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청담동 정우현네 집.
정우현이 자신의 방 안에서 구태호네 아버지가 준 쪽지를 가만히 보고 있다.
한 사람의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이 적혀 있는, 별다를 것도 없는 평범한 쪽지.
한데 그것을 돈이나 보석보다 더 귀한 듯 자랑스럽게 선물로 주는 것에서, 정우현은 사람의 지위에 관해 생각하게 됐다.
친구 구태호의 아버지가 현직 검찰 총장인 건 알고 있었다. 한국 영재 학교에서 구태호를 알게 되자마자, 그가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조금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혔으니까.
물론 그때는 그냥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 번호와 이메일을 따로 받아 보니, 삶에 있어 단순히 돈 이상으로 사회적 입지와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 *
해가 바뀌어 2003년.
정우현은 겨울 방학을 맞이해 여유를 즐겼다.
집에서 쉬며 보고 싶은 책이나 영화를 잔뜩 보고, 가족들과 함께하며 국내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예전과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이전에는 가족이 무얼 하든 거의 정우현의 돈을 썼는데, 지금은 모두 부모가 번 돈으로 충당한다는 것이다.
부모는 정우현의 빌딩을 관리하는 한편 자체 임대 사업도 착실히 키워, 이제는 누가 봐도 재력이 있는 중년의 부부로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진지한 표정으로 정우현의 방에 들어왔다.
“아들.”
“예?”
“아들 빌딩 말이야.”
“아, 네.”
“그거 건물 관리 엄마랑 아빠가 하고 있잖아.”
“그렇죠.”
하고서 정우현은 생각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이제 빌딩 관리에서 손을 떼는가 보다 하고.
생각해보면 부모는 정우현의 빌딩을 관리하는 대가로, 더 이상 임대료의 10%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 돈을 받지 않아도 이제는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건물 관리란 게 보통 일이 아니라서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아 꽤나 시간을 투자해야 하기도 했다.
즉 정우현이 보기에 부모님이 이제는 자신의 빌딩 관리에서 손을 떼고 쉬엄쉬엄 더 여유롭게 지내면 좋을 것 같았다.
“근데 관리 수당이랍시고, 이제 임대료에서 따로 떼어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네?”
어머니의 말이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아 정우현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한테 돈, 안 줘도 된다고.”
“…관리는 계속하시면서요?”
“응! 근데 이제 우리도 여유가 생겨서 굳이 아들한테 돈을 또 받을 필요가….”
하는데 정우현이 어머니의 말을 끊었다.
“아니요!”
“…응?”
“일을 하셨으면 돈을 받으셔야죠. 필요 없으시면, 안 하시면 되고요!”
“…아니다, 아니야. 그 일이 얼마나 보람찬데. 덕분에 아들 빌딩도 더 번창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받으셔야죠! 솔직히 지금보다 더 받으셔도 돼요!”
“…음.”
어머니가 입을 다물고는 잠시 고심하기 시작했다.
아들 정우현의 성격과 그간의 일로 미루어 봤을 때, 절대 그의 뜻을 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즉, 지금처럼 일을 하면 무조건 돈을 받아야만 했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하는 건 또 싫었다. 수년간 빌딩을 관리하는 가운데, 건물 내 점포가 바뀌는 일은 드물었다. 어쩌다 바뀌어도, 사업이 잘돼서 더 큰 점포를 찾아 확장 이전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여러 업체의 사장들과 친분을 쌓게 됐고, 그중에는 아예 개인적으로 연락을 나누며 가까워진 사람들도 있었다.
한데 그런 사람들을 두고 관리를 그만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남편과 자신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분명 다른 사람이 고용되어 건물 관리를 하게 될 텐데, 그 또한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간 애써 탄탄히 해 놓은 빌딩과 여러 사업장이, 새 관리인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 분위기가 안 좋아지기라도 하면 어쩔 텐가.
심지어 다른 누구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정우현의 빌딩인데.
어머니가 이런 생각을 하다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우현아.”
“네?”
“엄마가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
“뭐요?”
“아들이 주는 그 돈.”
하고서 어머니가 어울리지 않게 살며시 아들 정우현의 눈치를 봤다.
“예.”
“다현이 주는 거야.”
“…아.”
“엄마랑 아빠는 이제 괜찮은데, 아들은 주고 싶다고 하니까, 그 돈을 대신 동생인 다현이 주는 거야. 어때?”
사실 어머니는 정우현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동생인 정다현에게 그 돈을 주고 싶다면, 그저 이전처럼 건물을 관리한 대가로 정우현에게서 돈을 받고, 그대로 그것을 여동생 명의의 통장으로 입금하면 되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그러기까지, 정우현에게 알리고 또한 어디까지나 돈을 받는 입장으로서 일종의 허락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즉, 정우현 몰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하하하.”
정우현이 어머니의 물음에 바로 웃었다.
“당연히 되죠!”
정우현으로서도 나쁠 게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그러잖아도 그는 최근 여동생을 보며, 그녀에게도 무언가 특별히 도움이 되는 게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오빠로서 자라나는 동생을 보니, 더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어느덧 그녀는 집에서 가까운 사립 초등학교에 입학해 올해로 2학년이 되었다.
정우현 역시 한국 영재 학교를 다니는 틈틈이 동생을 돌봤는데, 그녀는 곧장 뛰어난 학습 태도로 학교 내에서 두각을 냈다.
