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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96)화 (96/200)

96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정우현이 말했다.

“순전히 당신이 만들었죠. 해킹 대회 이후, 저는 엘라를 만난 적도, 심지어 엘라가 비트코인을 만드는지도 몰랐는데요.”

“이해 못 하시겠지만.”

엘라가 답했다.

“정말 정우현 님과 그날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답니다.”

“으음.”

정우현은 엘라의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이번 생의 비트코인은 전생보다 1년 빠르게 개발되었음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1년은, 엘라의 말대로 정우현으로 인해 그녀가 앞당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다.

나아가 그녀의 재능과 열정 등 모든 것이 집약된 시간이기도 했다.

“제가 비트코인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정우현 님에게 밝혀진 게 이럴 땐 좋네요. 한껏 고마움을 표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서 그녀가 재차 강조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비트코인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정우현 님은 모르시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어요. 어쨌든 저는 정우현 님 덕분에 한껏 저 자신에 집중할 수 있었고, 성과를 낼 수 있었으니까요.”

하고 엘라가 정우현을 불렀다.

“정우현 님.”

“예.”

“그래서 말인데요.”

그러고서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본론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비트코인 개발자로서, 정식으로 정우현 님에게 부탁드립니다. 정우현 님. 부디 저의 이 프로젝트와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세계 최고의 해커, 아니, 모든 의미에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신 정우현 님이 비트코인 프로젝트에 참여해 주신다면 저로서는 무한한 영광이겠습니다.”

하고 그녀가 조금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동시에 저의 비트코인 프로젝트를, 완성시킬 수만 있다면, 저는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부탁드립니다.”

“으음.”

엘라의 부탁에, 정우현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사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난 사토시 나카모토, 즉 엘라가 안면이 있는 정우현에게 비트코인에 관해 논의하고 싶다며 직접 만날 것을 청했다.

만약 이번 일로 비트코인을 포기하고 싶었다면, 애초 만나자고 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정우현은 이와 같은 부탁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엘라.”

정우현이 한순간 입을 열었다.

“예?”

“답을 드리기에 앞서, 제가 엘라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아, 예.”

엘라가 조금 당황하더니 이내 잠자코 답했다.

일종의 심사였다. 비트코인 프로젝트에 합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정우현의 심사.

무려 비트코인 개발자인 엘라가, 이제 정우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답변을 해야 했다.

“솔직하게 답해 주세요.”

하고 정우현이 날카로운 눈으로 엘라를 바라봤다.

이에 엘라가 긴장하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엘라는, 아나키스트입니까?”

아나키스트 즉 무정부주의자이냐는 물음이 정우현의 첫 질문이었다.

“장차 모든 국가와 중앙 정부가 없는 세계를 꿈꾸고 있습니까?”

“….”

“엘라가 비트코인으로, 모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묻는 질문입니다.”

“…솔직히.”

이에 엘라가 천천히 답했다.

“예, 맞습니다. 저는 인간이 피부색이나 민족, 종교 그리고 사상 등으로 서로를 적대시하고 통제하지 않는 세상을 원해요. 너무 많은 사람이….”

하고 그녀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필시 자신의 조국 즉 독일의 역사와 그에 따른 가족사를 떠올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내 정우현이 답했다.

“비트코인은 그와 같은 세상을 위한 수많은 방편 중 하나입니까? 즉 엘라는 비트코인을 시작으로 어떻게든 세상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고 싶은 건가요?”

“아니요.”

이에 엘라가 곧장 말했다.

“어떤 권력도 통제도 없는 세상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이상적인 만큼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고서 그녀가 모처럼 살며시 미소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 현실 감각은 있다는 말이에요. 나아가 인간의 본성은 항상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 하기에, 국가와 정부가 없어지면 그 빈자리를 다른 무언가가 채우게 되리란 것도 알고 있고요. 역설적이긴 하지만 그래서 제가 만든 게 또 비트코인입니다.”

그러고는 엘라가 눈빛을 반짝였다.

“기본적으로 사이버 세계를 바탕으로 하는, 중앙 관리자가 없는 화폐예요. 즉 그 어떤 개인이나 조직도 이 비트코인으로 스스로를 내세울 수 없죠. 따라서 현실적으로 제가 바라는 건, 이 프로젝트의 성공일 뿐입니다.”

