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이내 세계의 엔진 상 시상식이 끝이 났지만, 정우현은 곧장 호텔로 돌아가 쉴 수 없었다.
“Regisseur Jung Woo-hyun! Sagen Sie nur ein Wort, nur ein Wort zur Zukunft des Verbrennungsmotors! (정우현 이사! 내연 기관의 미래에 관해 한마디만, 한마디만 해 주세요!)”
“Woohyun! This is American Pax! It's been a while since the last interview! Please do another interview with us…. (우현 군! 미국의 팍스사입니다! 지난번 인터뷰 이후 오랜만인데요! 부디 우리와 인터뷰를 한 번 더….)”
“Questo è Il Georgo dall'Italia. Questa volta hai guidato ingegneri multinazionali, compresi i nostri nazionali, non hai avuto difficoltà? (이탈리아의 일 게오르고사입니다. 이번에 우리 국적의 엔지니어를 포함해 다국적 엔지니어를 이끌었는데, 딱히 애를 먹지는 않았는지요?)”
해외 유수의 언론이 정우현을 둘러쌓고 각종 질문을 퍼부었다.
이에 정우현은 다양한 언어로 몇 마디 답하다가는, 엄규환 및 회사 직원들에게 이끌려 끝내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 * *
정우현은 런던에 간 김에 영국 현지 에이치 자동차 지사와 공장에 방문해 회사 일을 살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데다, 사장으로부터는 오히려 쉬고 오라는 말을 들었지만, 마냥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이 마치 노는 것처럼 재밌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에이치 자동차가 후원하는 영국 프로 축구 1부 리그의 팀에도 들러, 내년 한 해 새로운 후원 계약까지 하고 왔다.
계약은 순조로웠다. 구단이 지난 계약과 거의 비슷한 조건으로 재계약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구단 성적이 올 한 해 나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보통 팀 성적이 좋으면 그에 걸맞게 어떻게든 더 유리한 조건으로 재계약을 추진하거나 아예 후원사를 바꾸는 경우가 많기에, 정우현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사님 덕분입니다.”
계약을 마친 뒤, 함께한 에이치 자동차 영국 해외 지사 사장이 뒤늦게 정우현에게 은밀히 말했다.
“…예?”
이에 영국 지사 사장이 갈색으로 염색한 자신의 머리를 한 손으로 만지고는 장황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사님 덕분에 에이치 자동차의 평판이 오르고 매출이 급증했지 않습니까. 이사님은 정확히 모르실 거예요. 이곳 유럽 현지에서 우리 모델 HX가 얼마나 히트를 치고 있는지. 히야… VMW, 빈츠(Binz), 페루리 등등 불과 일이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보다 잘나갔던 회사들이 지금은 우리 에이치 자동차를 부러움의 눈빛으로 보고 있어요. 고객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게 다 이사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런가요.”
“그럼요! 특히 고무적인 건 그간 해외에서 중저가 브랜드 인식이 강했던 우리 에이치 자동차를, 상류층 사람들이 더 선호하고 있다는 거예요! 심지어 명품 카만을 고집하며 때로 수집까지 하는 큰손 고객들이 HX를 필히 구매한다는 최근의 통계 조사가 있습니다. 그들로서는, 이번에 이사님의 엔진을 탑재한 우리의 신차가, 반드시 수집해야 할 트로피와 다름없게 된 거죠!”
“하하하, 좋네요!”
“예, 예. 그래서 이번 축구 구단과도 재계약이 순조로웠던 겁니다. 이사님, 작년에도 제가 이 구단이랑 계약을 맺었었거든요? 어휴, 근데 말도 마세요. 보셨다시피 구단주가 러시아 재벌인데, 얼마나 까다롭고 변덕이 심한데요.”
“…정말요?”
“안 믿겨지시죠? 저도 놀랐습니다. 오늘은 그야말로 젠틀한 신사의 모습으로 있더군요. 얼른 사인을 하자면서. 하하하. 이게 다, 우리 회사의 입지가 전에 없이 탄탄해졌기 때문입니다. 모두 이사님 덕분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정우현은, 최근 얼굴에 웃음꽃이 핀 영국 지사 사장 및 직원들과 함께하며, 자신의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렇게 좀 더 영국에서 있다가 슬슬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할 즈음, 뜻밖의 소식이 또 들려왔다.
정우현과 친구들이 한국 영재 학교에 제출한 <자승차>가 무려 프랑스의 칸에서 단편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다.
정우현은 애초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정말 깜짝 놀랐다.
