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94)화 (94/200)

94화

“Du bist hier. (오셨군요.)”

비트코인 개발자가 은발의 긴 머리를 옆으로 넘기며 정우현을 보고 환히 웃다가는, 순간 빠르게 표정을 고치고 말했다.

엘라 로렌츠(Ella Lorenz).

6년 전 정우현이 권유라와 함께 독일 베를린의 세계 해킹 대회에서 참가했을 때 실력을 겨뤘던 열세 살짜리 세계 해커 챔피언 소녀였다.

그녀가 지금 이렇게 성장해 열아홉 살이 되었다.

즉, 지난해 엘라는 열여덟 살의 나이로 비트코인을 개발했다.

* * *

정우현이 엘라의 집 안 여기저기를 빠르게 둘러봤다.

세계 해커 챔피언 출신에 비트코인 개발자라는 엄청난 이력에도, 집은 평범하다 못해 형편없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원룸에 컴퓨터와 침대, 그리고 냉장고 등 생활에 있어 거의 필수적인 것들만 있었다.

다만 집에 어울리지 않게 책장은 컸는데, 책장엔 프로그래밍에 관한 책 몇 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 만화책이 꽂혀 있었다.

“제 유일한 낙이에요.”

엘라가 일본 만화책을 유심히 보는 정우현을 보고 말했다.

“컴퓨터를 하다가는 만화책을 보다 잠들고. 그게 제 삶이죠.”

정우현은 그제야 엘라가 웹상에서 왜 스스로를 일본인 이름으로 밝혔는지 이해했다.

“그런데 왜.”

정우현이 입을 열었다.

“예?”

“많은 일본 이름 중에 사토시 나카모토. 즉 한자로 하면 중본철사(中本哲史)라는 어색한 이름을 지었죠?”

“아.”

엘라가 잠시 작게 소리를 냈다.

그녀는 어나니머스인 정우현이 집에 찾아와 깜짝 놀랐을 때도 감정을 다스리고 사뭇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과거 어릴 적 해킹 대회에서 정우현을 눈앞에 두고도 그리 놀라지 않은 것처럼 그녀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능했다.

“그건 반은 장난이지만, 반은 또 진심을 담은 이름입니다. 가운데 중에 근본 본. 그리고 철학과 역사.”

하고서 그녀가 조금은 부끄러운 듯 작은 목소리를 낮춰 거의 속삭이며 말했다.

“…제가 만든 비트코인으로, 문명에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고 싶었어요. 중앙 정부가 필요 없는 새 시대의 화폐로써요.”

“…음.”

정우현은 단박에 그녀가 급진적인 사상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한편으로.”

하고 엘라는 다시 아주 잠시 웃어 보이고 말을 이었다.

“무언가 일본 국적의 중년 아저씨처럼 보이고 싶기도 했죠. 왠지 그럴듯해 보이잖아요?”

일본 만화에 빠져 있는 그녀다운 생각이었다.

이에 정우현이 간단히 답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엘라의 말은 계속됐다.

실상 정우현이나 엘라나 서로에게 묻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어나니머스, 아니 정우현 님 덕분에 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네요, 이대로는요.”

“…어나니머스가.”

정우현이 조금은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되물었다.

“저인 줄은 어떻게 알았죠?”

“당연하죠.”

이에 엘라가 아무렇지 않은 듯 답했다.

“오래전, 이 프로젝트를 꿈꾸고 하나하나 준비해 가면서, 홀로 생각했습니다. 만약, 내 정체가 밝혀지면 어떡하지, 하고요. 아시다시피 비트코인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가치 중립적이어야 하죠. 만약 개발자가 세상에 알려지면, 기존의 화폐와 크게 다를 바 없으니까요. 즉 개발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또 다른 정부이자 은행과 같은 화폐 관리자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옳은 얘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비트코인은 장차 수많은 개발자와 함께 출현하게 될 온갖 가상 화폐와 성질이 달랐다.

개발자가 드러나지 않은 최초의 가상 화폐. 새 시대의 화폐가 가능하다면, 이야말로 그에 걸맞은 자격이었다.

“그런데 제 정체가 드러나면 완전한 가치 중립이라는 목적은 달성할 수 없게 되죠.”

그러고서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한편 어쩔 수 없이 현존하는 암호화 기술로 만든 만큼, 이 비트코인이 작동하는 방식에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고 엘라가 잠시 정우현의 시선을 피했다.

“…물론 이렇게나 빨리 무너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하여간 결국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내내 제 걱정은 이 두 가지였어요. 내 정체가 밝혀지는 것과 비트코인의 암호화 기술이 무너지는 것.”

“….”

그러고서는 순간 엘라가 경탄에 가득 찬 눈빛으로 정우현을 바라봤다.

“그래서 생각했죠. 만약 이 두 우려 가운데 단 하나라도 실현된다면, 그런 일을 해낼 사람은, 세상에 정우현 님밖에 없다 하고. …아아.”

