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엘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소수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건가요?”
“예.”
과거 세계 해킹 대회에서 정우현을 만나 무참히 졌을 때, 그리고 시간이 흘러 비트코인 개발자인 자신의 정체를 밝혀낸 어나니머스가 정우현임을 아까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도 평정심을 유지한 엘라가 흥분에 휩싸였다.
실로 그녀의 삶 가운데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요? 정말 소수에 법칙이란 게 있었던 겁니까?”
“예, 엘라. 알다시피 리만이 가설을 제기한 후, 많은 수학 이론이 해당 가설을 참이라고 가정한 채 시작되죠.”
하고 정우현이 엘라를 바라보며 지그시 미소 짓고 말을 이었다.
“한데 다행히도 정말 참이었던 겁니다. 또한 거기서 반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소수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엘라가 차갑게 식어 버린 자신의 커피잔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다가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우현을 보고 입을 열었다.
“…저한테.”
“예.”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음, 그건 안 됩니다, 엘라.”
정우현이 바로 잘라 말했다.
“저는 리만의 가설을 입증하고 소수의 법칙을 발견하면서, 하나 굳게 다짐했습니다.”
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절대 이 수식을 밝히지 않겠다고요. 만약 알려지면.”
순간 엘라가 불쑥 말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암호 체계가 무너지겠죠. 금융 기관, 각국 정부 및 군대의 보안 시설 등등… 모두 단번에 무너지게 됩니다. 즉 현재 인류의 정치 및 경제 시스템이 완전한 혼돈에 빠지게 될 거예요.”
“맞습니다, 엘라. 그래서 알려 드릴 수 없다는 겁니다.”
“….”
정우현의 말에 엘라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만큼은 믿어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얼토당토않은 얘기였다.
그런 식으로 한 명씩 누군가에게 알려진다면, 곧 모든 사람이 소수의 법칙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여기까지 생각에 이르자 엘라가 정우현을 납득하게 됐다.
그러고선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정우현 님이라도 그랬을 것 같네요.”
“음.”
이에 정우현이 답했다.
“소수의 법칙은 이대로 밝혀지지 않는 것이, 다수의 사람에게는 훨씬 좋은 일일 겁니다. 따라서 법칙은 물론 리만의 가설을 입증한 사실 또한, 저는 밝히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누군가가 이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고 해도, 정우현이 모두 함구하면 그만이기에 장차 법칙이 알려질 가능성은 제로였다.
“…역시 그렇군요.”
하고서 엘라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엘라.”
하지만 이내 정우현이 엘라를 불렀다.
“예?”
“저는 오늘 비록 어나니머스로서, 사토시 나카모토를 칭하는 비트코인 개발자인 당신을 만나러 왔지만.”
“….”
“인간 엘라 로렌츠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
정우현의 의외의 말에 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랑곳하지 않고 정우현이 계속 말했다.
“얘기해 주세요, 엘라.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고, 어쩌다가 이렇게, 비트코인이라는 것을 만들게 됐는지.”
“….”
정우현의 진심 어린 물음에, 엘라가 잠시 가만히 있다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그런 걸 듣기 원하세요?”
“예.”
“그렇다면….”
하고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엘라는 타인에게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성향이 아니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데다 믿음까지 가는 정우현이었고, 무엇보다 그가 비트코인의 향방을 결정 지을 중요한 사람이었기에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 굳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정우현이 워낙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기도 했기에, 엘라는 순간 속에 있는 말을 다 하고 싶어졌다.
* * *
“…그랬군요.”
엘라가 자신의 19년 개인사를 말하자 정우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쉽지 않은 얘긴데 전부 말해 줘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엘라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저야말로 이렇게 제가 살아온 얘기를 누군가에게 하는 건 처음입니다만….”
하더니 조금은 부끄러운 듯 시선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뭔가 홀가분하고, 기분이 좀, 음. 나쁘진 않네요.”
그러더니 그녀가 혼잣말처럼 작게 말했다.
“…정우현 님이라서 그런가.”
엘라 로렌츠의 삶은 이랬다.
그녀는 1990년 독일이 통일되는 해, 동독 즉 독일민주공화국 정보부인 슈타지(Stasi) 소속 고위 관료의 딸로 태어났다. 즉 권력자의 딸이었다.
슈타지는 냉전 시절 소련의 KGB에 버금가는 정보기관이었는데, 동독의 거의 모든 국민을 감시한 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엘라가 태어난 해에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면서 슈타지는 해체되는데, 이 사건이 엘라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그 해, 그녀의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다했기 때문이다.
당시 수사 기관은 자살이라며 빠르게 사건을 마무리했으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종의 정치적 이유로 암살을 당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슈타지의 악명이 워낙 높았기에, 통일 후 사람들은 그녀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오히려 손뼉을 치기까지 했다.
물론 남은 가족에게는 악몽 같은 삶의 시작이었다. 엘라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그녀의 가족은 일종의 낙인이 찍혀, 어딜 가서든 손가락질을 당했고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리고 3년 후, 엘라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가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암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즉, 엘라는 세 살의 나이에 완전한 고아가 되었다.
“…힘드셨겠습니다.”
정우현이 그녀의 과거에 관해 언급하며 말했다.
그러자 의외로 엘라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요.”
