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마침내 시상식이 열리는 프랑스의 칸, 팔레 데 페스티발 에 데 콩그레.
김도진을 선두로 정우현 그리고 권유라와 구태호가 모두 복장을 갖춰 입고 레드 카펫을 밟았다.
프랑스 현지 언론은 물론 각국의 언론들이 카펫 위 그들에게 몹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유명 인사인 정우현도 정우현이지만, 그를 포함해 세 명의 아시아 아이들이 꼬마 신사 숙녀의 모습으로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모습을 드러내니 무척이나 귀여웠기 때문이다.
“우현아.”
카펫 위를 사뿐사뿐 걷고 있는 권유라가 정우현을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응?”
“…나, 괜찮지?”
수없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권유라가 애써 웃어 보이며 물었다.
“하하, 그렇다니까!”
사실 호텔에서부터 이곳 홀까지, 권유라는 긴장감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묻고 있었다.
온통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관심을 받고, 심지어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는 경험이 처음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이에 반해 정우현은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포즈도 취하는 등 확실히 여유로워 보였다.
실상 데뷔작 <겨울 방학>으로 공식 석상에 선 지 거의 10년 가까이 된 베테랑이 정우현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카메라 앞에서라면 언제든지 자신이 있었다.
“아, 특별히 맞춤 제작한 드레스인데.”
권유라가 자신의 풍성한 드레스 치마를 양손으로 잡고 걸으며 말했다.
그녀는 이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어머니를 졸라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에서 드레스를 하나 빠르게 맞췄다.
하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왜냐하면 드레스에 맞춰 아이용 구두를 또 신었는데, 굽이 높아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뻐, 유라야.”
결국, 정우현이 한마디 했다.
“…정말?”
“응, 공주님 같아.”
“와아….”
권유라가 말을 잃었다.
정우현이 자신의 모습에 관해 칭찬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권유라의 생각대로 정우현은 평소 그녀의 외양에 관해 평소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랜 친구인 만큼 외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 심지어 정우현은 여자를 앞에 두고 괜한 말로 환심을 사는 성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모처럼 칭찬을 한 이유는, 권유라가 지나치게 긴장했기 때문이다.
즉 친구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헤헤.”
역시나 권유라는 그의 말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는 자신 있는 모습으로, 특유의 생글생글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 나아갔다.
한편 정우현과 일행이 카펫 위를 몇 발자국 걷자, 순간 엄청난 함성이 들렸다.
“정우현! 정우현!”
바로 정우현의 국제 팬클럽 WG 즉 우현스가디언이었다.
백인, 흑인, 아시아 인 등 인종 불문한 그의 팬클럽이 오랫동안 시상식장에서 기다렸다가 정우현의 본격적인 등장에 몹시도 크게 응원의 소리를 질렀다.
정우현은 카펫 위를 밟다가, 자신의 팬클럽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들 앞으로 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마웠다. 영화 등 배우 활동을 안 한 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자신을 잊지 않고 응원하고 지지한다는 것에서 모처럼 팬들에게 커다란 고마움을 느꼈다.
* * *
그런데 이내 작은 일이 생겼다.
영화제 팸플릿을 받고 자리에 앉았는데, 정우현이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즉 친구들과 함께 만든 영화 <자승차>의 감독으로, 오로지 정우현 한 명의 이름만 표기되어 있었다.
이에 정우현이 즉각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게 뭐지?”
“…뭐가?”
이내 권유라가 답했다.
“아니, 우리가 만든 영화의 감독이 내 이름으로만 단독 표기되어 있잖아.”
“아, 그거.”
이번엔 구태호가 말했다.
“너 영국에 가 있는 동안, 우리가 그렇게 올린 거야. 교장 선생님이 영화제 위원회로부터 연락 왔을 때, 감독 등 영화 크레딧을 명확히 지정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대. 그래서 우리한테 물어본 거고, 그렇게 올리게 된 거지.”
“…왜? 전부 같이 올렸잖아?”
셋은 애초 이 단편 영화를 만들 때 감독부터 해서 시나리오 제작 등 모든 분야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렸다. 팀 과제였던 만큼 공동의 영화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영화제 측이 판단하기에 조금 이상해 보였고, 이에 이 영화를 출품한 KGI 측에 문의했다. 그 결과 감독은 정우현 단독으로, 시나리오는 정우현과 구태호 공동으로, 제작은 구태호와 권유라 공동으로 정확히 역할을 구분해 다시 크레딧을 제출했다.
