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예?”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우리 <겨울 방학> 촬영할 때 말이다. 네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아, 예.”
“마지막 씬. 내가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장면. 그거 네가 집어넣자고 한 거지?”
“…그랬죠.”
당시 장필도 감독은 영화 속 깡패 삼촌인 김도진과 정우현을 그저 이별하게 만들고 끝내려 했다. 애초 즉 새드 엔딩을 꾀했다. 한데 정우현의 제안으로 씬을 하나 더 추가해 해피 엔딩으로 영화가 막이 내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니.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했지. 여태 사람들은 <겨울 방학>을 떠올릴 때면 엔딩 씬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하하하.”
정우현이 멋쩍어서 괜히 웃었다.
“맞아.”
순간 권유라가 말했다.
“나도 그 씬 엄청 좋아해. 여기 김도진 아저씨만 화면에 보이고, 우현이 너는 목소리만 들리잖아. 그게 얼마나 애틋하면서도 감동적인데. 진짜 울다가 웃는 게 어떤 감정인지, 나, 네 영화 보고 깨달았다니까?”
관객으로서 권유라가 진심 어린 말을 했다. 정우현과 이제 단순히 친하다는 표현도 부족한, 죽마고우의 권유라는 정작 그의 과거 배우 생활과 관련해서는 말을 아껴 왔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정우현의 친구였지, 그저 팬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처럼 정우현의 영화 얘기가 나와 이렇게 말을 하게 됐다.
“아, 그랬구나. 하하.”
정우현은 그런 그녀가 조금은 낯설어서 그저 웃었다.
“그래, 이 친구 말이 맞다.”
김도진이 곧장 말을 이었다.
“엄청난 거지. 네가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인 거야. 당시엔 옆에 장필도 감독도 있고 해서, 따로 얘기 못 했다만, 사실 각본 크레딧에 너의 이름이 들어가도 무방할 정도였다. 엄연히 너로 인해 이야기의 결말이 달라지고 결정적으로 사람들이 더 좋아하게 됐으니!”
사실 김도진이 모르는 게 있었다.
당시 장필도 감독은 영화를 완성하고 정우현에게 은밀히 말했다. 각본 크레딧에 정우현의 이름을 같이 올릴 생각이라고.
이에 정우현은 자신이 직접 글을 쓴 것도 아니고, 그저 추가 씬 하나에 관해 아이디어만 말했을 뿐이라며 끝내 거절했다. 그렇게 해서 장필도 감독 단독으로 각본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김도진이 정우현이 쓴 단편 시나리오를 손에 들고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를 보니 확신한다. 우현아, 너는, 글도 잘 쓰는구나. …너의 또 다른, 여러 재능처럼 말이다.”
“…감사합니다!”
정우현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영화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으니.
이로써 자신의 글이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한 글이 아님을 확인하게 됐다.
영화판에서 시나리오의 위력은 엄청나서, 잘 쓴 시나리오 한 부로 수십 수백억 원 이상의 투자 및 톱스타들의 출연이 결정된다. 반대로 그저 그런 시나리오는 투자는커녕 애꿎은 사람들의 손을 이리저리 전전하다가 결국 쓰레기통에 처박히기 일쑤다.
“솔직히 말이다.”
김도진이 정우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나는, 큰 기대 안 했다. 이번에 네가 쓴 글이 어쨌든 대중들을 사로잡기 위한, 상업성을 띤 시나리오는 아니니까 말이야. 심지어 학교 과제로 제출할 거라고 하기에, 그저 네 얼굴을 보고 잠깐 도와도 줄 겸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하하. 이거 원, 전력을 다해야 겠는걸?”
“…그렇게.”
이에 구태호가 말을 했다.
“괜찮아요?”
“하하하! 괜찮다 뿐이냐! 아주 재밌어! 흥미진진해! 솔직히 나는 하백원이라는 역사적 인물은 이번에 처음 알았지만. 음… 그가 끝내 시련을 극복하는 멋진 모습에 벌써부터 가슴이 뜨거워진다!”
“아싸!”
권유라가 신나서 소리쳤다.
“그럼 얼른 시작해요!”
* * *
촬영 준비가 시작됐다.
정우현은 이참에 값비싼 영화 촬영용 카메라를 하나 구입했다.
그리고 나머지 장비와 촬영 스태프, 그리고 엑스트라 배우들까지 장필도 감독과 연락이 닿아 국내 유명 스튜디오의 힘을 빌려 모두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비용은 모두 제값을 치렀다. 스튜디오는 처음, 여전히 국내 최정상급 감독인 장필도와의 인연과 그리고 무엇보다 이른 나이 세계적 스타로 자리매김한 정우현의 명성을 내세우며 50% 이상 할인을 해 주려 했다.