하고 엘라가 잠시 말을 중단하고 정우현을 테이블로 안내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비록 구면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인데 제가 실례를 범했네요. 손님이신데, 그것도 무척 귀한 손님이신데 이렇게 오래 서 있게 하고….”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러고서 정우현이 온화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엘라가 정우현을 테이블 앞에 앉히고는 낡은 플라스틱 잔에 주스를 따랐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일이 모두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어나니머스가 정우현 님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확신할 수 있었죠? 말 그대로 엘라는 그저 추측한 것뿐이잖아요?”

하고서 정우현이 처음으로 엘라의 이름을 언급하고는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물론 엘라는 정우현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이 없다. 정우현이 해킹을 통해 알아냈을 뿐.

“제가 어나니머스라는 이름으로 보낸 메일에 엘라는, 어나니머스를 저 즉 정우현이라고 가정하고 다음에 취할 행동을 밝혔습니다. 그것은 실상 어나니머스가 저라는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단순히 추측으로만 그러기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하하.”

엘라가 잠시 웃고는 답을 했다.

“역시 정우현 님이시네요. 물론 오래전, 제가 세계 해킹 대회에서 정우현 님의 압도적인 해킹 실력을 직접 느낄 수 있었죠. 그리고 정우현 님이 푸앵카레의 추측을 입증했고, 자동차 공학에서도 세계적인 성과를 내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정우현 님이 어나니머스의 이름으로 제 정체를 알아내고 비트코인의 해시 충돌을 일으키는 키를 발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고서 엘라가 눈을 크게 뜨고 정우현에게 바짝 다가갔다.

“정우현 님.”

“예.”

“우현 님은 제가 비트코인 개발자임을 아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우현 님이 어나니머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세계 최고의 해커임을 이제 알고 있고요.”

“….”

“그러니까 이제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하고 그녀는 잠시간 말없이 투명하게 빛나는 눈으로 정우현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2001년. CIA 내부망을 해킹해 미국의 9.11 테러를 사전에 예방한 어나니머스도 정우현 님이시죠?”

엘라의 물음에 정우현이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는 한순간 고개를 끄덕이고 웃었다.

“하하하!”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먼저 엘라가 이렇게 묻는 것은 정우현이 당시 CIA를 해킹했음을 나름의 이유로 상당 부분 추론했음을 뜻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엘라의 말대로, 그녀 본인이 비트코인 개발자라는 비밀을 세상에서 오직 정우현만 알고 있었다. 이는 비트코인의 장기적 명암을 결정 짓는 극비 사항이다.

따라서 엘라가 비트코인의 존폐를 결정 지을 수 있는 정우현의 비밀 또한 폭로할 일은 없었다.

나아가 그런 것 다 떠나서 엘라는 한 사람의 비밀을 갖고 남다른 속셈을 품는 음흉한 성격도 아니었다.

물론, 정우현은 그녀의 이 같은 품성 또한 직감적으로 알고서 자신의 정체를 시인했다.

애초 그래서 어나니머스라는 익명의 신분을 최초로 버리고 정우현의 몸으로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기도 했고.

“대단하네요, 엘라!”

정우현이 한참을 웃고는 답했다.

“당시 모든 작업을 마치고, 제가 해킹한 기록 즉 저의 신원을 추적할 수 있는 흔적은 완벽하게 삭제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해킹을 했다는 사실 자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더군요. 그것은 사람의 기억에 남으니까요. 결국, 미 정부는 물론 CIA에서 제 해킹 사실에 관한 기록을 자체적으로 남겼을 겁니다. 그것만큼은 저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해킹을 했습니다.”

즉 정우현은 당시 미국의 9.11 테러를 막기 위해, 결과적으로 자신의 해킹 사실을 남길 수밖에 없게 됐다. 비록 완벽한 익명이긴 했지만, 그 또한 모종의 정보는 정보였다.

엘라 같은 또 다른 천재가 그를 바탕으로 정우현의 정체를 파헤치기 시작했으니까.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그녀가 살며시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수년 전 어떤 이유로 저는 CIA 내부망을 침투하게 됐습니다. 한데 그때 알았죠. 저 이전에 누군가가 먼저 CIA를 해킹했음을. 심지어 엄청난 테러도 사전에 예방했더군요.”

그러고서 엘라는 자신의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음료는 정우현에게 따라 준 주스가 아닌 커피였다.

“덕분에 처음으로 어나니머스의 존재를 알게 됐죠. 그러고서 호기심이 동한 겁니다. 정우현 님이 저를 찾은 것처럼, 저도 수년 전 어나니머스를 찾고 싶었어요. 생각보다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2001년도에 CIA 내부망을 해킹할 실력자가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았거든요.”

하고 엘라가 어나니머스를 정우현이라고 생각하게 된 경위를 빠르게 설명했다.

