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솔직히.”
김민정 교장이 말을 이었다.
“재작년 정우현 군이 에이치 자동차의 이사로 취임했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말이 있었습니다. 우현 군을 조기 졸업시켜야 하는 게 아니냐고요.”
“아.”
“하지만 비상무이사인 데다, 결정적으로 우현 군이 학업에도 소홀함이 없어 계속 학교를 다니는 데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죠. 하지만.”
하고서 그녀가 정우현을 자랑스러워 하는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잡아둘 수 없습니다.”
“….”
정우현이 잠시 잠자코 있었다.
막상 학교를 떠나야 한다니 다양한 생각과 감정이 들었다.
“우현 군.”
“예.”
“입학식 때 제가 한 말 기억하세요?”
“….”
“우리 한국 영재 학교는 뛰어난 학생들의 잠재된 재능을 꽃피움으로써, 국내를 넘어 세계적 인재를 양성한다고 했죠.”
정우현도 그날이 선명히 기억났다.
오래전이지만, 설렌 마음으로 학교에 와 처음으로 친구들과 선생들을 눈앞에 두게 된 날.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우현 군에게는 우리 KGI가 이미 소명을 다했습니다. 우현 군은 현재 누가 뭐라 해도 세계적인 사람이니까요.”
그러고서 교장은 강렬한 시선으로 정우현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한마디 했다.
“장차 우현 군의 행보가 곧 역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 * *
이것으로 정우현의 KGI 졸업이 결정됐다.
이에 가장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구태호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정우현이 학교에 남길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우현아.”
구태호가, 벤치에 앉아 가만히 운동장을 바라보는 정우현의 이름을 불렀다.
“아, 태호구나?”
이런저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던 정우현이었지만, 구태호가 나타나자 자연스레 표정이 밝아졌다.
“응.”
하고서 구태호가 정우현 옆에 앉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얘기 들었어. 너 졸업한다고.”
“아, 응. 하하. 무조건 나가야 한다고 그러네?”
“….”
구태호가 역시나 아쉬워하며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는 한순간 다시 정우현의 이름을 불렀다.
“우현아.”
“응?”
“우리.”
하고서 그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영원히 친구지?”
의외의 물음에 정우현이 잠시 가만히 있다가는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
“….”
정우현의 웃음에 구태호는 정작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들리는 친구의 말에 구태호도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당연하지!”
하고서 정우현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호야.”
“응?”
“지난 6년. 나, 우리 학교에서 참 많은 일을 겪고 많은 걸 느꼈지만.”
“…응.”
“내가 그중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뭔 줄 알아?”
“….”
정우현이 환히 웃으며 친구를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바로 너. 너랑 유라를 만나 함께했다는 거.”
“아….”
“그게 제일 소중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 내가 무슨 수학 문제를 풀었든, 무슨 자동차 엔진을 만들었든 너희랑 함께한 시간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구태호는 감동한 듯 말을 잃었다.
“그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
하고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구태호도 정우현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태호야.”
정우현이 순간 팔을 뻗어 친구와 어깨동무했다.
“우린 친구야. 변함없이 영영.”
그럼에도 구태호는 정우현의 말에 앞으로 다가올 작별이 더 실감이 나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야 했다.
13년의 삶 중 반을 같이 지냈다. 더군다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아기 때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삶을 친구 정우현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더 아쉬움이 컸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그러니까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정우현의 외침에 구태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는 끝내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크게 말했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 * *
그리고 해가 바뀌어 2006년.
KGI 졸업식.
정우현과 권유라를 포함해, 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구태호와 달리 권유라는 함께 졸업하게 된 정우현에 관해 아쉬움이 덜했다.
왜냐하면 아빠의 회사에서 언제든 함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와아아아!”
한편 KGI 졸업식 날 놀라운 사람이 찾아왔다.
바로 세계적 톱스타 브래드 퍼트였다.
“헤이, 우우우우우!”
