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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88)화 (88/200)

88화

“현재 에이치 자동차 소속으로는.”

정우현이 사장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유롭게 전기차 연구 및 생산이 힘들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으음….”

정우현의 말에 사장이 생각에 빠졌다.

솔직히 그는 전기차에 관한 확신이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당장 정우현이 만든 최첨단 엔진 WH-X를 탑재한, HX시리즈를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기존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입지를 확고히 할 계획이었다.

그에 맞춰 회사는 온통 HX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아무리 정우현의 뜻이라 한들 갑작스레 전기차 연구 개발을 안건에 올렸다가는 경영진은 물론 주주들에게도 좋은 소리를 들을 리 없었다.

“….”

사장이 좀처럼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정우현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저는 여기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장님.”

“…너는.”

사장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예?”

“우리 회사의 이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대 주주이기도 하고….”

“….”

“그런데 어떻게 물러나겠다는 거냐.”

회사의 책임자인 사장.

그는 정우현의 사임도 사임이지만, 그 이후의 회사가 더 걱정되기도 했다.

“아, 이사직은 그냥 사임하면 되고요.”

타인의 뜻으로 이사직을 상실하는 해임은 상법상 주주총회의 의결로 결정되는 것에 반해 사임은 딱히 요건이 없었다.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는 것이니만큼 얼마든지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제 지분인데.”

“…그래, 지분.”

사장이 사뭇 긴장하며 답했다.

정우현은 에이치 그룹 회장으로부터 주식을 전량 증여받아 에이치 자동차 총주식 수의 20%를 가지고 있는 최대 주주다.

한데 그런 그가 모든 주식을 일시에 전부 시장에 팔아 버리면 주가의 하락을 피할 수 없다. 즉 직간접적으로 회사가 흔들릴 게 뻔했다.

일찍이 에이치 그룹 회장이 증여 조건으로 2년간 주식 처분 금지를 제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회장은 정우현이 주식을 증여받자마자 모두 현금화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불가피하게 처분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새 회사를 설립하려면 자본금이 필요하니까요.”

“…역시 어쩔 수 없구나.”

하면서도 사장이 빠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룹의 유력한 후계자이자 에이치 자동차 2대 주주 및 사장으로서, 20%나 되는 정우현의 지분을 두고 이런저런 계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우현이 곧장 그 점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사장님.”

“…응?”

“제 지분에 관해 생각하시는 거죠?”

사장이 정우현의 직접적인 물음에 조금 당황하다가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이렇게 하시면 돼요.”

정우현은 물론 방법을 생각해 뒀다. 자신이 회사에서 나와도, 에이치 자동차의 주식 가치를 최대한 지키는 한편 사장에게도 득이 되는 방법을.

“우선은 내일 당장 제가 회사 이사 및 최대 주주에서도 물러날 거라고 발표를 하세요.”

“….”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가 곧 전기차 회사를 설립할 거라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에이치 자동차는 제가 만들 전기차 회사와 파트너 관계가 될 것이라고 밝히시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예요! 저는 비록 회사에서 나가지만, 에이치 자동차 출신인 건 변치 않습니다. 그런 제가 전기차 회사를 설립하고 이와 관련해 기술 협력을 할 업체를 선정한다면 출신 회사인 에이치 자동차 말고 어디가 또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그런 식으로 발표를 하시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가의 하락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정우현이 에이치 자동차에서 나가게 된 마당에, 해당 회사의 주식 가치를 고려해야 할 법적인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가 수년간 몸담았던 조직이고, 그곳에서 자동차의 기초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익혔으며, 결정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큰 도움을 받은 정든 곳이었다. 물론 친구 권유라와 사장인 그녀의 아버지 나아가 회장인 할아버지와도 개인적으로 연이 있는 회사라는 것도 이 같은 판단을 하는 데 크게 한몫했다.

“으음….”

사장이 그의 말에 더욱더 고심했다.

