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미국에 도착 후 정우현은 브래드와 시간을 더 보내다가 약속된 날 NIT에 방문했다.
NIT는 정우현의 강연에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뒀다.
수학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대학이 세계 최고의 수학자를 맞이하는 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어마어마했다.
정우현은, 총장은 물론 학과장, 그리고 여러 교수의 환영을 받고서 곧장 교내에서 가장 큰 강의실로 향했다.
그곳은 강의실이라기보다는 커다란 돔 형태의 홀에 가까웠는데 수용 인원이 천여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홀은 완전히 꽉 차 있었다.
실상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애초 운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일찌감치 선착순으로 참석 인원이 마감됐기 때문이다.
“와아아아!”
이윽고 강의실에 정우현이 들어섰고,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일어났다.
정우현이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에도 사람들의 함성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는 끝내 조용해진 강의실 내부.
“공부를 잘하는 분들만 계시는 줄 알았는데.”
정우현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목소리도 커야 NIT에 올 수 있는가 보군요.”
“하하하하하하!”
정우현의 농담에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정우현입니다.”
정우현이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세계 최고의 공과 대학인 이곳 NIT에서, 이렇게 강연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와아아아아!”
정우현의 말에 사람들이 다시 소리를 질렀으나, 금세 작아졌다. 그가 본격적으로 강연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 * *
강연은 길지 않았다.
수학에 관한 얘기는 서두에 짧게 한 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이에 한 중년의 남자가 먼저 손을 들었다.
그는 자신을 교육학 교수라고 소개하며, 정우현이 어떻게 이렇게 이른 나이에 여러 방면에서 좋은 성과를 냈는지 방법을 물었다.
“솔직히요.”
그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답했다.
“재미 있지 않았다면, 1초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사람들이 정우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연기하고, 수학 문제를 풀고, 엔진을 만드는 것 모두 재미가 없었다면 단 1초도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고서 그가 마이크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심장 소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평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러다가는 한순간, 아, 이거다 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을 살펴야 합니다. 그 순간 내가 무엇에 집중함으로써 나의 가슴이 이렇게 뛰는지 즉각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고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말을 이었다.
“보통 그 순간은 엄청나게 빨리 지나가요. 알다시피 시간의 속도는 개인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흘러갑니다. 한데 그 가슴이 뛰는 무언가에 집중하면 엄청나게 빨리 지나가죠. 쏜살같달까요.”
“정우현 님.”
그때 백인 여학생 한 명이 손을 들며 정우현을 불렀다.
“예?”
“자기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이 둘 중 무얼 해야 하나요?”
정우현이 잠깐 생각하고 답했다.
“오래 할 수 있는 것을 하세요.”
“….”
그의 말에 여학생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잠자코 있었다.
“잘하는 것이든 좋아하는 것이든, 한 분야에서 성과를 내려면 결국 오래 지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방금 말한,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무언가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도, 결국 그래야만 오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고서 정우현이 조금 더 알기 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만약 잘하는 무언가를 한다 해도, 억지로 계속해야 한다면 시간은 더디게 가고 결국 오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좋아하는 무언가를 한다 해도,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에 계속 실망하게 된다면 이 역시 결국 오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잘하는 것이든 좋아하는 것이든 오래 할 수 있는 것을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학생이 이제는 조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른 편에 있던 흑인 남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이에 정우현이 그를 바라보고 말했다.
“예, 말씀해 보세요.”
그러자 남학생은 짧게 자기소개를 하고는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다고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영재, 드물게는 천재 소리를 듣고 자라죠. 마치 우현 군처럼요.”
하고서 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내 나이를 먹고 더 큰 무대로 나아가면, 더 이상 자신이 영재나 천재 같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치 여기서 가장 어리지만, 가장 똑똑한 우현 군의 강연을 듣고 있는 평범한 우리처럼요.”
“하하하!”
남학생의 말에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그럼에도 남학생은 표정의 변화 없이 사뭇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궁금합니다. 우현 군이 말한 가슴이 뛰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심지어 오래 지속했음에도 사람들의 결과는 천차만별이니까요. 누구나 다 우현 군처럼 노력해도 어린 나이에 세계 최고의 학교로 일컬어지는 우리 학교에서 강연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에 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남학생의 날카로운 질문에 정우현이 미소를 띠고 말했다.
“우선 정확한 분석이십니다.”
그러고서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는 사실 우리 인간의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담담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것은 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유전적 형질과 주어진 환경에 의해 적지 않게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찍이 이를 두고 삶이 불공정하다고 하고 때론 부조리하다는 어려운 표현까지 합니다. 반대로 오히려 이야말로 우주의 신비라는 등 고양감에 가득 차 약간은 종교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고서 정우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일찍이 한 철학자가 말한 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선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단지 제가 아는 건 어떤 인간도 자신의 출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 가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죠.”
하고 조금은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우현의 말에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만약 자신이 다른 어떤 이보다 좀 더 지능이 높은 유전적 형질을 갖고 태어났거나,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일종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다른 누군가는 일절 받지 못한 행운의 선물이요.”
