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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75)화 (75/200)

75화

에이치 자동차 소속 정우현의 작업장 안.

정우현과 권유라 그리고 구태호는 며칠간 이곳에 드나들며 팀 과제에 관해 토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과물이 나왔다.

그들은 영화를 촬영하기로 했다. 바로 단편 영화.

일단 기본 아이디어는 정우현이 제안했다. 벌써 오래전 일이 됐지만, 영화를 두 편이나 성공적으로 촬영한 경험이 있는 그가 셋이서 함께 영화를 만들자고 했다.

그리고 그 안에 정우현 본인은 물론 권유라, 그리고 구태호 모두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서사를 펼쳐 보이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셋은 일단 영화화할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정우현이 한국기술사(韓國技術史)라는 책을 살폈다. 친구들의 강점에 걸맞게, 기술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역사를 토대로 흥미로운 무언가가 없을까 찾았다.

그러다가는 마침내 괜찮아 보이는 소재를 하나 발견했다.

이내 정우현이 소재에 관해 공부를 한 뒤, 책 한 권을 준비하고서는 친구들과 함께했다.

“자승차 도해도(自乘車 圖解圖)?”

구태호가 정우현이 가져온 책 표지 한자를 보고 말했다. 책은 조선 시대에 쓰인 책의 필사본이었다.

“응.”

“이거 조선 후기 실학자인 하백원이 남긴 책 아니야?”

“하하, 역시 태호는 아는구나!”

“….”

권유라는 가만히 있었다. 정우현이 영화를 만들자 해 놓고, 웬 한자로 된 책을 가져오니 흥미가 덜했다.

이에 정우현이 얼른 분위기를 파악하고 권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책은, 자승차라고 일종의 자동 양수기 즉 물을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퍼 올리는 기계의 설계도야. 한마디로 가뭄에 시달리던 농촌에 도움을 주기 위한 물건이지.”

“…진짜?”

기계의 설계도라는 말에 즉각 책에 관심을 보이는 공학도 권유라다.

“응, 하백원이 고안했는데 아쉽게도 실제로 제작되지는 못했어.”

정우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태호가 말을 이었다.

“심지어 그는 훗날 귀양을 가. 과학 정신을 바탕으로 각종 기계를 제작하지만, 선비가 괴이한 술수를 쓴다는 비난을 당하는 등 성리학의 벽에 부딪힌 거지.”

권유라는 잠자코 책을 펴 보았다.

역시나 책은 한자로 가득했지만, 놀랍게도 정말 기계의 모형과 설계도가 있었다.

정우현이 친구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이 자승차가 발명되는 과정을 다룰 거야.”

“…어떻게?”

구태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거지! 다만 끝에는 판타지 요소를 섞어, 영화 속 주인공인 하백원이 끝내 이 자승차를 개발해 실제와 달리 성공하는 모습을 그리는 거야.”

“아….”

“이 영화의 핵심은 세 가지야. 먼저 철저한 고증이 필요해. 19세기 초 전라남도 화순의 시대상과 실학자인 하백원의 인물상을 자료를 토대로 탄탄하게 묘사해야 하지.”

하고서 그가 구태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엔 물론 태호, 너의 능력이 필요하고.”

“으음!”

구태호가 괜스레 벅찬 감정을 느끼며 기합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 설계도를 토대로 실제 자승차를 만들어서, 영화 서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보일 거야. 그것도 단계적인 모형으로.”

하고서 정우현이 이번엔 권유라를 보고 말을 이었다.

“그러려면 유라, 또 너의 능력이 필요해.”

“맡겨만 줘.”

권유라가 오랜 설계도를 여전히 흥미로운 눈으로 보며 시선을 떼지 않고 답했다.

“다 만들어 버려야지.”

“하지만 마냥 쉽진 않을 거야. 어쨌든 실제 하백원은 이 설계도를 통해 자승차를 만들지는 못했거든. 즉 이론뿐이라는 거지. 분명 오류도 있을 테고.”

“걱정하지 마.”

권유라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오류를 수정하며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이란 전부 그런 거니까.”

과거 직접 자동차 엔진을 설계해 보고, 또 정우현을 도와 제작까지 해 본 경험이 있는 권유라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좋았어, 그럼 나머지는 나의 몫이야.”

하고서 정우현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를 바탕으로 먼저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써야지. 역사지만 일종의 대체 역사. 즉 실제로는 불가능했던, 한 사람의 성공기를 조명하는 거야. 바로 실학자 하백원이 이 자승차를 멋지게 만들어 조선 농촌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다는.”

