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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80)화 (80/200)

80화

정우현과 일행은 프랑스에 있게 된 김에 며칠을 더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사실 정우현은 곧장 한국으로 가고 싶었다. 애초 영국에서 있었던 시간까지 하면, 유럽에 온 지 이미 꽤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유라가 어떻게 오게 된 유럽이냐며 좀 더 있다 가자고 주장했고, 결국 그들은 그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정우현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영국에서처럼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이 없을까 에이치 자동차 프랑스 지점에 들러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바로 제동을 걸었다.

“아니야.”

또 권유라였다.

“우현아, 좀 쉬어. 어떻게 한국에서든 이곳 유럽에서든 일, 일, 일. 일할 생각만 하니? 우리 그러지 말고 관광지도 가고.”

그러면서 그녀가 슬며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백화점도 가고 그러자! 응?”

“…음.”

“프랑스! 여기 프랑스라고! 낭만과 예술의 나라! 그러니까 좀 즐기자!”

“그래요, 도련님.”

유럽에서도 잠자코 정우현을 따랐던 엄규환이 권유라를 따라 오랜만에 한마디 했다.

“가끔 기분 전환하는 것도 좋습니다.”

권유라와 엄규환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자동차 회사의 이사로 취임한 이래, 정우현은 단 하루도 휴식다운 휴식을 한 적이 없었다.

가만히 누워 있었을 때도, 엔진이나 공장 등 회사와 관련된 이것저것을 끊임없이 생각하다가는 잠이 들기 일쑤였다.

물론 그는 그것대로 재밌다며 즐기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유 없이 지내는 게 또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주 오랜만에 권유라에게 이끌려 파리 시내에 놀러가 쇼핑을 즐겼다.

“하하하하! 좋다, 좋아!”

하고서 권유라가 물 만난 고기 마냥 고가의 명품 브랜드를 이것저것 마구 샀다.

“….”

정우현은 좀 놀라서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물론 정우현도 자산이 부족하지 않아, 무언가를 살 때 가격을 크게 고려할 필요 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렇다고 권유라처럼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천만 원 하는 물건들을, 마치 동네 할인 마트에서 천 원짜리 물건을 고르듯 아무렇게나 사지는 않았다.

근데 권유라는 거리낌이 없었다.

처음 정우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사치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좀 더 고심해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대한민국에서 한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 가문의 손주로 태어나, 아기 때부터 말 그대로 공주 대접을 받은 사람이 그녀다.

즉 자본주의 시대의 공주답게, 태생부터 그녀는 세계 최고의 물건들에 둘러싸여 자랐다.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낭비벽이 심해 보이는 명품 소비가, 그녀에게는 그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우현아, 뭐 해! 너는 왜 하나도 사지 않고!”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는 권유라가 한순간 뒤로 돌아서는 말했다.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내가 몇 개 골라 줄까?”

“아, 아니.”

하고는 정우현이 구태호를 따라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나 갈 걸 후회했다.

그래도 아무거나 하나 골라 볼까 시선을 돌리고 있는데,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이에 곧장 전화를 받았다.

“Hello? (여보세요?)”

외국에 나와 있는 만큼 그는 영어로 말했다.

그러자 낯선 남자가 역시 영어로 답했다.

“정우현 군 핸드폰 맞습니까?”

“예.”

하는 정우현의 귀에 또 다시 기쁜 소식이 들렸다.

* * *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언젠가 듣게 될 소식이라고, 막연히 한번 생각하고 말았다.

다만 워낙 오랜 시간이 걸려 까맣게 잊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정우현이 필스상(Pields)을 수상하게 됐다.

1936년부터 시작된 필스상은 국제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수학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 상을 정우현이 수상하게 됐다.

물론 지난 2001년 그가 학교 숙제로 푸앵카레 추측을 입증한 업적에 따른 상이었다.

이 얘기는 그동안 세계의 수학자들이 정우현의 논문을 끊임없이 검증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즉, 이로써 정우현이 푸앵카레 추측을 완벽하게 입증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무슨 일이야, 우현아?”