“CIA 해킹 사건이 있었던 다음 해인 2002년, 저와 정우현 님은 한 해킹 대회에서, 만났습니다. 무려 정우현 님이 세계 최고의 해커라는 타이틀을 차지한 저를 여지없이 이기셨죠. 여기서부터 정우현 님은 어나니머스의 유력한 후보가 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정우현 님은 저를 만나고 러시아로 넘어가 사고를 당했으나, 놀랍게도 위험을 무릅쓰고 체첸 반군으로부터 러시아 인질들을 모조리 구해 냅니다.”

“….”

“물론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이 두 사건만으로도 저는 정우현 님을, CIA를 해킹한 어나니머스로 추정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손해를 감수하는, 이타적이면서도 천재적인 해커. 이는 정우현 님밖에 없거든요. CIA 해킹과 나머지 모든 일이 시기적으로 맞닿은 것도 그렇고요.”

그러고서 엘라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이번에도 어나니머스를 정우현 님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겁니다. 과거 CIA를 해킹한 어나니머스가 정우현 님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 우려했던 대로 제 정체가 밝혀지고 비트코인의 암호가 붕괴되면서 제게 이메일을 보낸 사람이 또 어나니머스라는 이름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하고 그녀가 다시 잠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심지어 결과적으로 보니, 과거 CIA 내부망에 쓴 글과 제게 보낸 이메일의 글투가 상당히 비슷하더군요. 그런데 우현 님.”

“예?”

“이 시점에, 한 가지 더 여쭤봐도 될까요?”

“무엇을요?”

엘라는, 비트코인 개발자답게 호기심이 왕성하고 많은 것에 의문을 품는 성격이었다.

“2001년 당시. 미국에 하이 재킹 테러 시도가 있을 거라는 정보를, 미리 어떻게 입수했는지 궁금합니다.”

“….”

답할 수 없었다.

전생의 경험을 토대로 한 정보였으니까.

“아, 하하. 그저 어쩌다가 알게 됐습니다.”

이에 정우현이 대충 둘러댔다.

“으음….”

그러자 엘라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엘라는 천재다.

정우현이 만약 두 번째 삶을 살게 되지 않았다면, 엘라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천재 중 천재였다.

전생에서도 비트코인 개발자는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실상 정우현의 오랜 친구인 권유라도 지능이 몹시 높아 이따금 정우현이 미래에서 온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니 엘라 또한 정우현의 놀라운 능력에 의문을 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 불가사의하군요.”

“하하하, 그런가요?”

정우현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웃어 보였다.

순간 엘라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모든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저의 프로젝트인 비트코인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제가 작년 말 논문을 처음으로 발표하고, 올해 초 실제 비트코인을 사람들에게 선보였습니다. 한데 그러고서 얼마 되지 않아 정우현 님은 비트코인의 암호화 기술을 붕괴시키는 키를 찾아냈습니다.”

하고 엘라가 정우현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저 또한 SHA256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을 입력해도 256비트의 값으로 변환되기에, 필연적으로 출력값이 같아지는 즉 충돌 현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따라서 현존하는 무작위 연산 컴퓨팅을 통해 의도적으로 충돌 키를 찾고자 하면, 최소 수십 년은 걸리죠. 그에 맞춰 비트코인의 암호화 기술을 업그레이드할 계획이었고요.”

그러고서 그녀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자신의 커피잔을 내려보고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한데 정우현 님이 무척 짧은 시간에 충돌 키를 찾았습니다. 이는 최소 둘 중 하나를 의미해요. 먼저 정우현 님이, 현재로선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양자 컴퓨터를 개발한 것입니다. 양자 컴퓨터를 이용해 기존 컴퓨터로는 오래 걸리는 연산 속도를 대폭 강화한 것이죠. 하지만 설령 양자 기술을 구현했다 한들, 결국 특정 알고리즘 없이 무작위 연산을 행해야 한다는 것에서 이렇게나 짧은 시간 안에 충돌키를 찾았다는 건 역시 또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고 엘라가 다시 고개를 들고 정우현을 바라봤는데, 그녀의 동공이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이제 하나. 정우현 님이 비트코인의 해시 충돌을 일으키는 특정 알고리즘을 의도적으로 만든 뒤, 해당 알고리즘을 이용해 키를 찾는 프로그램을 작동시킴으로써 처음부터 정확하고 목표 지향적인 연산을 수행한 것이죠. 하지만 이를 위해선 엄청난 수학적 전제가 뒤따라야 하는데….”

하고 말하는데 정우현이 쾌활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하, 역시 훌륭하네요, 엘라.”

그러고서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확해요, 아주 정확합니다.”

그러자 엘라가 순간 사시나무 떨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숨을 거칠게 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예.”

“…리만의… 가설을 입증한 것입니까?”

이에 정우현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소수의 법칙을 발견한 건가요?”

그러고는 끝내 한마디 짧게 답했다.

“예.”

“…아아!”

엘라가 그만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