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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87)화 (87/200)

87화

“뭔데? 응?”

하고 권유라가 정우현을 재촉했다.

평소 그녀는 답답한 건 참지 못했다.

“응? 우현아! 얼른 말해 봐!”

한데 정우현이 뜸을 들이며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하니 거의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나.”

“…응?”

“회사에서 나오려고.”

“….”

“에이치 자동차에서 독립하려고.”

하고서 정우현이 권유라를 한번 살피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일 당장 사장님한테 얘기할 거야. 근데 그전에 너한테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만나자고 했어.”

권유라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을 들은 것 같았기 때문에.

차라리 정우현한테 네가 싫다거나,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집적적으로 듣는 게 더 나았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그 둘은 회사라는 연결 고리로 어떻게든 계속 함께하게 되니까.

사실 권유라는, 중학교 진학 과정에서 정우현과 떨어지게 됐음에도 그다지 상심하지 않았다.

정우현이 아빠의 회사인 에이치 자동차의 이사니까, 마음만 먹으면 회사와 관련해 어떻게든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청천벽력 같은 정우현의 말에 그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유라야.”

“….”

“권유라.”

권유라가 계속 말이 없자 정우현이 연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응?”

“왜 우리 회사를 떠난다는 거야?”

“아, 그건….”

하는데 그녀가 불쑥 말했다.

“내가 싫어서지?”

“뭐?”

“내가 싫어서 아빠 회사를 떠난다는 거잖아! 내가 보기 싫어서!”

“…유라야, 그럴 리가 있겠어.”

권유라는, 물론 알고 있었다.

정우현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회사를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녀는 정우현의 말이 믿기지 않아 짧은 순간 별의별 상상을 다 하며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그럼 왜? 왜 그러는데…!”

하고 소리치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것도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 정우현이 팔을 뻗어 자신의 옷 소매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줬다.

그러자 권유라가 잠시 잠자코 있으면서도, 이내 훌쩍이며 다시 물었다.

“…응? 왜? 왜 가는 거냐고….”

“내 회사를 만들 거야.”

정우현의 말에 권유라가 잠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는 붉게 물든 눈을 크게 뜨고 재차 물었다.

“회사?”

“응.”

“…무슨 회사?”

“자동차.”

하고 말하자 권유라가 더 믿을 수 없다는 듯 정우현을 바라봤다.

정우현은 그런 그녀를 위해 좀 더 상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회사를 만들 거야. 하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만들던 그런 엔진이 아니라 전기를 동력으로 하는 전기 자동차를 생산하는 회사를 설립할 거야. 그래서 이렇게 에이치 자동차를 떠나기로 결심했어.”

“….”

권유라가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코맹맹이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회사에서 만들면 되잖아? 아빠한테 말해서 전기 자동차를 생산하겠다고…?”

“아니야, 유라야.”

정우현이 그런 물음은 예상했다는 듯 빠르게 답했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고려해야 할 요소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 그래서 생각 끝에 이렇게 독립하기로 결정했어. 그리고 지금 너한테 가장 먼저 알리는 거야.”

“….”

권유라가 정우현을 주의 깊게 봤다.

단호했다. 아주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해 보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권유라는 정우현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본 그의 모습, 무언가를 하나 결심하면 결코 뜻을 꺾지 않고 끝까지 해내고 마는 모습.

그 모습을 지금 정우현이 하고 있었다. 즉 어떤 무엇으로도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정우현이 에이치 자동차를 떠나리란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눈물이 더 하염없이 흘렀다.

그야말로 살아생전 이렇게 서러웠던 적이 있었나 생각될 정도로 엄청나게 울었다.

실연(失戀)을 당한 사람의 마음이 이런 걸까.

“…아아아!”

결국, 권유라는 크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고서 순간 앞에 있는 정우현을 와락 안아 버렸다.

“…나는!”

하고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네가 나 보자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나왔는데…! 너 만날 생각에, 옷이고 화장품이고 전부 새로 사서…. 잔뜩 꾸미고 나왔는데….!”

“….”

“…근데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정우현의 코끝에 향기가 감돌았다.

권유라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확실히 오늘 그녀가 사뭇 달라 보이기는 했다. 평소보다 훨씬 화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성스럽기까지 했다.

한데 그런 그녀가 울고 있다.

그것도 오래전 그녀를 알게 된 이래, 가장 슬픈 얼굴로.

“미안해, 유라야.”

정우현 또한 그녀를 끌어안고 말했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어서.”

“….”

“하지만 전부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에게만큼은 전부.”

그의 말에 권유라가 이제는 아예 정우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한동안 계속 그렇게 울었다. 그칠 줄을 모르고.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권유라가 좀 진정이 되었다.

물론 정우현이 내내 그런 그녀의 등을, 마치 아이 달래듯 부드럽게 쓰다듬기는 했다.

이윽고 그녀가 얼굴을 그의 몸에서 살며시 떼더니, 눈물 젖은 얼굴로 정우현을 바라봤다.

그러고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나, 다음 주에 미국으로 가는 거 알지?”

“응.”

권유라는 입학이 결정된 미국의 한 중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이제 한국을 떠나야 했다.

“…하, 네가 나한테 만나자고 해서, 내가 무슨 생각까지 했는 줄 알아?”

하고 이제는 거의 체념한 듯 그녀가 맥 빠진 미소를 지어 보이고 물었다.

이에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아니.”

“사실은 일찌감치 나랑 같은 학교에 원서 넣었다고. 그래서 중학교도 같이 다니게 될 거라고.”