권유라가 전화를 끊은 뒤 잠시 표정이 바뀌어 아무 말이 없는 정우현을 보고 물었다.

“….”

“응? 무슨 일 있어? 말해 봐, 우현아!”

쇼핑의 기쁨도 잠시 권유라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정우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큰일 났어.”

심지어 그가 순간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왜?”

권유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우현이 이토록 심각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건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

“…무슨 일이야? 우현아.”

가슴이 콩닥거렸다. 너무나 소중한 사람인 정우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몹시 걱정이 됐다.

“나.”

“응.”

“스페인 마드리드로 오래.”

“…왜?”

“상 받으러. 필스상.”

“….”

권유라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순간 얼마나 걱정했는데.

이런 장난을 치다니.

심지어 정우현은 일찌감치 연기에 통달한 배우.

완벽하게 권유라를 속일 수밖에 없었다.

“…어?”

근데 정우현이 권유라의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그녀의 눈이 붉어지는 것을 넘어, 급기야 눈물이 방울져 흘렀다.

“…유라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아, 나는 깜짝 놀라게 하려고.”

투두둑.

순간 권유라가 양 손에 쥐고 있던 명품 쇼핑 백들을 모조리 땅에 떨어트렸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몹시 기분이 좋아, 그 무거운 쇼핑 백들을 경호원들에게도 들지 못하게 하고 자신이 직접 가지고 다녔던 권유라다.

한데 정우현의 장난에 몽땅 팽개치고 울게 됐다.

이에 경호원 중 한 명이 곧장 땅에 떨어진 쇼핑백을 주우려 했으나, 다른 한 명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를 말렸다.

분위기 상 자신들이 개입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유라야.”

정우현이 그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권유라는 눈물을 뚝뚝 흘릴 뿐 미동도 않았다.

이에 정우현이 가만히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순간 마음을 먹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안해, 유라야. 내가 장난이 너무 심했지.”

이유야 어쨌든 친구가 울게 됐으니, 그녀를 달래야 했다.

“…바보.”

이에 권유라가 결국 한마디 했다.

정우현이 기쁜 소식과 함께 진심을 다해 다정하게 말하니, 놀라움을 넘어 얼어붙었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 진짜 놀랐잖아…! 너 어떻게 된 줄 알고!”

“미안.”

그러자 권유라가 양팔을 들어 정우현을 살포시 안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하고는 언제 울었냐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 일 아니라서.”

이 순간, 권유라에겐 땅에 떨어진 온갖 명품 따위보다 정우현이 별탈 없다는 게 훨씬 중요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려 상을, 그것도 필스상을 받았다니.

그녀가 그렇게 정우현을 안고 있다가는, 순간 고개를 들고 말했다.

“필스 상이라고?”

“응!”

이미 권유라의 얼굴에서 눈물은 마른 지 오래였다.

“우와.”

그러고서 그녀가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진짜 잘됐다!”

“그치?”

“응!”

“하하하!”

그렇게 둘은 다시 예전처럼 함께 웃었다.

한편 이 모습을 엄규환은 물론 권유라의 경호원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는,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 *

그렇게 해서 전용기를 타고 곧장 이동한 마드리드.

전용기 안에서부터 정우현과 일행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우현아, 축하해!”

구태호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우리 우현이는!”

권유라가 거의 노래를 부르다시피 하며 외쳤다.

“이번에 유럽에 와서 상을 세 개나 받아 간대요!”

한편 졸지에 마드리드까지 함께 가게 된 김도진도 기뻐하며 말했다.

“이거 원, 우현이 덕에 유럽 여행을 다 하고 가네.”

“하하하하!”

시상식 날까지는 시일이 조금 남았다.

그래서 정우현과 일행은 며칠을 작정하고 여유를 즐겼다. 미술관과 왕궁, 그리고 성당 등 각종 관광 명소를 즐기며 사진도 모처럼 잔뜩 찍었다.

김도진을 보호자로 하는 일종의 여행이었다. 그것도 친구들과 함께하는.