여전히 즐거운 모습으로, 다만 얼굴에 이전에는 없던 주름살이 있는 등 중년의 느낌이 더한 브래드 퍼트의 등장에 KGI 학생들은 물론 선생들도 깜짝 놀랐다.
물론 주름살이 늘었다는 건 과거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정우현만 알아볼 수 있었다.
“하하하! 잘 지냈습니까!”
브래드 퍼트가 정우현의 아버지 정기석을 보고 반가워서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오우, 브래드! 그럼요! 하하하하!”
아버지도 즐거워서 크게 웃었다.
“어머, 제인!”
한편 어머니 황희진은 브래드 옆에 있는 체구가 작은 금발의 여성을 보고 바로 인사를 했다.
지난날, 캘리포니아 브래드의 별장에서 어머니와 함께하고 친절을 베풀었던 제인이었다.
“아아, 잘 지내셨어요?”
몇 년 만에 본 제인은 한국어가 더 늘었다.
이제는 발음만 들으면 한국인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하하하, 반가워요!”
“으음.”
브래드가 강당 내 몰려 있는 학생들을 보고 어머니에게 말을 붙였다.
“저기 우가 있는 겁니까? 아직 안 보이는군요.”
물론 제인이 옆에서 즉각 통역해줬다.
“네, 저기요, 저기 있잖아요!”
어머니의 손을 따라 브래드가 금세 정우현을 발견했다.
그는 학생들과 섞여 교장 선생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한편 정우현은 브래드가 자신의 졸업식 참석을 위해 한국에 오리란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와 먼저 연락을 나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 졸업식이 진행 중이기에 아는 체를 할 수 없었다.
“…우현아.”
한데 옆에 있던 권유라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저기.”
그녀가 강당 우측 상단 객석에 금발의 중년 미남을 슬며시 보고 말을 이었다.
“브래드 퍼트 있다…!”
“하하, 응.”
“…너 때문에 온 거지?”
권유라는 물론 영화 <인크레더블 킹 보이>로 정우현과 브래드 퍼트가 연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둘이 얼마나 가까운지는 모르고 있었다. 정우현이 따로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래드 퍼트가 이렇게 정우현을 위해 졸업식에 참석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대박이다.”
권유라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 * *
졸업식이 끝나고 정우현이 곧장 한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브래드으으으!”
너무나 보고 싶었던 브래드 퍼트였다.
“와아, 하하하하하! 우우우!”
브래드 또한 기뻐하며 정우현을 번쩍 들어 옛날처럼 목말을 태우려 하다가는 순간 멈칫했다.
정우현의 키가 워낙 커졌기 때문이다.
“오우, 우. 엄청 컸구나!”
“당연하죠! 하하하하!”
정우현과 브래드는 물론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 왔다.
하지만 브래드가 이렇게 한국에까지 와 정우현을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조만간 네가 날 업고 다니겠구나!”
브래드가 훌쩍 커 버린 정우현을 위아래로 보며 말했다.
“하하, 설마요!”
“자, 자.”
아버지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멀리서 귀한 손님도 왔으니 어서 사진 찍읍시다!”
그러고는 자신의 아들 주위로 사람들을 서게 하고서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와우, 와우!”
브래드가 정우현 옆에 서고는 잊지 않고 크게 말했다.
“킴취!”
“…하하하하하하!”
사람들이 깔깔대고 웃었다.
한편 가족 및 친인척끼리 사진 촬영이 끝나고 학생들끼리 또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우현아!”
물론 권유라가 얼른 정우현 곁에 달려왔다.
“오오.”
브래드가 그 모습을 보고 흥미로운 눈빛을 하더니 씨익 웃으며 정우현에게 말했다.
“우!”
“예?”
“네 여자 친구니? 아까 졸업식 때도 계속 옆에 있던데.”
“하하하.”
정우현이 웃으면서 답했다.
“아녜요!”
“…그래? 왜? 슬슬 하나 있어야지.”
“자기는!”