하고서 정우현이 전생에서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만났었던 염라대왕을 아주 잠깐 떠올렸다.
“그러고서 그 선물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여력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알고 있는, 올바른 삶의 거의 유일한 방식입니다.”
짝짝짝짝!
정우현의 말에 사람들이 순간 손뼉을 쳤다.
그러자 정우현이 다시 한번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저절로 이뤄지지는 않아요. 제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무언가를 최대한 빨리 찾아내 집중하고 오래 지속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선물 꾸러미를 크기에 걸맞게 끝내 풀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삶은 다시 공평해지고 조리에 맞으며 그렇게 신비롭지도 않게 되죠.”
하고서 그가 조금은 장난스러운 눈빛을 하고 입을 열었다.
“노력과 성과. 원인과 결과.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과학의 법칙이니까요.”
“하하하하하!”
한껏 진지하게 말을 하던 정우현이 갑작스럽게 농담을 하자, 청중이 긴장을 풀며 다시금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그러고는 누군가가 행복에 관해 또 물었다.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했다.
이에 정우현 또한 좀 더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글쎄요, 행복이라면, 조금 다른 얘기가 될 것 같은데요. 행복이라는 것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느끼는 심리적 만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따라 자신의 삶에 주어진 선물의 크기, 즉 재능이나 환경과 꼭 비례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하고 그가 싱긋 웃으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아무리 작은 선물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무척 크게 느껴질 수 있다는 말이죠. 반대로 엄청난 선물도 누군가에게는 작게 느껴질 수 있고요. 그런 면에서,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욕망의 크기가 무한하다면, 결코 만족이란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고서 정우현이 잠시 시각을 확인하고서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겸손에 이어 감사라는 마음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얘기는 기회가 되면 다음에 이어 보겠습니다.”
“아아아아아!”
그러자 사람들이 아쉽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좀 있으면 청소년 시트콤 하는 시간이거든요. 제가 아직 좀 어려서, 그런 걸 봐야 좀 행복해지고 그러네요.”
“하하하하!”
* * *
정우현의 강연은 성황리에 끝이 났다.
수학에 관한 무척이나 무거운 주제의 스피치가 될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정우현은 청중들과 함께하며 때론 웃고 때론 함께 가슴 아파하는 등 마치 즐겁고 유익한 대담(對談) 같은 강연이었다.
이를 보며 NIT 총장은 또 아쉬워했는데, 정우현이 자신의 학교에 교수로 부임했다면 수학적 성과도 성과지만 학생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련님.”
한편 정우현의 강연을 뒤편에서 한국 기자들과 함께 잠자코 지켜보는 한편 모니터링까지 하고 있었던 엄규환이 강의실에서 나와 차로 돌아가는 정우현과 함께하며 그를 불렀다.
“예?”
“…대단하시네요.”
“하하, 뭐가요?”
“…어쩜 그렇게 말을…. 잘하시는지. 생각도 엄청 어른스럽고요.”
정우현의 강연은 미국 현지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도 주목했다. 이 중 오직 미국 및 한국 공영 방송사만 정우현과 NIT에 허가를 받고 촬영을 할 수 있었다.
한데 한국 방송엔 정우현의 강연이 한국어로 동시 통역되어 방영됐다.
엄규환은 물론 한국어 방송을 들어 강연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하, 명색에 NIT에서의 강연이니까 애써 어른스러운 척을 한번 해 봤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야.”
엄규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건 노력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죠.”
하고 그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고는 말을 이었다.
“으음, 유라 아가씨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뭐가요?”
“도련님이요. 아주 가끔, 미래에서 온 것 같다고 하잖아요, 유라 아가씨가.”
“…아, 하하….”
“정말 그런 거 아닙니까? 아니면 인생을 두 번째 사신다거나….”
“….”
즉각 말도 안 된다며 마구 웃으며 답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맞는 말이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정우현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하하, 실장님 재밌으시네요!”
“으음….”
“만약 그렇다면 제가 실장님보다 나이가 더 많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아아, 그런가요?”
엄규환이 그건 생각 못 했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정우현이 잠시 생각하더니, 순간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에헴, 엄 실장!”
“….”
“여기서 꾸물대고 뭐 하는 겐가? 배고프니 얼른 호텔로 돌아가세!”
“도련님, 지금 뭐 하시는 건지….”
“하하! 실장님이 저더러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니냐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일흔이 훌쩍 넘은 어르신 정우현이 되어 봤습니다!”
“….”
엄규환이 다시 말이 없자 정우현이 재차 할아버지 흉내를 내며 말했다.
“예끼! 얼른 움직이지 않고 뭐 해?”
“…도련님.”
결국, 엄규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냥 없던 얘기로 하죠. 제가 요즘 SF 영화를 너무나 많이 봤나 봅니다.”
“하하하하하!”
그러고는 엄규환이, 미국에서 렌트한 차에 탑승했다.
이에 정우현도 얼른 뒷좌석에 따라 탔다.
뜻깊은 하루가 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