후보에 오르게 된 경위는 이랬다. 일찍이 <자승차>에 깊은 감명을 받은 김민정 교장이 해당 영화를 국내 단편 영화제에 제출했고, 해당 영화제 위원들은 작품이 국제적으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해 프랑스 영화제에 얼른 출품했다.
워낙 빠르게 진행된 일이라 정우현은 미처 알 길이 없었다. 프랑스 영화제 출품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김민정 교장 및 국내 영화제 위원들이 따로 알릴 시간이 없었다. 마침 정우현이 회사 일로 영국에 가 봐야 해서 바쁘기도 했고.
또한 비록 출품해도 수상은커녕 후보에도 오르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기에, 애써 굳이 알리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이렇게 좋은 소식을 듣게 됐다.
이에 곧장 영국 현지에 있는 유럽 기자들이, 아직 영국에 있는 정우현을 어떻게든 찾아내 다시 인터뷰 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와아….”
정우현은 어안이 벙벙해서 스스로 이번 영화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순전히 과제였다. 물론 오랫동안 함께한 친구들과 처음으로 함께한 무척이나 의미 있는 과제였다.
그래서 그는 최선을 다했다. 오래전 영화를 두 편 찍으며 보고 듣고 배운 모든 경험과 그리고 자신의 놀라운 재능을 다해 글을 쓰고 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만들어 냈다.
물론 역시나 뛰어난 친구들, 권유라와 구태호도 함께한 덕이 컸다. 즉 세 명의 천재들이 합심하여 전력을 다한 작품이 영화 <자승차>였고, 이에 세계 영화제까지 갈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의미를 되새긴 다음, 정우현은 곧장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국제 전화를 걸었다.
“오, 우현이구나!”
에이치 자동차 사장이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하고서 정우현이 영화제 소식을 알리고 사장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려 했다.
바로 현재 유럽에 있는 김에 전용기를 타고 프랑스로 넘어가 얼른 영화제에 참석한 뒤 한국에 돌아가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하하하하하하! 정 이사!”
한데 사장이 껄껄 웃더니 정우현이 말하는 도중에 그를 크게 불렀다.
“…예?”
“당연히 알고 있지! 알고 있는 것뿐이겠어? 우현이 네가, 이번에 유라랑 같이해서 만든 영화 아니냐! 유라가 지금 얼마나 신나 있는데!”
“아.”
“그러니까, 우현이 너는 곧장 거기서 프랑스로 넘어가고.”
“…감사합니다!”
“거기서 우리 유라가 합류하면, 함께 영화제에 잘 참석한 뒤 돌아오렴.”
“아아, 유라도 오나요?”
“그럼, 그럼. 하하! 안 가고 배기겠어? 심지어 태호랑, 그, 누구냐, 너희 영화에 나온 배우.”
“아, 김도진 삼촌이요!”
“그래, 그래! 그 사람도 함께 갈 계획이다! 우리 회사 전용기를 또 타고!”
“와….”
이럴 땐 대기업에 속한 게 정말 편했다.
전용기를 여러 대 보유하고 있어, 항공사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세계 곳곳을 넘나들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유라, 오랜만에 프랑스 구경도 잘 시켜 주고!”
“예!”
“즐겁게 지내다 돌아오렴. 우현아, 네가 거기 가 있어서 더 잘 알겠지만, 최근 회사가 너무 좋다. 내가 사장으로 취임한 이래, 이렇게나 좋은 시절은 없었지.”
“하하하하, 다행이네요!”
“모두 우현이 네 덕분이다. 그러니까 다녀와서 보자!”
“예!”
“그리고 축하하고!”
“에이, 아직 수상한 것도 아닌데요!”
“됐다, 그것만으로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하는데 에이치 자동차 사장이 조금 다른 목소리로 천천히 한마디 덧붙였다.
“…아, 근데.”
“예?”
“그, 예술 극장 같은 데는 가지 마라. 하하!”
사장이 지난 러시아 극장에서의 일을 떠올려 이렇게 말했다.
이에 정우현이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짧게 몇 마디를 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 * *
프랑스 칸.
정우현이 먼저 도착해, 프랑스 남부의 따뜻한 기후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기자들은 물론 일반 사람들도 정우현을 알아보고 함께하려 했으나, 그는 곧장 자리를 피하고 오랜만에 브래드 퍼트의 모자를 눌러썼다.
아직 영화를 함께 만든 친구들이 오지 않았기에, 벌써부터 혼자 이러쿵저러쿵 영화에 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한국에서 출발한 에이치 자동차의 전용기가 프랑스 마르세이유 공항에 도착했다.