하지만 정우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다음이 중요한데요. 그렇게 발표를 하고 나서 제 지분을 사장님과 에이치 계열사가 우선적으로 인수해 가시면 됩니다.”

“…나랑 계열사가?”

사장이 생각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예, 물론 꼭 그러실 필요는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사장님에게 이득이에요. 첫째, 제 지분이 시장에 마구 쏟아져 나옴으로써 주식 가치가 대폭 하락하는 걸 막을 수 있고요. 둘째, 사장님과 사장님을 따르는 계열사가 지분을 늘려 회사의 지배 구조를 더욱 확고히 할 수도 있습니다.”

하고서 정우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게 제가 생각한 최선입니다. 그렇게 하면 제가 회사에서 물러난다는 내부 정보가 발표된 후의 거래라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고요. 이래저래 모든 이들이 최대한 만족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요컨대 정우현은 에이치 자동차 내 자신의 지위와 자산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오고, 사장 및 계열사는 정우현의 지분을 받아 입지를 더욱 탄탄히 하고, 주주는 주식 가치의 하락을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일반 주주로서는 세계 최고의 인재인 정우현이 회사를 떠나게 됨으로써 단기적으로 주가의 하락에 따른 손실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수년 전 에이치 그룹 회장이 에이치 자동차 내 자신의 지분 전부를 외부인인 정우현에게 양도했기 때문에 벌어진 불가피한 일이다.

어쩌다가 한순간 에이치 자동차 최대 주주가 된 정우현이 에이치 자동차를 위해 평생 해당 주식을 보유해야 할 의무 같은 건 없으니까.

“…아아.”

계속 고심하던 사장이, 정우현의 말에 어느 정도 걱정이 해소됐는지 순간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우현아. 네 말대로 하면 큰 문제는 없겠지. 하지만 개인적으로 단순히 내가 우리 회사의 사장이나 대주주임을 떠나서, 참 아쉽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네가 우리 곁을 떠난다니.”

“예, 저도 아쉽습니다.”

정우현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제 갈 길이 있으니까요.”

“….”

사장이 정우현의 말에 잠시간 말을 않았다.

그러다가는 한순간 오른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손이었다.

“고맙다.”

정우현 또한 손을 내밀어 악수하자 사장이 말했다.

“대략 3년. 너와 함께한, 짧지만 놀라운 시간이었다. 물론 지금이라도 네가 마음을 돌려 우리와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이니 이렇게 작별을 한다.”

하고서 사장이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 고마워. 네 덕분에 우리 에이치 자동차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일류 회사가 됐다. 심지어 엔진 부문에선 업계를 아예 선도하게 됐지.”

정우현의 HW-X 즉 세계 최초의 HCCI 엔진은 물론 특허 등록이 됐다. 이에 뒤늦게 비슷한 방식으로 엔진 양산에 들어간 세계 유수의 자동차 업체는 에이치 자동차에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게 됐다.

거기에 WH-X를 탑재한 HX시리즈는 다양한 신모델이 나올 때마다 대히트를 쳐 매출이 계속해서 상승했다.

이에 주가 또한 상승해 현시점 에이치 자동차의 시가 총액은 정우현이 이사에 취임했을 당시보다 무려 세 배나 커졌다.

이 얘기는 정우현의 자산 또한 증여 당시 2조 원에서 현재 6조 원에 달한다는 뜻이다.

“주주들은 안타까워하겠지만, 너의 공로가 명백하니 한편으로는 좋은 마음으로 이해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너의 놀라운 기술을 계승해 우리가 더 잘하면 되니까.”

이 말도 전적으로 옳았다. 기존 주로서는, 정우현의 사임으로 당장 주가가 하락했다고 마냥 불평하기도 뭐하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 회사의 폭발적인 주가 상승이 모두 정우현으로부터 비롯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정우현이 사임한다 해도 그가 개발한 엔진 WH-X는 여전히 에이치 자동차의 것이고, 회사는 해당 엔진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더 발전된 내연 기관의 자동차를 선보일 수 있다.