“에이, 우현아. 솔직히 카메라를 보고 영화를 연출하고 만든 사람 즉 감독은 너 한 명이잖아. 뭐 글을 쓰고 의견을 공유하고 자승차를 제작하는 등 나머지는 우리랑 같이했다고 해도.”
“….”
정우현이 잠시 생각했다.
한 번도 그렇게 크레딧과 관련해 상세하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학교의 팀 과제로 만든 영화이니만큼 그저 우리 모두의 영화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하고 정우현이 말을 하려는데 김도진이 불쑥 입을 열었다.
“친구들 말이 맞다, 우현아.”
“….”
“나는 이 영화에 출연했다. 그것도 주인공으로. 우현이 너도, 두 편이나 영화에 출연해 봤으니, 배우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거다. 배우가 촬영장에서 말을 듣고 따라야 할 사람은 오로지 한 명이지. 바로 감독.”
그러면서 그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나는 이번 영화를 촬영하며 누구의 말을 들었니? 바로 너, 우현이 너밖에 없다. 다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고, 들을 필요도 없었지. 촬영장에서 감독은 너 한 명이었으니까.”
정우현이 입을 다물고 김도진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니까 친구들이 잘한 거다. 유라랑 태호는 마땅히 감독의 이름을 알맞게 올렸을 뿐이야. 그게 다름 아닌 정우현, 너인 거고.”
“그래, 우현아!”
권유라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너 아니면 이 영화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겠어! 아니, 애초에 영화를 찍을 생각조차 못 했겠지. 태호가 열심히 사료를 찾아보고, 난 그에 맞춰 자승차를 제작해 달랑 그거 하나 학교에 제출하는 게 전부였을 테니까. 그런데 우현이 너 덕에 이 모든 게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진 거잖아! 그러니까 너 혼자 감독인 거라고!”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정우현은 못내 아쉬운지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걸 애써 참고, 마침 시작한 시상식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가는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바라던 건 이게 아니지만….”
하고서 곧이어 펼쳐지는 스크린을 보고 말을 이었다.
“일단은 알았어.”
영화제 시작과 함께 단편 영화상 후보작이 스크린에 펼쳐졌다.
애초 칸 영화제는 장편 영화제. 따라서 단편 영화상은 본 시상식 전에 수상하는, 조금은 작은 이벤트에 가까웠다.
하지만 물론 관객 및 언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번 칸 단편 영화상에 집중했다.
바로 정우현이 감독한 영화가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윽고 수상작이 결정됐다.
“Chai seseung cha du réalisateur Jung Woo-hyun! (정우현 감독의 자승차!)”
자승차였다. 자승차가 칸 단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게 됐다.
“와아아아아!”
이에 사람들이 모두 환호성을 내질렀다.
정작 정우현은 얼떨떨해서 잠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수년 전 한국과 미국에서 상을 받았을 때와 달리 전혀 기대도 예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이 이 영화의 단독 감독이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뭐 해, 우현아!”
사람들의 환호성 속, 권유라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얼른 일어나! 나가서 상 받아야지!”
“아.”
“그래, 우현아. 우리 모두의 상이야.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
구태호의 말에 정우현이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랬다. 친구들과 함께해서 받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상이었다.
그것을 그저 자신이 받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억눌렀던 마음이 들뜨며 뒤늦게 몹시도 기쁜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그는 <인크레더블 킹 보이>로 미국에서 신인상을 받았을 때보다도 더 기분이 좋았다.
그때는 그저 스스로 열심히 해서 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친구들과 함께한 오랜 시간의 가치를 증명받는 것 같았다.
물론 그들의 우정과 함께한 시간을 그들이 아닌 외부의 무언가에 입증받을 필요는 없었지만, 이토록 좋은 일로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함께 찬사를 받으니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세상이 이 순간 오직 자신과 친구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혼자가 아닌 친구들과 함께라는 게 이렇게나 기쁜 순간은 없었다.
“오오!”
마침내 정우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서 그는 무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아갔다.
아직은 어린 나이지만 성인 못지않게 씩씩하고 보폭이 큰 걸음으로 앞을 향했다.
“와아아아!”
사람들은 연신 탄성을 내질렀다.
