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일론이 몇 마디 의례적인 말을 하다가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근데 말이다, 우현.”
“예?”
“이번에 너희 회사 우후가 특허를 잔뜩 등록했더구나.”
“아, 예! 그렇지 않아도 한번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워낙 바빠서 잠시 잊고 있었네요! 일론! 감사해요! 일론이 작년에 준 엔티 모터스의 초기 모델 덕분에 연구 개발이 무척 순조로워요! 정말 감사합니다!”
“…으음.”
일론이 짧게 탄식을 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잘된 일이구나. 하지만 우현.”
“예?”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이 전기차 업계는 먼저 생태계가 조성되는 게 중요하다.”
“아, 네.”
“그런데 이번에 너의 우후가 전기차와 관련된 온갖 기술을 특허 등록해서 다른 전기차 업체들은 연구 및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거지.”
다른 전기차 업체라고 표현한 일론이지만, 해당 업체는 현재로서 하나였다. 바로 일론이 이끌고 있는 엔티 모터스였다.
“아, 그래요? 일론! 저희는 아무래도 후발 주자이다 보니 그럴 거라 생각은 못 했는데, 음.”
하고 정우현이 짐짓 고심하는 듯 소리를 냈다.
“아니다, 아니야. 우후의 기술은 무척 놀라워. 정말 작년에 새롭게 시작한 전기차 업체가 맞는지 솔직히 의문이다.”
“하하,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일론이 준 엔티 모터스의 초기 모델이 연구에 무척 큰 도움이 됐어요!”
“…그래.”
하고서 일론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는 정우현을 불렀다.
“우현.”
“네?”
“우후의 이름으로 등록된 특허를 모두 철회해 줄 수 있겠니?”
“…철회요?”
정우현이 사뭇 놀란 목소리로 답했지만, 실은 모두 예상한 대로였다.
우후는 엔티 모터스의 기술을 추월했다. 그러고서 전기차 개발과 관련된 핵심적인 기술을 모두 국제 특허로 출원했으니, 엔티 모터스 입장에선 이제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우후가 등록한 기술 사용을 포기하고 자체적으로 다른 방식의 기술을 개발하든가, 아니면 해당 기술을 사용하고 특허권의 존속 기간인 20년간 앞으로 모든 전기차를 생산하는 데 있어 우후에 특허 사용료를 지불하든가.
엔티 모터스 측에는 첫 번째 방식이 이상적이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정우현이 등록한 기술이 워낙 많은 데다 또 핵심적이어서 그 모두를 사용하지 않고 완전히 다른 자체적인 기술로 전기차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 철회. 철회해 다오, 우현. 애초 내가 초기 모델을 직접 주기도 했으니, 그걸 생각해서라도….”
하는데 정우현이 불쑥 말했다.
“안 돼요.”
“…응?”
“죄송하지만, 철회할 수는 없어요.”
“왜지?”
“일론도 아시겠지만, 기술이야말로 우리 같은 스타트업 회사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죠! 그러니 신기술을 개발하면 특허를 등록하는 게 일반적인 일입니다. 그건 엔티 모터스도 마찬가지고요!”
“….”
옳은 말이었다. 엔티 모터스도 이미 여러 기술을 특허 등록해 놓았다. 전생을 기준으로 일론이 특허를 모두 공개하는 시점은 수년 후, 그의 회사가 업계 선두의 위치를 확고히 했을 때니까.
그럼에도 일론이 정우현에게만 특허를 철회하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러니까 철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희 회사처럼 그렇게 다양하고 많은 기술을 전방위적으로 몽땅 등록하지는 않았다.”
라고 말했지만, 엄밀히 하면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 한 거였다. 엔티 모터스의 수준이 아직 그 정도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쎄요, 저희는 그저 성과가 있는 대로 출원했을 뿐인데요.”
“아니, 우현. 그럼 내가 우리 회사의 모델을 그냥 준 건 대체 뭐가 되니. 다른 말로 하면, 네가 나에게 빚이 있는 게 아니냐.”
“아니죠!”
정우현이 곧장 또렷하게 답했다.
“당시에 일론은 정말 말 그대로, 어떠한 조건도 없이 무상으로 해당 모델을 양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수차례 고맙다는 말을 했고요. 하지만 이와 우리 회사의 특허 등록 건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아!”