“으음….”

정우현이 잠시 또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는 계속해서 질문을 이었다.

“그렇다면, 엘라는 앞으로의 그 이상을 위해서, 또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는 게 있나요?”

“…아니요, 딱히 없습니다.”

하고서 그녀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이 비트코인 하나면 족합니다. 한데 이 프로젝트의 존폐가 현재 정우현 님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기에, 이렇게 제가 정우현 님을 만나 부탁을 드리고 있는 거고요. 이 외에 저에게 별다른 소망은 없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정우현이 답했다.

이로써 그는 엘라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는 자기 뜻을 피력해야 할 때였다.

“그럼, 제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

“이 세 가지 조건을 엘라가 수락한다면, 저 또한 비트코인 프로젝트에 합류하겠습니다.”

“…아아.”

엘라가 탄성을 내뱉었다.

정우현의 입에서 드디어 프로젝트에 합류하겠다는 말이 나왔으니 그럴 만했다.

실상 정우현이 자신의 부탁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오랜 노력은 모두 좌절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우선 그가 언급할 조건을 들어야 했다. 부디 수긍할 수 없는 조건이 단 하나라도 있지 않길 바라며.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비트코인을 지켜 내고 싶었다. 그만큼 비트코인은 엘라의 모든 것을 다한 결정체였다.

“첫째.”

정우현이 말을 시작했다.

“엘라는 엘라의 신념을 지켜야 합니다. 즉, 비트코인으로 이 이상의 무언가를 하려고 해선 안 됩니다. 비트코인에 관해서 엘라는 영영, 알려지지 않은 개발자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엘라가 자신 있게 답했다. 딱히 조건이라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지금도 그와 같은 결심을 하고 살고 있으니.

“둘째. 비트코인 이외에, 엘라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그 무엇도 해선 안 됩니다. 요컨대 세상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기 위한 모든 행동 및 의사 표현은 금지된다는 말입니다. 혹시 모를 폭력 또는 선동이나, 엘라의 장기인 해킹 같은 행위는 물론이고요.”

“….”

“아시겠습니까?”

정우현이 확답을 원한다는 듯 엘라를 바라보고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답했다.

“…알겠습니다.”

엘라는 조금 당황했다.

정우현의 두 번째 조건은 꽤나 까다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비트코인이었다.

비트코인을 지키는 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좋습니다.”

엘라의 대답에 정우현이 말을 하고는 곧장 다음 조건을 제시했다.

“마지막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 사이 모든 일은 끝까지 비밀에 부쳐져야 합니다. 이 역시 동의하십니까?”

“예.”

엘라가 곧장 답했다. 정우현 이상으로 엘라가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하고 정우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 또한 비트코인 프로젝트에 참여하겠습니다.”

“아아!”

“단 이 세 가지 조건은 끝까지 유효해야 합니다. 셋 중 한 가지라도 지켜지지 않을 시, 엘라의 모든 계획은 영영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 걱정 마세요.”

하고 엘라가 싱긋 웃었다.

* * *

그리고 비트코인에 관한 논의가 시작됐다.

얘기는 간단했다. 우선 정우현에 의해 허물어진, SHA256 암호화 기술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물론 그 시스템은 정우현이 홀로 새롭게 만들기로 했다. 엘라가 아무리 애를 써도 정우현은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정우현 님.”

“아니요, 우리는 이제 일종의 동료가 되었으니 서로에게 단순히 고마워하기보다는 서로를 믿고 함께 나아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 그렇지만 정말 고마워요. 정우현 님으로 인해 저의, 아, 아니, 우리의 프로젝트가 거의 완벽해졌으니까요.”

그러고서 그녀가 잠시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말을 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합니다.”

“예?”

이에 정우현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곧장 답했다.

“…아뇨, 단순히 제 부탁으로 괜히 번거로운 일을 맡으신 것 같기도 해서….”

“아.”

하고서 정우현이 이내 쾌활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솔직히 저도 호기심이 생깁니다. 엘라가 대단한 무언가를 만들었으니까요.”

“…정말인가요.”

“그럼요. 하지만 엘라의 뜻대로, 이게 장차 어떤 특정한 기능을 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엘라가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었고,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기에, 힘을 보태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군요.”