“…아.”

“그런 상상까지 했는데 말이지.”

그야말로 권유라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정우현과 더 멀어지게 됐다.

“그리고 언젠가는….”

하고 그녀가,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숨을 거칠게 쉬더니 애써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너랑 에이치 자동차를 함께 이끌어 나갈 거라 확신했어. 너랑 나랑, 어른이 되면, 아빠의 회사를 이어받아 세계 최고의 자동차 회사로 우뚝 솟게 하겠다고. 그게 나의 간절한 소망이었는데….”

하고 그녀가 잠시 눈을 감았다.

“이젠 꿈도 꿀 수 없게 됐네.”

더 이상 그녀의 눈에서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순간 다시 눈을 떠 정우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전에 없이 더 강렬해져 있었다.

“우현아.”

“…응?”

“이제 잠시, 아니, 어쩌면 오랫동안 널 못 보게 될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아.”

“아주 어렸을 때 너와 함께했을 때부터.”

하고서 그녀가 정우현을 다시 살포시 안았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 자세 그대로 권유라가 두 눈을 감고는 읊조리듯 말했다.

“널 좋아해.”

* * *

회사는 곧 난리가 났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에이치 자동차 본사 사장실.

사장이 깜짝 놀라서는 크게 소리쳤다.

“정 이사! 아니, 우현아아아아!”

정우현은 오랜만에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사장실로 찾아갔다.

물론 사장은 그런 그를 미소 가득 띠고 맞이했으나, 이내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정우현이 회사를 관두겠다고 했다.

“응? 농담이지?”

“아니요, 사장님. 진심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이제 에이치 자동차를 떠나려 합니다.”

“…아니, 왜!”

사실, 좀 의외였다.

왜냐하면 권유라가 사장인 아버지에게 이미 전부 말을 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관련해 집에서 일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가족들이 보기에 그녀가 한순간 유달리 말수가 적어지고, 기운이 없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부모는 그저 그녀가 당장 해외 진학 및 출국을 눈앞에 두고 있기에 긴장이 되어서 그런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권유라는 정우현의 퇴사를 곱씹고, 또 곱씹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부모에게는 해당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정우현이 떠나기로 한 마당에 미리 알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우현의 의사를 어쨌든 존중하고 싶기도 했다.

사실 그것이 그와 오랫동안 함께하며 정우현을 대하는 그녀의 방식이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그녀였지만, 단 한 번도 정우현의 뜻을 거스른 적 없었다. 무엇을 하든 결국 정우현이 원하는 대로 했고, 그런 그녀는 잠자코 그를 응원하고 지지하고는 했다.

그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믿을 수 없게도 정우현이 아빠의 회사를 떠나 자신과 멀어지게 됐지만, 그녀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그를 역시 또 지지하고, 언젠간 또 곁에 오기만을 바랄 뿐.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에 미국으로 가는 게 잘됐다고도 생각했다. 홀가분하게 타지에서 새롭게 잘 생활하고 자신에게 집중하다 보면, 더 좋은 모습으로 정우현과 재회하리라 막연한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응? 우현아! 우리 회사가 네 덕분에 이제 막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거듭났는데, 왜 떠난다는 거냐? 응? 연봉이 적어? 아님? 뭐? 복지가 부족해? 해 줄게, 원하는 대로 다 해 줄게!”

하고서 사장은 정우현의 답을 듣지도 않고, 당장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기라도 할까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 우선 집! 너희 집! 입지는 좋지만 어쨌든 낡고 평수도 좁은 아파트 아니냐! 그래, 그래! 내가 지금과는 비할 수 없는 훨씬 좋은 집 얼른 한 채 마련해 줄게! 그리고 차! 그래 차! 명색에 국내 자동차 회사 임원이니 다른 해외 자동차 타고 다니기 눈치 보였지? 그럴 필요 없어! 암, 없고 말고! 말만 해라! 내가 얼마든지….”

“고맙습니다만.”

끝없는 사장의 말에 정우현이 결국 중간에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그러고서 드디어 회사에서 나가는 이유를 밝혔다.

전기 자동차 회사를 직접 설립하겠다고.

그 다음 그렇게 결심하게 된 경위를 자초지종 설명했다.

“….”

이에 사장은 다행히 정우현의 말을 경청했다.

“일단 오랫동안 국내 업계를 지배하고 있는 우리 에이치 자동차의 사장으로서 말이다, 우현아.”

그러고서는 이내 답을 했다.

“예.”

“너의 말을 들으니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왜 하고많은 차 중에 하필 전기차냐? 응? 업계를 선도하겠다는 뜻은 알겠는데, 이 자동차가 괜히 100년 넘게 내연 기관으로 돌아간 게 아니에요. 다 이유가 있다는 거지. 즉 기술이고 뭐고 아예 쪽박을 찰 수도 있다는 말이다. 기껏 만들었는데, 아무도 안 산다고 하면 어떡할래? 그리고 둘째.”

“….”

“…정 그런 차를 만들어 보고 싶으면, 우리 에이치 자동차에서 만들면 될 게 아니냐? 응? 당장 대량 생산은 못 해도, 네가 이미 우리 회사 성장에 입증하고 기여한 부분이 너무 커서, 계속 주장하면 어떻게든 실험적으로 한 대를 만들어 볼 수 있을 거다. 그러다가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으면, 생산도 차차 늘려보면서 천천히 시작하자는 거야, 우현아.”

“아니요.”

정우현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러고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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