일론이 크게 탄식을 했다.
뼈 아픈 실수였다.
일론은 정우현이 이토록 빨리 자신을 뛰어넘어 커다란 걸림돌이 될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자신의 천재성에 지나치게 빠진 나머지, 눈앞의 정우현을 경시한 오만이 빚어낸 일이었다.
즉, 일론은 스스로 워낙 대단하다고 느꼈기에 그깟 모델을 하나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해도 달라질 건 전혀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그로써 자신은 남들보다 앞서 있고 뛰어나다는 확신을 하며 만족하기만 했다.
“하지만 일론.”
순간 정우현이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으음?”
일론이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답했다.
“일론의 뜻대로 특허를 철회할 수는 없지만, 지난 일에 관해 사례를 할 수는 있어요. 엔티 모터스의 초기 모델이요. 당시에도 저는 돈을 주고 기술을 구매하러 일론의 회사를 찾아갔습니다. 한데 일론이 참 고맙게도 무상으로 모델을 줬고요.”
“….”
“그래서 이렇게 말이 나온 김에 뒤늦게나마 적지 않게 사례를 하고 싶습니다.”
“필요 없다.”
일론이 말을 내뱉었다.
“특허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다 소용없는 일이다. 그깟 돈은 모두 그때뿐이야. 중요한 건 전기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원천 기술과 그를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연구 개발, 그리고 생산이지. 너도 알겠지만, 그 모두, 오로지 돈만으로는 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정우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안타깝지만 제가 이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일론.”
“….”
일론이 잠시간 말을 않더니, 순간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정으로 나를, 넘어서겠다는 거구나, 우현.”
“으음, 일론.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단지 세계 최고의 전기차 회사를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그 일환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특허를 등록했을 뿐이고요.”
“…일단, 알았다.”
하고서 일론이 몇 마디를 더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 * *
불가피한 일이었다. 일론의 요청대로 특허 등록을 철회하고, 모든 기술을 개발할 때마다 타 업체와 공유하는 건 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무엇보다 일론부터 그러고 있지 않으니.
일론의 말마따나 전기차 생태계를 조성하고 파이를 키워야 하는 건 조금 나중의 일이다. 그 전에 자신의 회사가 생존하는 게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살아남아야 환경을 만들든 기술을 공유하든 뭐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아직은 미지의 영역인 전기차 기술을 최대한 많이 개발하고, 자신의 것으로 확고히 해 업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게 중요하다.
현시점 정우현의 우후나 일론의 엔티 모터스나 다 그와 같은 과정 중이며, 다만 우후가 훨씬 앞섰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정우현은 일찍이 예상했고, 일론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둘 사이 큰 차이였다.
일론과 전화 통화를 하고서 며칠 후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엔티 모터스의 대주주인 그가 마침내 사이가 좋지 않은 창립자를 밀어내고 스스로 회사 경영 일선에 나선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그는 회사의 이름도 바꿨다. 사명은 엔티 모터스의 모터스를 삭제하고 그저 엔티가 되었다.
“오우, 아주 단단히 준비하나 보군?”
이탈리아인 엔지니어가 그 소식을 접하고선 이렇게 말했다.
“하하, 우리도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이에 정우현이 엔지니어들을 둘러보고 크게 말했다.
“헤이, 보스! 걱정 말라고! 현재로선 우리가 반년은 겨울잠을 자도 엔티보다는 앞설 거다!”
“아아, 안 돼요!”
정우현인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 마음. 그런 마음이 가장 위험한 겁니다! 여러분, 일론의 엔티가 원래 우리보다 기술이 훨씬 앞섰다는 것을 잊지 마요! 하지만 우리에게 따라잡혔죠! 근데 이런 일이 역으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고서 그가 재차 강조했다.
“그러니까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쳐선 안 돼요!”
“어이쿠! 하하, 알았다고 보스! 무슨 농담 한마디를 못 하네!”
정우현이 작업장 한가운데에 있는 우후 최초의 전기차 초기 모델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말씀드렸다시피 2008년! 2008년 안에 우리는 이 초기 모델을 바탕으로 완벽한 전기차를 만들어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선보일 것입니다! 즉 드디어! 우후의 이름을 단 전기차가 완전한 제품이 되어 시장에 팔린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때까지, 제대로 한번 해 봅시다!”