즉 정우현은 에이치 자동차에 놀랍도록 진보된 기술과 그에 따른 드높은 평판 그리고 막대한 이익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남기고 회사를 떠나는 셈이었다. 

실상 일찍이 에이치 그룹 회장이 자신의 지분을 모두 증여한 이유 중 하나도 이 같은 결과를 위해서였다. 즉 정우현이 회사에 큰 공헌을 한 만큼 회장도 더 이상 아쉬울 게 없었다.

심지어 정우현이 독립해 설립할 자동차 회사는 내연 기관의 자동차를 생산하지 않는 만큼 에이치 자동차와 당장 경쟁할 수도 없다.

이에 회사나 주주들 입장으로는 조금이나마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정우현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우현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갑자기 회사를 떠난다고, 더군다나 보유한 주식을 모두 처분하겠다고 밝혀 싫은 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사장은 최대한 자신을 억누르며 정우현과의 작별을 받아들이고 좋은 소리만을 했다.

“하하, 우리의 연은 여기까지인가 보구나.”

“아니요, 사장님.”

정우현이 모처럼 활짝 미소 지어 보이며 답했다.

“유라가 있잖아요. 제 친구이자 사장님의 따님인 유라!”

“…그래.”

하고 사장이 순간 아까보다 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유라한테도 얘기했니? 우리 회사를 떠날 거라고?”

“예.”

“…그래서 그렇게 말이 없었군.”

사장이 최근 권유라의 모습을 떠올리고 짧게 말했다.

“유라는.”

정우현이 말했다.

“잘할 겁니다. 언제든 어디에서든요.”

“하하.”

사장이 조금 허탈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너랑 있을 때야 그랬지만, 뭐. 잘 해내기를 바랄 뿐이다.”

* * *

다음 날 에이치 자동차는 즉각 정우현의 사임 건을 발표했다.

그러고서 최대 주주에서도 물러난다고 밝혔다.

이에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것은 물론 주주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다만 계획대로 정우현이 새롭게 전기차 회사를 설립하고, 그를 바탕으로 에이치 자동차와 파트너 관계를 유지할 것이며, 정우현의 지분은 에이치 자동차 측이 대량 매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덕에 주가가 곤두박질치는 것은 막았으나 소폭의 하락은 면치 못했다.

에이치 자동차에는 이제 더 이상 정우현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만든 세계 최고의 내연 기관 엔진 WH-X와 그를 탑재한 HX 시리즈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서 정우현은 계획대로 에이치 자동차 내 자신의 지분을 전량 처분했다.

정우현이 가지고 있던 지분의 70%는 에이치 자동차 측이 매수했으며 나머지 30%만 시장에 팔렸다.

이로써 정우현은 약 5조 원에 달하는 유동 자산을 갖게 됐다.

동시에 다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히야, 시간이 참 빨리 갔습니다.”

해가 진 저녁.

에이치 자동차 기술 이사였던 정우현의 작업장 앞.

엄규환이 정우현과 함께 짐을 정리한 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작업장을 보고 말했다.

“그러게요.”

“하하, 도련님. 여기서 참 대단한 일을 이루셨지 않습니까? 몇 개월 내내 밤낮으로 출퇴근하고 손은 물론 얼굴에까지 기름때 묻혀 가며 세계 최고의 엔진을 탄생시키셨죠! 하하하!”

정우현이 그 순간을 추억하며 마지막으로 작업장을 한번 둘러보고 뒤로 돌며 말했다.

“이제는.”

“예!”

정우현의 말에 엄규환이 크게 답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때입니다. 더 놀랍고 뜻깊은 미래가 우릴 기다리고 있어요!”

“하하, 좋습니다, 좋아요!”

엄규환의 큰 목소리가 달빛이 비치는 하늘 위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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