그리고 필스상 시상식 전날 밤.

정우현과 친구들은 마요르 광장 한복판에서 마드리드 시내의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김도진은 호텔에서 쉬고 있었고, 엄규환을 포함한 경호원들만 따라 나와 그들 곁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키고 있었다.

“애들아!”

구태호가 사방을 둘러보며 조금은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응?”

“우리, 이 다음에도, 이렇게 우리끼리 놀 수 있겠지?”

“당연하지!”

권유라가 얼른 대답했다.

“그럼.”

정우현도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이에 구태호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친구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 애들아. 나, 항상 너희들한테 고마워 하고 있어.”

“에이, 태호야 갑자기 왜 그래!”

권유라가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슨 그런 말을 갑자기 하냐는 듯 말했다.

구태호가 이렇게 감상 어린 말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일이면 시상식에 참석 후 곧장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친구들과의 여행도 이제 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셋 중 누군가가 KGI를 떠날 수도 있기에, 이렇게 셋이 매일처럼 함께하는 게 어쩌면 이제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걱정하지 마, 태호야.”

정우현이 그런 구태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우린 어느 때 어느 곳에 있어도 친구야. 그 사실은 변함없어. 이 다음에 어른이 되어도 말이야. 그러니까.”

그가 믿음직스러운 표정을 짓고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권유라와 구태호는 아직 어려서 몰랐지만, 정우현은 전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친구는 만드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힘들다는 것을.

하지만 정우현은 KGI에 입학한 이래 줄곧 함께한 이 두 명의 친구들과는 어떻게든 오랫동안 함께하리라 다짐했다.

실상 애초 학교에 들어온 가장 큰 목표도 그 무엇도 아닌 또래 친구들을 사귀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끝에 얻은 결과가, 바로 옆에 있는 권유라와 구태호였다.

“그래!”

“…알았어!”

정우현의 말에 두 친구가 각기 대답을 했다.

그러고서 그의 말을 따라 현재를 있는 그대로 느끼며 순간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 * *

마드리드 국제수학자학회 필스상 시상식.

시상식 분위기는 이제껏 정우현이 참가한 어떤 시상식보다 엄숙했다.

축제에 가까운 영화제, 그리고 여러 엔지니어 및 기업인이 참석한 엔진 상 시상식과 달리 한평생 학문을 연구하는 수학자들의 시상식이니 그럴 만했다.

그럼에도 정우현이 시상식장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웅성댔다.

물론 오래전부터 정우현의 필스 상은 예측됐다. 수학의 난제인 푸앵카레 추측을 입증했고, 심지어 일찌감치 소수의 뛰어난 수학자들에 의해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알려져 왔으니까.

그럼에도 이제야 검증이 끝나고 상을 받게 된 이유는, 순전히 정우현이 어렸기 때문이다.

소수의 수학자들이 일찌감치 정우현을 인정한 것처럼, 반대로 또 소수의 수학자는 그런 정우현을 몹시도 질투했다. 자신들이 전력을 다해도 손도 댈 수 없는 문제를, 한 어린 소년이 해결했다는 것에서 그 사실을 애초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검증이 오래 걸렸으며 한편으로는 혹독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찾아낼 수 없었다. 단 하나의 오류도.

이렇게 해서 애초 빠르면 재작년 늦어도 작년이면 끝났어야 할 정우현의 논문 검증이, 올해 뒤늦게야 완료됐다.

필스상 시상이 시작된 가운데, 이내 정우현의 이름이 불렸다.

이윽고 그가 단상에 나가 사람들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정우현을 경탄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간 정우현을 어떻게 생각했든, 이제 그는 명백히 위대한 수학자였다. 만약 그런 그를 부정하고 싶다면, 정우현이라는 사람을 부정할 게 아니라 정우현의 논문을 부정해야 했다. 그것도 수학적으로.

하지만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애초 가능하지도 않았다.

정우현의 수식이 명백히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학자가 아니라고 밝히는 것과 다름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정우현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영예로운 상을 받아 한없이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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