하지만 정우현이 또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심지어 이 제작 비용마저, 처음엔 권유라가 모두 지불하려 했다.
“아니야, 유라야.”
물론 이를 잠자코 볼 정우현이 아니었다.
“아, 왜. 얼마 안 하는데!”
얼마 안 하지는 않았다.
카메라 구입 비용까지 해서 대략 3천만 원이 들었다.
30분짜리 단편 영화치고는 꽤 돈이 많이 들어갔다. 왜냐하면 인기 배우인 김도진이 출연하는 데다, 국내 정상급 스튜디오 즉 최고의 영화 인력과 장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김도진은 애초 계획했던 대로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정우현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돈을 자신이 내겠다고 하는 권유라에게 정우현이 말했다.
“얼마 안 하긴. 3천만 원이다, 유라야.”
“그러니까 이 정도는 내가 낼 수 있다니까.”
재벌가 손녀인 권유라에게 3천만 원은 그리 큰돈이 아니다. 심지어 그녀가 그토록 따르는 정우현과 함께하는 과제를 위한 비용이니, 아까울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는 정우현도 마찬가지다. 이것저것 그의 자산을 모두 합치면 벌써 4조 원이 넘었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에이치 자동차 주식이었다.
“아니야. 애초 영화를 찍자고 한 게 나잖아. 그러니까 내가 내야지.”
“음, 음, 아니지.”
구태호가 모처럼 날카로운 표정으로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과제는 우리 모두 공동의 과제. 그러니까 모든 비용도 정확히 3분의 1 하는 게 맞아. 만약 이 과제가 우현이 너나 유라의 단독 과제였다면 그 사람이 책임지고 비용을 대는 게 맞겠지만, 이번은 다르다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 셋이서 천만 원씩. 천만 원씩 내자.”
법조인 아들다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으음….”
결국 그들은 생각 끝에 구태호의 말을 따라, 똑같은 금액의 비용을 지출했다.
* * *
그리고 진행된 영화 촬영.
작업은 몹시 순조로웠다.
애초 정우현이 시나리오를 탄탄히 잘 쓴 데다, 유능한 스태프들 덕분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물론 정우현은 감독으로서 촬영장에 있는 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지난날 촬영을 했을 때, 오로지 연기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것저것 무엇이든 눈에 익히고 많이 배워 둔 경험이 뒤늦게 빛을 발했다.
그래도 막히는 부분에선 배우 김도진과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원활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화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촬영하는 씬.
하백원 역의 김도진이 권유라가 만든 자승차를 논두렁에서 직접 시험해 보고는, 완벽한 성공을 확인하며 소리를 지르고 끝내 자리에 주저앉아 그간의 고생을 떠올리며 행복의 눈물을 흘리는 씬이다.
즉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카메라 앞에서 보여야 하는, 어려운 씬이었다.
“…아아, 긴장되네.”
카메라 앞의 김도진이 스태프가 든 거울을 통해 자신의 옷매무새를 만지며 말했다.
“하하, 이거 학교 과제 영화를 촬영하는데 긴장할 줄이야.”
“이제 시작할게요!”
정우현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래.”
김도진이 답했다.
“…레디, 액션!”
정우현의 외침과 함께 연기가 시작됐다.
김도진이 자승차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순간 소리를 지른다.
“아아아아아아!”
그러고서는 벌떡 일어나 몇 발자국 논길을 걷다가는 한순간 철퍼덕 자리에 앉고 만다.
이내 가슴 벅찬 표정을 짓다가는 눈물을 한줄기 흘려야 한다.
“컷!”
하지만 정우현의 외침에 촬영이 중단됐다.
“…으음.”
김도진이 사뭇 굳은 표정으로 소리를 냈다.
자신 또한 연기가 썩 좋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촌!”
정우현이 곧장 김도진을 불렀다.
“응?”
“바로 한 번 더 해 볼까요?”
“아아.”
김도진이 잠시 말을 않다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현아, 별로지?”
“아뇨, 별로는 아닌데! 으음, 그래도 몇 번 더 해 보면 좋겠어요!”
라고는 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다.
김도진의 연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우현은 인기 배우임에도 자신의 부탁으로 돈벌이가 되지 않는 단편 영화에 출연해 준 김도진이 고마워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음… 쉽지 않네.”
김도진이 혼잣말처럼 말하고는 다시 논두렁 근처로 향했다.
어쩔 수 없었다. 비록 20년 연기 생활을 한 베테랑 배우이긴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액션 배우.
<겨울 방학> 이후에도 시원시원하고 대중적인 영화에 줄곧 출연해 주로 강인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모습을 선보인 그이기에, 이번 연기는 쉽지 않았다.