그러고는 역시 표정의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아요. 아버지는 사진으로만 봤고요. 어머니는 어렴풋한 기억이 있는데, 항상 눈물을 흘리고 슬퍼할 뿐이셨죠. 근데 전, 그게 싫었어요.”
“….”
“살아가는데, 웃을 필요는 없다고 해도, 울지는 말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아주 어릴 때부터 한 겁니다. 어머니처럼 살기는 싫었으니까요.”
하고서 그녀가 그 시절을 잠시 떠올리는 듯 말을 않더니, 한순간 더 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서 고아원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뒤늦게 알았지만, 저는 이모님이 있었어요. 한데 어떤 이유에선지 저를 맡지 않겠다고 한 것 같습니다. 뭐, 키워 봤자 저에게 슈타지 간부의 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으니, 통일된 독일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겠죠.”
“안타깝군요.”
“뭐, 상관없습니다. 인간은 보통,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니까요. 이모는 보통 사람이었을 뿐이고요. 이러나저러나 자신의 삶을 살아야 했겠죠. 어쨌거나 저도 그렇게, 제 삶을 살게 됐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고아원에서 생활을 하게 됐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된다.
엘라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엄청난 천재였다.
“…저의 많은 것들이.”
그녀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로부터 비롯됐다는 생각을 하긴 합니다. 아버지는 슈타지 최고의 정보 요원이었거든요.”
즉, 그녀의 비상한 두뇌는, 부계 혈통에 의함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엘라는 아버지를 훨씬 능가하는 천재였으니까.
거기에 지독한 노력파였는데, 사실 그녀가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을 두고 노력이라고 하기에도 뭐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몹시도 즐겼기 때문이다. 즉 노력이 아니라 일종의 놀이였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정우현과 꼭 같았다.
“어린 나이에 어른들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법을 터득했죠.”
엘라가 말했다.
“생각보다 쉬웠어요. 어른, 아니, 사람들은 보통 단순하니까요. 무언가 대단한 것 즉 보통 이상의 것들이면 누구나 다 열광하고 손뼉을 치죠. 심지어 그 대단함이 한 어린 소녀로부터 비롯됐다면 더욱더 열광합니다.”
그러고서 그녀는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을 이었다.
“부조리하게만 느껴졌던 세상이, 어느 순간 마냥 쉬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2002년. 엘라는 순전히 재미를 위해, 마침 집에서 가까운 베를린 시내에서 개최된 세계 해킹 대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러다가 익히 들은 적 있던 동양의 한 천재 소년 즉 정우현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해킹 대결을 했다가 무참히 지게 된다.
“…처음이었요.”
이 대목에서, 그간 차가웠던 엘라의 표정이 다소 풀렸다.
“제가 모든 걸 다해도, 어쩔 수 없는 벽이 느껴진 건 정말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죠.”
“…하하….”
정우현은 멋쩍어서 그저 웃었다.
“그러고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하고서 그녀가 고개를 살며시 들고 정우현을 바라보며 사뭇 다정하게 말했다.
“정우현 님.”
“예?”
“혹시, 아시나요? 제가 그 당시 정우현 님에게 지고, 한 IT 잡지에 짧게 글을 보냈는데.”
“아, 예, 봤습니다.”
“…역시 보셨군요.”
그러고서 엘라는 조금 부끄러워하다가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예, 저로서는 솔직히 엄청난 충격이었거든요. 지긋지긋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냥 우습게만 생각됐던 세상이, 다가 아니었구나.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즉 한낱 나 따위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또 세상이구나, 하고 처음으로 저 자신을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생각하며 반성이란 걸 하게 된 겁니다.”
“이제야.”
이에 정우현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예?”
“이해가 되는군요.”
“…뭐가요?”
엘라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당시 저는 잡지에 발표된 정보를 토대로 엘라를 찾아, 공식적으로 사과의 뜻을 표하려 했습니다. 어쨌든 그때 친구와 함께 큰 결례를 범해 시합을 고집했으니까요. 한데 곧 엘라가 잡지에 밝힌 이름과 심지어 대회에 남긴 이메일 주소까지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됐죠.”
“….”
“물론 찾고자 했으면 어떻게든 엘라 당신을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했던 것입니다.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뭐, 그러려니 하고 말았습니다.”
“예.”
하고서 그녀가 다시 사뭇 경직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엘라 로렌츠. 이 본명으로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아버지를 떠올렸어요. 그래서 제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고 이름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세상에 극히 소수입니다.”
“그렇군요.”
정우현과의 해킹 대결 이후, 엘라는 가뜩이나 교류하지 않았던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하게 된다.
그러고서 그녀는 자신의 작은 집에 틀어박혀 이제껏 살아온 모든 경험과 그를 뒷받침하고 있는 자신의 가치관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새 삶을 살고 싶었어요.”
엘라가 정우현을 보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동시에 새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고서 그녀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비트코인 프로젝트였어요. 어떤 권력이나 시스템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면서도 익명이 보장되는 세계. 그런 세계를 위해서는 화폐, 즉 비트코인이 필수적이죠.”
이로써 엘라는 전생에 비해 1년 빨리 비트코인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즉 엘라는 2002년 해킹 대회에서 정우현에게 진 후, 일찌감치 이런저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5년, 5년간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와 연구를 지속한 끝에 전생보다 빠른 2007년에 비트코인을 완성하게 된다.
“모두 정우현 님 덕분에 해낼 수 있던 일입니다.”
하고 그녀가 정우현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