그러고서는 그가 모처럼 마음속으로 카메라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연출까지 잘하면, 이로써 약 30분 분량의 단편 영화가 완성된다!”

정우현의 말에 친구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러고서는 구태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 과제로 강조할 수 있는 포인트 또한 세 가지 정도 되겠군! 먼저 각종 사료를 토대로 조선 후기 실학자를 사실적인 모습으로 살피는 역사적 가치!”

그 다음으로는 권유라가 말했다.

“또한 오랜 설계도로만 남아 있었던 자승차를 실제 구현해 내는 기계 공학적 가치.”

이에 정우현도 얼른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 모두를 카메라에 담아 한 편의 극적인 이야기로 펼쳐 보이는 예술적 가치.”

하고서 셋은 잠시 말을 않고 서로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완벽해! 완벽 그 자체야!”

그러다가는 구태호가 크게 외쳤다.

“하하하하.”

이에 권유라도 즐거워하며 웃었다.

정우현은 그런 두 친구를 미소를 띤 채 바라봤다.

* * *

영화 제작은 곧장 진행됐다.

먼저 구태호가 하백원과 관련된 사료를 샅샅이 살펴봤다.

현재로서 그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사료를 전부 검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고서는 그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정우현에게 넘겼다.

그러면 정우현은 해당 자료를 토대로 시나리오를 썼다. 즉, 태어나서 처음으로 글다운 글을 썼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다른 무언가에 집중할 때처럼 막힘이 없었다. 오히려 글을 쓰는 게, 이렇게나 즐거운 일일 수 있구나 뒤늦게 깨닫기까지 했다.

비록 컴퓨터 문서 프로그램에 쓰는 디지털 활자에 불과했지만, 글을 쓰는 내내 하백원과 그의 숨결 그리고 발명품이 생생히 눈앞에 있는 듯했다. 그렇게 글쓰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는 한편 권유라는 하백원의 저서 <자승차 도해도>를 면밀히 분석했다.

계량 단위나 표현 등을 먼저 현대적으로 바꾼 다음 곧장 실용적으로 쓸 수 있게 연구했다.

이에 그녀는 이내 두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바로 자승차 내 물의 하강 운동에서는 동력이 전달될 수 없다는 점과 모래나 흙 등이 기계 내부에 쌓이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권유라는 궁리한 끝에 해당 문제를 해결하고서는, 현실적으로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설계도를 완성했다.

그러고는 곧장 제작에 들어가 나무로 된 양수기를 만들고서, 마침내 시 운전까지 성공적으로 끝냈다.

즉 오랜 책 속에만 남아 있던 자승차가 2005년 오늘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이 세 작업 즉 사료 수집 및 연구와 시나리오 창작, 그리고 기계 제작이 모두 별개로 이루어진 건 아니고, 그때그때 셋은 서로 긴밀히 협의해 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줬다.

그리고 다시 정우현의 작업장.

그들 앞에는 두 가지의 결과물이 놓였다.

바로 A4지 30장 분량의 단편 영화 시나리오와 현대판 자승차였다.

“수고했어.”

정우현이 권유라와 구태호를 보고 말했다.

“우현이 너도!”

구태호가 곧장 답했다.

“아아, 뿌듯하다….”

권유라가 그들의 결과물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다시 구태호가 말했다.

“뭘 해야지?”

“하하.”

이에 정우현이 웃으며 답했다.

“영화를 촬영해야지!”

“어떻게?”

사료 수집과 시나리오 창작 그리고 자승차 복원에만 집중해 실제 영화는 어떻게 촬영할지에 관해서 셋은 아직 얘기가 없었다.

그리고 영화 감상도 아니고 제작이라면, 권유라와 구태호는 실상 문외한에 가까웠다.

“일단 주인공.”

그럼에도 권유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주인공이 있어야 하잖아? 하백원을 연기할 30대의 남자가!”

“그렇지!”

정우현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에 친구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배우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런 정보도 없었으니까.

“하하, 사실은….”

하고 정우현이 말을 이으려는데, 마침 그의 핸드폰이 울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아, 거의 다 오셨다고요? 네! 저는 그 안에 있어요! 주차하실 때는 그냥 제 이름 대시면 돼요!”

하고서 그가 몇 마디를 더 하고서는 전화를 끊었다.

이에 곧장 구태호가 물었다.

“…누구야?”

그러자 정우현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하백원!”

“….”

“이제 곧 여기로 하백원이 올 거야!”