직감이 좋은 김도진은 자신의 장단점도 잘 파악하고 있어, 액션 그리고 코미디 등 그간 자신이 잘하는 분야의 영화에만 출연해 왔다.
이 얘기는 내면의 복잡하고 깊은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입체적인 인물 역할은, 시나리오를 읽어 보고 모두 거절했다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취사 선택이 오랫동안 크나큰 침체기 없이 배우 생활을 지속해 온 그의 비결이기도 했다.
한데 생각지 않은 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하백원이 행복의 눈물을 흘리는 씬. 이는 한 사람의 다사다난한 일생이, 짧은 수 초로 응축되어 폭발적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고난도 씬이다.
이 같은 씬을 무리 없이 해내는 배우가 명배우로 칭송받고, 각종 연기상을 휩쓴다.
아쉽게도 김도진은 인기 배우였지만, 명배우는 아니었다. 즉 특유의 매력으로 대중들의 호감을 사는 데는 능하지만, 섬세한 내면 연기에는 능하지 못했다.
“레이디, 액션!”
그럼에도 촬영은 계속 진행됐으나, 연기가 연신 중단됐다.
정우현은 물론 김도진 본인도 만족스럽지 않은 컷이 계속됐다.
“…아아.”
김도진이 홀로 탄식을 내뱉었다.
스태프들도 조금은 지쳐 말없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우현 뒤에서 가만히 있던 영화의 또 다른 제작자들, 즉 권유라와 구태호 또한 배우 김도진과 친구 정우현을 번갈아 보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감독인 정우현에게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먼저 영화의 시나리오를 손보는 법.
즉, 이번 씬을 수정하거나 아예 삭제한다. 단적인 예로 이번 씬을 건너뛰고 하백원이 자승차를 만들어 성공한 이후의 엔딩 씬으로 곧장 나아갈 수 있다. 혹은 하백원이 복잡한 표정으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행복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그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는 씬으로 서사를 진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우현이 애초 의도한 하백원의 극적인 인생사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즉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그렇다면 나머지 방법은 어떻게든 배우를 잘 이끌어 이 씬을 성공적으로 촬영하는 것뿐이다.
사실 이야말로 감독이 촬영장에서 해야 하는 일이다.
“잠깐 쉬고 할게요!”
우선 정우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휴식을 취하자고 했다.
그러고는 곧장 김도진과 단둘이 자리를 함께했다.
“…미안하구나, 우현아.”
김도진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요, 삼촌! 잘하셨어요, 99%는 완성됐고 나머지 1%만 남은걸요.”
하고 밝은 목소리로 정우현이 말했다.
기가 죽은 김도진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었다.
촬영장에서 배우가 의기소침해지면, 좋은 씬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으음.”
그럼에도 김도진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에 정우현이 즉각 그를 불렀다.
“삼촌.”
“응?”
“그날 기억나세요? 우리 <겨울 방학> 때, 촬영 다 마치고 뒤풀이한 날.”
“…하하, 기억하지!”
소중한 추억에 김도진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그때 삼촌이, 제가 실외 화장실 간다니까 저를 위해 같이 식당 밖으로 나왔잖아요.”
“아, 응, 그랬지.”
“그리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식당으로 돌아오는 길,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벤치에 앉아 잠깐 저에게 지난 얘기를 해 주셨어요. 삼촌이 스무 살 때 지방에서 단돈 20만 원 들고 서울로 상경했다고. 오로지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래, 기억난다.”
“몹시 힘들었지만, 버티고 또 버텼다고 하셨죠. 그러다가는 마침내 이렇게 배우가 됐다면서요. 그 얘기를 하던 삼촌의 표정이 아직도 선해요. 기뻐하셨어요. 그렇게나 당당히, 멋진 배우가 된 자신의 모습에 한껏 미소를 지으셨죠.”
“….”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힘들었던 옛 추억에 잠기셨는지, 지금보다 더 어렸던 제가 보기에도 뭔가 애잔한 눈빛을 하셨어요.”
하고 정우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김도진을 불렀다.
“삼촌.”
“…응?”
“저는 솔직히, 어려서 잘 몰라요. 삼촌이 얼마나 힘들게, 스스로 독립하셔서, 지금처럼 멋지게 발돋움하셨는지.”
“…하하.”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압니다. 그날, 삼촌이 제 옆에서 많은 감정을 느끼고 계셨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억과 감정을 바탕으로 이렇게 흔들림 없는 배우가 되셨구나, 생각하는 겁니다.”
“….”
정우현의 말에 김도진이 깊은 상념에 젖었다.
그러고는 순간 눈을 부릅뜨고 굳은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우현아.”
“예.”
“다시, 시작하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