라고는 했지만, 정우현이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그는 미래에 이 비트코인이 얼마나 활성화되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왔다.

즉, 어떤 의미에서든 비트코인은 화젯거리였다. 그리고 그 같은 흐름은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미래를 알고서, 비트코인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폐기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사실을 아는 만큼, 더 완전하게 만들고 싶어졌을 뿐.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아.”

그러자 엘라가 따라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먼길을 오셨는데, 또 돌아가셔야 하니.”

“아닙니다, 편하게 금방 왔습니다.”

전용기를 타고 왔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엘라가 문 앞에 선 정우현에게 다시 고마움을 표하고선 말을 했다.

“우현 님. 정말 고마워요. 기회가 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사례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는데 정우현이 불쑥 말했다.

“아니요, 그러려고 온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하여간 엘라. 이만 가 볼게요. 어차피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될 테니 뭐든 천천히 해도 됩니다. 그럼 잘 계세요.”

그러고서 뒤를 돌았다.

엘라는 그런 정우현의 뒷모습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말없이 오랫동안 바라봤다.

* * *

“도련님!”

베를린 시내의 한 카페.

엄규환이 정우현을 기다리고 있다가 크게 불렀다.

“아, 실장님!”

“아이고, 왜 이렇게 안 오신 거예요? 약속 시간보다 10분이나 늦었다고요, 10분!”

“하하, 고작 10분 갖다가 뭘 그러세요! 하여간 미안해요! 얘기가 길어졌어요.”

“고작 10분이라뇨. 도련님, 전 이 유럽만 오면 몹시 긴장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안 좋은 일도 있고….”

하는데 정우현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선 엄규환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

“에이, 실장님 그 얘긴 안 하시기로 했잖아요!”

“…아, 네, 네. 죄송합니다. 어쨌거나… 그럼, 친구는 잘 만나고 오신 겁니까? 아니, 근데, 아무리 디지털인지 무슨 털인지 하여간 사이버 시대라고는 하지만 도련님이 독일, 그것도 여기 베를린에 친구가 있었나요? 그리고 친구를 보는데, 왜 저더러 따라오지 말라고 한 겁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쩌시려고….”

“하하, 괜찮아요, 괜찮아! 실장님! 이렇게 잔소리만 하실 거면, 다음부터는 아예 혼자 다닐 거예요!”

“…알겠습니다만…. 그래도 걱정이 되네요, 전.”

하고서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는 공항에 도착했다.

그러고서 전용기에 올라타 대한민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

며칠 후.

정우현의 암호화된 이메일 함에 사토시 나카모토, 즉 엘라 로렌츠의 메일이 도착했다.

정우현은 그날 엘라와 함께 비트코인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합의한 후, 다시 암호화된 어나니머스 계정의 이메일을 만들었다. 엘라와 비밀리에 소통하기 위해서다.

‘어나니머스 님.’

둘은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서로의 이름 및 사는 곳 등 개인 정보가 드러나는 말은 이메일을 통해서도 절대 하지 않기로 얘기를 나눴다.

‘어나니머스 님이 돌아가고,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무언가 사례를 해야겠다고요.’

하고 그 밑에는 놀랍게도 비트코인의 특정 지갑 주소와 비밀번호, 그리고 해당 주소로 전송된 비트코인 내역과 한 프로그램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 의미로 우선 100만 개. 100만 비트코인을 드려요. 지금은 비록 거의 가치가 없지만, 제 계획대로라면 장차 적지 않은 가치를 띠게 될 것입니다. 지갑 주소와 비밀번호도 첨부해 놓았답니다. 물론 어나니머스 님에게 비밀번호 같은 건 의미가 없겠지만요.’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또한 약속대로 비트코인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시스템 파일과 키를 첨부합니다. 직접 작동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제가 오랫동안 비트코인을 연구하고 개발했답니다.’

즉, 정우현은 엘라로부터 비트코인 프로그램 자체를 전송받았다. 엘라와 함께 공동으로 비트코인을 손보기 위한, 즉 정우현 또한 비트코인 개발자가 되기 위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얘기는 정우현이 이제 비트코인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고서 엘라는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말로 이메일을 마쳤다.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건 난생처음이라 설레기도 하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정말 고맙습니다. :D 당신의 친구, 사토시 나카모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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