* * *

“우현아!”

이윽고 작업장 안으로 마흔 살이 조금 안 되는, 짧은 머리를 한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가 들어왔다.

“와!”

배우였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배우.

“김도진이잖아!”

바로 지난날 정우현의 데뷔작 <겨울 방학>에서 그의 깡패 삼촌으로 열연한 김도진이었다.

“…태호야!”

권유라가 구태호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영화 속 인물도 아니고, 엄연히 훨씬 연장자인 김도진 이름 석 자를 아무런 존칭도 붙이지 않고 크게 말했으니 그럴 만했다.

“하하하하. 괜찮다, 괜찮아.”

김도진이 그런 구태호를 보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뭐, 많이들 그런단다. 사람들이 갑자기 날 보면 말이야.”

“아, 죄송해요!”

구태호가 즉각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괜찮다니까.”

하고 김도진이 말을 이었다.

“우리 우현이 친구들이니, 앞으로 가깝게 지내야지, 하하!”

“삼촌!”

정우현이 김도진을 불렀다.

“하하하, 우현아! 이게 얼마 만이지?”

“한 1년 됐나요?”

정우현은 작년에 김도진을 만났었다. 역시 <겨울 방학>의 장필도 감독과 함께.

셋은 <겨울 방학>이후 오랫동안, 가끔이라도 연락을 주고받고 때로 만나기까지 했다.

그렇게 영화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친밀하게 지내 왔다.

그러면서도 장필도와 김도진은 조금 아쉬워했다. 정우현이 할리우드에서 촬영한 <인크레더블 킹 보이> 이후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있어서.

특히 장필도 감독은 여러 차례 정우현에게 자신의 시나리오를 보내 주며 출연 제의를 했지만, 정우현은 그때마다 정중하게 거절했다. 당장은 공부 등 다른 것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데 이번에 뜻밖에도 김도진이, 정우현으로부터 놀라운 연락을 받았다.

무려 단편 영화에 출연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에 김도진이 바로 응했다. 마침 영화 촬영이 한 편 끝나 휴식기였고, 결정적으로 정우현의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정우현이 단편 영화임에도 고액의 출연료를 제시했지만, 김도진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 또한 오랜 세월 꾸준히 배우 활동을 한 덕에 돈이라면 부족함이 없었고, 무엇보다 오랜 인연인 정우현이 만드는 영화였으니까. 즉 그는 애초 정우현에게 제의를 받았을 때부터, 시나리오가 어떻든 간에 일종의 우정 출연을 하기로 일찍이 마음을 먹었다. 상업 영화도 아니기에 더 그런 마음이었다.

“세상에 우리 우현이가 메가폰을 잡는다니, 삼촌은 너무 신난다!”

“하하하, 삼촌! 저 혼자 만드는 게 아니고, 여기 친구들이랑 같이 만드는 거예요!”

“그래, 그래, 하여간!”

하고서 김도진이 고개를 돌려 작업대 위에 있는 시나리오를 봤다.

“이거니?”

“예, 이틀 전에 막 완성했어요!”

“오, 그렇구나!”

하고 그가 팔을 뻗어 시나리오를 손에 들었다.

그러고서는 첫 장부터 빠르게 시나리오를 훑으며 읽었다.

약 20년 가까이 연기 생활을 한 베테랑 배우답게,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라면 나름 도가 튼 김도진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애초 직감이 좋기도 했다. 일찌감치 히트할 시나리오의 영화를 제법 잘 고를 수 있다는 강점은 <겨울 방학>을 촬영할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가 정우현의 시나리오를 읽고 있는 것이다.

정우현은 내심 긴장됐다.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영화와 관련된 사람에게 보이는 건 처음이니까.

이 시나리오는 지금까지 다섯 명에게만 보여 줬다.

바로 함께 작업한 권유라와 구태호 그리고 집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이었다.

모두 시나리오를 읽고 괜찮다, 재밌다, 좋다 등의 긍정적인 얘기를 했지만, 정우현은 내심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 다 어쨌든 영화 전문가들은 아니었으니까.

한데 처음으로 현역 배우, 그것도 인기 배우가 자신의 시나리오를 읽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우현은 물론 옆에 있는 권유라와 구태호도 긴장한 채 시나리오를 읽는 김도진을 말없이 바라봤다.

아무리 정우현 혼자 시나리오를 썼다고는 해도, 엄밀히 하면 그들 모두의 결과물이었기에 정우현과 다를 바 없는 마음이었다.

“우현아.”

마침내 김도진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서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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