심사위원이 수상작인 <자승차>를 짧게 소개했다.
“<자승차>는 한국의 옛 사회상을 흥미롭게 보이며, 발명에 일생을 전념한 사람의 열정을, 짧지만 매우 극적으로 펼치는 강렬하고 탁월한 영화입니다.”
그러고는 무대에 가까이 다가온 정우현을 보고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어찌 보면, 이 말이 더 영화 소개에 어울릴 수도 있겠군요. 감독은 무려 한국의 정우현이고요!”
“와아아아아아아!”
이윽고 정우현이 웃는 낯으로 트로피를 받고는 사람들 앞에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Merci, merci beaucoup!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짝짝짝짝짝!
정우현의 유창한 불어는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우선 본격적으로 소감을 말하기에 앞서 하나 명확히 해야 할 게 있습니다.”
물론 구태호는 물론 권유라도 정우현의 불어를 알아들었다.
유엔 공용어이자 세계적으로 29개국이나 사용하는 불어 정도는 권유라도 일찌감치 학습했다.
“이 영화는 저 혼자 만든 영화가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이 정우현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잠시 조용해졌다.
“바로 제 오랜 친구 권유라 그리고 구태호와 함께 만든 영화입니다.”
그러고서 그는 팔을 뻗어 객석에 앉아 있는 친구들을 가리켰다.
이에 스크린 또한 정우현을 따라 그의 친구들을 비췄다.
“너무나도 소중한 제 친구들입니다, 박수 좀 쳐 주세요!”
정우현의 말에 사람들이 웃으며 다시 한번 뜨겁게 손뼉을 쳤다.
그러고서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저렇게나 멋진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친구들과 함께 만든 영화로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으니 정말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이 상을 오랜 우정의 증표로 알고 길이길이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저의 오랜 삼촌인 김도진 배우에게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러고서 그는 머리를 다시 한번 꾸벅 숙인 뒤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정우현의 수상 소감과 소년·소녀들의 아름다운 우정에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서 계속 손뼉을 쳤다.
이내 정우현이 자리로 돌아오자 권유라와 구태호가 신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겨 줬다.
“아아!”
이에 정우현이 그런 그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양팔을 최대한 활짝 펴 왼팔로는 권유라를 오른팔로는 구태호를 한꺼번에 안아 버렸다.
“하하하하하!”
친구들은 물론 몹시도 기뻐 크게 웃고 소리를 질렀다.
기자들은 이 모습을 놓치지 않고 연신 사진을 찍었다.
* * *
다음 날 각국의 언론은 칸 장편 황금종려상보다는 정우현과 그의 친구들을 더 크게 다뤘다.
특히 정우현이 권유라와 구태호를 끌어안는 사진을 전면에 실었다.
“…아아, 이게 뭐야!”
한데 그 모습을 보고 툴툴대는 사람이 있었다.
권유라였다.
드레스를 입은 채 기뻐하는 자신의 모습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유라야.”
정우현 또한 가만히 사진을 보다가 그런 그녀에게 되물었다.
“이상하게 나왔잖아! 나, 이것보다 훨씬 예쁜데!”
“…으음.”
정우현이 고개를 들어 친구를 바라봤다.
똑같았다. 사진이나 지금 모습이나 차이가 없었다.
권유라가 계속 사진을 보다가는 역시 고개를 들어 정우현을 보고 말했다.
“…우현아.”
“응?”
“나, 진짜 이렇게 생겼어?”
솔직히 사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여자들의 질문은 때로 답이 정해져 있음을, 그는 다행히 알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
“응.”
“실물이 훨씬 낫지?”
“….”
“그렇지?”
“응.”
“…역시!”
하고서 권유라가 이제는 만족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프랑스 기자들은 순 엉터리야!”
“하하하하하!”
한편 그들 뒤편에서 가만히 있었던 구태호가 크게 웃었다.
그러자 권유라가 홱 돌아보고서 곧장 물었다.
“왜 웃어, 구태호?”
“권유라는 가끔.”
구태호가 여전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참 재밌다니까.”
“뭐가?”
“하하하, 아니 그냥.”
“….”
권유라가 그런 구태호를 가만히 보다가는, 한순간 신문을 내팽개치고 말했다.
“아, 난 쇼핑이나 하러 가야겠다. 모처럼 프랑스에 왔으니!”
단순해서 마음 편한 권유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