“좋았어!”
“알겠습니다!”
정우현의 외침에 엔지니어들이 모두 크게 대답했다.
이렇듯 우후의 작업장은 항상 엔지니어들이 얘기 나누는 소리와 기계음, 그리고 이따금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 * *
2007년 말.
정우현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권유라에게 전화를 받았다.
“오, 유라야!”
“안녕.”
작년 초 권유라가 미국의 학교에 진학한 이래 둘은 이따금 전화 통화를 하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한여름이나 겨울이 되어서 권유라가 방학을 맞이하면 잠깐 한국에 왔다 갔고, 그럴 때마다 그들은 구태호와 함께 셋이서 만나며 오랜 우정을 확인하고는 했다.
한데 이번 겨울에는 권유라가 특별 과제를 해야 한다며 한국에 올 수 없다고 했다.
그 소식 이후 처음으로 나누는 통화다.
“잘 지냈어, 유라야?”
“그럼, 잘 지냈지! 너는? 전기차 연구는 잘돼?”
“하하, 응! 순조로워!”
“…그래, 우현이 네가 마음먹은 분야니까. 물론 잘 되겠지.”
그렇게 권유라가 여전히 조금은 아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하, 너는 학교생활은 어때?”
“재밌어. 해외 친구들도 사귀니까 좋고.”
“그렇구나.”
“아, 근데 우현아.”
“응?”
“너 그거 봤어?”
“뭐?”
하는 정우현의 물음에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비트코인.”
“…응?”
“비트코인이라고, 웹상에서 어떤 일본인인지 하여간 굉장히 흥미로운 논문을 하나 발표해서, 우리 학교에서 요즘 화제가 되고 있어.”
권유라는 물론 미국에서도 영재 학교를 다니고 있다. 모든 과목을 두루 가르쳤던 한국 영재 학교와 달리 이번에는 아예 그녀의 강점을 살린 과학 전문 영재 학교였다. 따라서 과학과 관련된 각종 새로운 소식을, 그녀는 빨리 접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정우현은 오로지 전기차에만 몰두하고 있었기에 모를 수밖에 없었다.
“전자 화폐래. 금융 기관이나 정부 등 중앙 관리자가 필요 없는 화폐. 나도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논문 직접 읽어 보니까 좀 그럴 듯하더라?”
“…아, 그래?”
정우현은, 물론 전생의 경험으로 비트코인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트코인이 대체 뭔지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 등에 관해선 알지 못했다.
심지어 이번 생, 현시점 등장한 비트코인이라는 개념은 이전에는 다뤄지지 않았기에, 학술적인 자료에도 없는 게 당연했다. 즉 학습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었으니, 초창기 사람들이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비트코인이 훗날 엄청난 가치를 띤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우현은 비트코인에 관해 투자 측면으로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미 자산이 적지 않게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 전기차를 연구하는 게 훨씬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단순히 투자해서 자산을 불리는 것보다는 스스로 직접 무언가에 몰입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혹은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이바지하는 것에 훨씬 큰 재미와 깊은 의미를 느꼈다.
“응. 넌 전혀 모르고 있구나.”
권유라가 정우현의 떨떠름한 대답에 이렇게 말했다.
“하하, 뭐, 나도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얘기니까!”
물론, 그는 모른 척할 뿐이었다.
“하여간 이 얘기도 하고 안부도 물을 겸 전화했어.”
“그래, 유라야.”
하고서 둘은 얘기를 더 나누다가는 전화를 끊었다.
* * *
호기심이 동했다.
전생에서야 그저 비트코인이란 게 있고, 엄청 비싸게 거래가 되는구나 하고 넘어갔지만, 이번엔 다르다.
비트코인이란 걸, 이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일단 권유라가 알려 준 사이트를 찾아 논문부터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는 와중 한편으로 조금 의아했다. 지금은 2007년. 실제 비트코인이 이렇게나 빨리 만들어졌던가 의문이 들었다.
사실, 그의 물음은 옳았다. 전생에서 비트코인 논문은 최초 2008년 말에 발표된다. 한데 지금은 2007년 말.
즉, 이번 생에서 비트코인은 전생보다 1년 더 빨리 개발됐다.
그리고 놀랍게도 여기에, 정우현이 관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