직히 의사를 어떻게 해. 간호사도 그렇고.”

“….”

부끄럽게도, 그녀는 한 번도 그렇게 자신의 성향과 연관 지어 의사나 간호사의 일을 생각한 적 없었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무진장 좋았던 병원에서,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감만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환상과 가까웠다.

“그러니까 약사를 하라는 거야. 물론 약사도 의사나 간호사 못지않게 나름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적어도 네가 두려워하는 그런 상황과는 거리가 있을 테니까.”

“….”

동생이 잠자코 오빠 정우현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다가는 한순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이제 좀 생각이 정리됐어? 과제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그러고선 동생이 다소 부끄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 오빠.”

“하하, 고맙긴.”

그제야 정우현도 활짝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나는 네가 다른 일 때문에 그렇게 방 안에만 있나 걱정했었는데. 차라리 다행이다. 별일은 아니라서.”

“…별일 아니라니. 나한테는 엄청 큰일인데.”

“하하, 그래, 그래! 내 말은, 뭐, 우리 다현이가 혹시 남자 친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런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지!”

“헐.”

동생이 깜짝 놀라며 소리를 냈다.

하지만 정우현은 진심이기도 했다. 동생의 나이 열다섯 살. 한창 사춘기로서, 이성에게 관심이 있을 나이니까.

그리고 정우현이 보기에 동생의 외모가 딱히 못나 보이지도 않았다.

전생을 생각하면 성인이 된 동생의 모습은 수수하니 역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생에서는 전생과 달리 어릴 때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부모는 물론 자신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고 성장하다 보니, 훨씬 더 세련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사했다.

즉 또래 남자애들이 은연중에 한 번은 살필 외모였다. 따라서 충분히 남자 친구가 있을 법했다.

“없어.”

하지만 동생이 짧게 한마디 했다.

“그런 거 없어, 관심도 없고.”

정말 관심이 없어 보이는 말투였다.

“으음….”

그 모습에 정우현이 오히려 흥미가 생겨 더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애써 참았다. 한편으로 동생은 슬슬 숙녀가 될 나이이기도 했기에, 오빠로서 마땅히 선을 지키고 존중해야 할 부분도 있었다.

“…그러는 오빠는?”

순간 동생이 물었다.

“뭐?”

정우현 또한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짧게 답했다.

“오빠는 없냐고. 여자 친구.”

“…하하하!”

정우현이 어이가 없어서 그저 웃었다. 자신이 보기에 여전히 한참이나 어린 동생이 이런 질문을 할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응?”

“없다, 나도!”

“…유라 언니가.”

그러자 동생이 슬쩍 정우현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오빠 여친 아니야? 그것도 초등학생 때부터.”

“어허!”

순간 정우현의 입에서 호통이 절로 나왔다.

“아니야, 걔는 친구지!”

“그래?”

하더니 동생이 잠깐 생각하고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라 언니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

그러고서 의외의 말까지 했다.

“유라 언니가 오빠 잘 보고 있으랬어.”

“…뭐?”

“몰랐어? 나랑 연락한다고.”

“아, 그건 알지.”

워낙 어릴 때부터 친구고 서로의 집에서도 수없이 놀았기에, 권유라는 물론 동생 정다현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때론 여자들끼리 볼일이 있다며, 권유라와 동생 단둘이서 놀 때도 있었다.

“아마 오빠보다 나랑 더 연락 자주 할걸? 하여간 오빠.”

“응?”

“근데 나, 갑자기 궁금해진 거 있어.”

“뭐?”

원체 속에 있는 말을 잘 안 하는, 동생이어서 정우현이 더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오빠는.”

“응.”

“사춘기 같은 거 없었어? 주위 애들 보면 장난 아니던데. 특히 남자애들은 더 그런 것 같고.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오빠는 딱히 그런 게 없었던 것 같아서.”

“아.”

당연히 없었다. 사춘기는 전생을 통틀어 단 한 번이면 족하니까.

비록 키가 훌쩍 크고, 목소리도 굵어지고, 몸 여기저기서 거뭇거뭇 털이 나기는 했지만, 사춘기 특유의 심적인 방황이나 번민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시기에, 정우현은 수학 문제를 풀고 자동차를 연구했다. 그것도 아주 잘.

“하하하하하!”

정우현이 짐짓 크게 웃어 보였다. 이럴 때는 아주 어릴 때부터 연기에 몰입하고 배우가 된 게 무척 큰 도움이었다.

“….”

동생은 그런 오빠 정우현을 잠자코 지켜봤다.

“왜 없었겠어!”

정우현이 크게 말했다.

그럴수록 동생은 눈을 더 크게 뜨고 정우현에게 집중했다.

알게 모르게 사춘기를 겪고 있는 자신에게, 오빠의 경험은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았다.

“당연히 있었지! 어느 날은 괜히 내가 싫어지고, 뭔가 하루하루가 의미 없고, 미래는 막막하고, 부모님한테는 괜히 미안하고 그러다가는 또 괜히 싫어지고, 갑자기 아무것도 하기 싫고 막 잡생각만 들고, 짜증 나고, 그냥 삐뚤어지고 싶고 무얼 하든 이게 맞나 생각이 들고.”

“….”

“당연히 있지, 왜 없었겠어?”

동생은, 놀랐다. 거의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오빠에게 이런 고충이 있었다니.

심지어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해 보였다. 즉 오빠 말대로라면, 오빠 정우현은 지독한 사춘기를 앓은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동생이 오빠의 말에 완전히 압도되어서는 조금 겁까지 먹고 말을 이었다.

“…어떻게 지나갔어? 그렇게 힘들었는데…?”

“후… 다현아.”

순간 정우현이 짐짓 비장한 표정을 하고 말을 이었다.

“…응?”

“가족이 있잖아.”

“….”

“가족. 그러니까 엄마 아빠랑 그리고 너, 내 동생 정다현이 나한테 있잖아. 그런데 어떻게 한낱 그런 울적한 감정 따위에 홀로 빠져 있을 수 있겠어. 무조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우리 가족을 위해 훌훌 털고 일어서야지.”

“아아….”

동생이 입을 벌리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하고 정우현이 굳은 표정으로 동생을 보고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오빠는 사춘기를 극복했다.”

“…대단해.”

“그러니까 다현이도 할 수 있어.”

동생의 눈빛이 뜨거웠다.

이 순간만큼 정우현을 존경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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