옆에 있던 제인이 얼른 말했다.
“무슨 벌써 여자 친구야!”
“왜 난 네 살 때부터 애인이 있었다고.”
하고서 브래드가 제인을 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마지막 사랑이야, 제인.”
“하하하하!”
정우현이 재밌어서 즉각 크게 웃었다.
오랜만에 브래드의 농담을 옆에서 직접 들으니 몹시 행복했다.
* * *
정우현은 졸업식 후 브래드와 제인에게 한국 구경을 시켜 줬다.
언론은 KGI 졸업식에 참석한 톱스타 브래드 퍼트를 뒤늦게 조명했다. 그의 한국 방문이 공식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 한국 여행을 마치고는, 브래드가 다시 그의 전용기인 빅 이글에 올라탔다.
한데 정우현도 같이 탔다. 함께 미국으로 가기 위함이다.
“그래서 칸은 아름다웠다는 거지?”
전용기 안.
브래드는 정우현의 단편 영화 <자승차>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예!”
“멋지다!”
그러고서 그는 익살스럽게 얼굴을 찡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섭섭한데! 아니, 어떻게 그렇게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영화를 찍을 수 있지!”
정우현은 브래드와 종종 연락했지만, 영화 얘긴 따로 하지 않았다.
애초 단편에 학교 과제이기도 했고, 또 회사 일로 바빠 영화 얘기까지 하기엔 경황이 없었다.
“하하하, 미안해요!”
“나도 못 받아 본 칸에서의 상을 우현이 네가 받았구나!”
하고서 그가 껄껄 웃으며 손뼉을 크게 쳤다.
사실 브래드는 세계적인 배우임에도 상복(賞福)이 없었다.
마치 한국에서의 김도진처럼 매력은 있어도 심오한 연기를 선보일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하, 브래드!”
이에 정우현이 크게 말했다.
“브래드도 꼭 원하는 상을 받게 될 거예요!”
“정말?”
하고 브래드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자신은 솔직히 확신이 없다는 듯.
“헤이, 우. 솔직히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법은 알아도, 콧대 높은 심사 위원들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방법은 모르겠다.”
“으음….”
정우현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브래드는 진짜 그렇게 될 거예요. 제 말을 믿어요.”
그러고서 그가 자신의 가장 오랜 친구인 그를 바라보고 무언가 깊이 마음을 먹었다.
“그나저나 우.”
순간 브래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붙였다.
“예?”
“총장의 제안은 거절하기로 했다고?”
“아, 예.”
“회사 때문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어차피 다니던 학교도 떠나게 된 마당에 굳이 또 다른 학교에 있어야 하나 생각하게 됐어요.”
정우현은 결국 네바다 공과 대학의 교수직을 거절했다.
“그래도 네가 좋아하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잖아? 그것도 각종 지원을 받으며.”
“에이, 꼭 학교에 있어야만 공부할 수 있나요.”
하고서는 정우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학교 밖에 재밌는 게 훨씬 많다고요!”
“하하, 그건 그렇지.”
브래드가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난 놀랐다, 우. 뭐, 나야 네가 단순히 배우인 걸 떠나서 훨씬 크게 되리라 일찌감치 생각했지만, 수학이니 자동차니 그렇게나 빨리 두각을 낼 줄은…. 하하, 꿈에도 몰랐다.”
“하하, 저도 그랬어요! 근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벌써부터 강연 같은 걸 하러 가고 말이야.”
정우현이 브래드의 전용기를 함께 타고 미국에 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먼저 NIT에서 교수직을 거절하는 대신 해당 학교에서 강연을 한번 하기로 했다. 물론 총장이 거듭 부탁해 마련한 자리였다.
그러는 한편 정우현은 장차 자신의 새 계획과 관련해 미국의 한 신생 회사를 둘러볼 계획이기도 했다.
실은 이 회사 방문이 이번 미국행의 본 목적이었다.
드디어 그가 KGI 졸업 후의 진로를 대략 정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