사실 영화제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에, 한국 영재 학교 측이 수년 전 여행 때처럼 항공편을 책임지려 했다.
권유라와 구태호를 일반 항공기에 태워 보내는 식으로.
하지만 권유라가 이코노미석은 한 번이면 족하다며 극구 반대하더니, 아버지를 설득해 이렇게 회사 전용기를 타고 공항으로 오게 됐다.
물론 정우현은 공항 앞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브래드 퍼트의 모자를 쓴 채.
“우현아!”
하지만 한 사람이 정우현을 단박에 알아봤다.
권유라였다. 권유라가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정우현을 보고 큰 소리로 부르며 달려왔다.
“유라야!”
“정우현!”
권유라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정우현을 와락 안았다.
“…하하하.”
정우현은 괜히 조금 어색해서 그저 웃었다.
그럼에도 권유라가 수 초 더 정우현을 끌어안고 있다가는, 한순간 몸을 떼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정우현이 한국을 떠나온 지는 약 보름 정도였다.
그런데도 권유라가 이렇게나 기뻐했다.
“…하하하, 나도.”
이에 정우현이 일단은 맞장구를 치며 친구의 기분을 맞췄다.
권유라는 곧장 물었다.
“별일 없었지?”
“당연하지!”
“정우현!”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또 들렸다.
구태호였다. 그러고는 그 뒤로 김도진까지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권유라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따라 일찌감치 다가와 조금 뒤편에 있었다.
“와아, 태호야! 도진 삼촌!”
정우현 또한 몹시 반가워 밝게 인사했다.
“하하하하하하!”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웃다가는 이윽고 김도진이 사방을 둘러보다가 한마디 했다.
“내 참, 이렇게 프랑스까지 와서, 팔자에도 없는 칸 영화제에 참석한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하하하하!”
정우현과 친구들은 기뻐서 계속 웃었다.
“우현아.”
김도진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정우현을 불렀다.
“예?”
“정말 고맙다.”
“….”
“네 덕에 배우로서, 꿈의 영화제에 오게 됐잖니.”
“삼촌, 아직 수상한 것도 아닌데요! 그리고 비교적 덜 주목받는 단편 영화 부문이고요!”
“그게 어디냐, 그게 어디야. 너도 잘 알겠지만, 우리나라에서 한평생 영화에 올인해도 이런 국제 영화제는 코빼기도 밟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한데 네 덕분에, 나는 이렇게 왔다!”
“하하하하, 그러네요! 아저씨, 이제 글로벌 스타 되신 거예요!”
순간 권유라가 빠지지 않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하, 그런 건가?”
김도진은 오히려 실감이 안 난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한데 구태호가 조금 이상했다. 애써 밝게 인사하고는 도무지 말이 없었다.
이에 정우현이 그를 보고 걱정되는 얼굴로 물었다.
“태호야,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하는데 권유라가 또 얼른 말을 이었다.
“태호는 멀미했대요!”
“응?”
정우현이 놀라고는 곧장 되물었다.
“태호야, 몇 년 전에 우리 학교에서 유럽 갔을 때는 멀미 하나도 안 했잖아!”
“…몰라. 누워만 있어서 그런가….”
구태호는 난생처음 타 보는 전용기에 한국에서부터 거의 누워 있다가는 오히려 멀미를 했다.
“유라네 회사 비행기가 불량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농담을 한마디 하자 권유라가 얼른 크게 한마디 했다.
“무슨! 우리 회사 전용기가 어떻게 불량이야!”
“하하하하하.”
정우현과 김도진은 그 모습이 재밌어서 웃었다.
“하여간 우현아.”
김도진이 정우현을 불렀다.
“예!”
“영화제는 이틀 후에 열리잖니.”
“맞아요!”
“그럼 그동안 우리는, 맘껏 놀자꾸나.”
“와아아아아!”
이에 정우현과 권유라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전 쉴래요.”
다만, 구태호는 여전히 멀미에서 헤어나지 못해 약한 소리를 했다.
“무슨 소리!”
이에 권유라가 그의 옷 소매를 잡은 채 말했다.
“태호, 너도 무조건 같이 다녀야지!”
“…난 쉬고 싶은데.”
“그럼 밖에서 쉬어! 내가 특별히 네 가방 다 들어 줄게!”
하고서 그녀가, 구태호가 매고 있는 작은 포켓용 가방을 정말 얼른 손에 쥐고는 자신의 어깨에 걸었다.
“…아아.”
구태호가 그런 친구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하하하하하!”
정우현과 김도진이 그 모습을 보고 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