사실 이 역시 정우현 덕이 컸다. 아주 어릴 때부터 온갖 유아 교육 지식을 다해 동생을 돌봤다. 그리고 그녀가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나이부터는 독서 지도까지 했다.
그러는 한편 가끔 같이 밖에서 놀기라도 하면, 주변의 동식물 즉 곤충이나 야생 풀 하다못해 하늘의 구름을 보고서도 이것저것 알려 주며 여러 방면에 있어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 그는 여동생과 함께할 때면 일종의 선생이 되고는 했다. 동생을 잘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 결과 그녀는 보통의 또래 아이들보다 지적으로 더 발달했다. 전생의 그녀는 정우현처럼 공부를 그리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지만, 이번엔 달랐던 것이다.
“잘됐어요!”
한데 이번에 어머니가 원래 자신으로부터 받던 돈을 동생을 준다고 하니 이래저래 안성맞춤이었다.
“역시 우리 아들….”
어머니가 단순히 동의하는 것을 넘어 기뻐하는 정우현을 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어쩜 이렇게 멋있을까? 뭐든지 다 잘하고, 용감하고, 마음씨도 착하고 말이야.”
하는데 정우현이 어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엄마 닮아서 그렇죠!”
“어머!”
어머니가 조금 놀라다가는 이내 환히 웃었다.
정우현은 이제 열한 살. 덩치도 좀 커서, 이제 마냥 어린아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성인인 어머니보다 조금 작았던 것이다.
“하하하. 아이고, 우현아.”
러시아에서의 일로 가족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게 된 정우현이다.
정우현은 최근 가족과 이렇게 함께 즐겁게 웃을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 * *
며칠 후, 동생 정다현이 정우현의 방에 찾아왔다.
“오빠.”
“응?”
동생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면서 조용히 정우현의 앞에 다가와 섰다.
그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짧게 한마디 했다.
“고마워.”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하하, 용돈 때문에?”
“…그게 용돈인가.”
“오빠가 주는 돈이니까 용돈이지!”
“…세상에 한 달에 2천만 원이 넘는 용돈이 어딨어.”
“왜 없어? 있으면 있는 거지.”
하고서 정우현은 동생의 얼굴을 슬며시 살피고서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다현아.”
“응?”
“그 돈, 어디다 쓰게?”
“아….”
하더니 동생이 잠깐 생각하고서는 말했다.
“…몰라. 일단 모을 거야.”
“모은다고?”
“응.”
“으음.”
정우현은 물론 동생을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그녀가 성장해 성인이 되는 모습을 봤으니까.
동생은 사치는커녕 좀처럼 돈을 쓸 줄 모르는 것에서 부모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 어쩌다 돈이 좀 생기면 어머니 병원비에 보태고는 그저 저축했다. 즉 전생의 정우현과 역시 또 비슷했다.
그래서 이번 삶, 비록 어린 나이지만 그녀의 손에 벌써부터 큰돈이 생긴다 해도 그리 걱정이 되지 않았다.
또한 비록 그 돈은 동생 것이라고는 하지만, 정우현과 달리 동생은 아직 경제 활동을 하려면 한참 멀었기에 필시 부모가 관리할 터였다. 그래서 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하여간 고마워.”
한 번 더 고맙다고 하는 동생이다.
“엄마 아빠한테는 고맙다고 했어?”
물론 정우현 본인이 주는 돈이지만 원래 부모님께 드리기로 한 돈이기에 이렇게 물었다.
“응.”
“그래, 다현아.”
하고서 정우현이 그녀 앞에서 다시 오빠이자 선생의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나한테 다달이 큰돈을 받게 됐어.”
“….”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으음….”
동생이 짐짓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조금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오빠한테 더 잘해야지….”
“하하하하!”
정우현은 그 모습이 귀엽고, 또 한편으로는 재밌어서 크게 웃었다.
“…왜?”
하지만 동생은 의아해서 곧장 물었다.
“하하하, 물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근데 다현아.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고.”
“그럼 뭐?”
“그러니까, 다현이 지금도 잘하는 거 물론 알고 있지만, 앞으로도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고 친구들이랑은 사이 좋게 지내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좋은 책 많이 읽고, 좋은 생각도 많이 하고 그러라는 거야!”
“아….”
하고서 동생이 곧장 말을 이었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정말?”
“응.”
그러고는 동생이 다시 조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오빠, 나 이틀 전에.”
“응?”
정우현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내성적인 동생은 가족에게도 좀처럼 미주알고주알 자기 얘기를 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무언가를 말할 때면 모두가 그녀에게 집중하고는 했다.
“백 점 맞았어. 산수.”
“오오오!”
“선생님이 일부러 어렵게 내려고 아직 안 배운 분수 문제까지 냈거든? 근데 내가 다 맞혔어.”
“잘했어!”
여동생 정다현은 일찍이 교과 과정을 넘어 선행 학습을 했다. 모두 정우현이 지도한 덕이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 잘할 거야.”
“그래, 그래,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고서 여동생이 조금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오빠 동생이잖아. 그러니까 잘할 거야.”
그러고서 동생은 정우현의 방에서 나갔다.
정우현은 그런 동생의 뒷모습을 미소를 띤 채 바라봤다.
이번 삶에서도 여전히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동생이지만, 정우현은 전생의 경험이 있다. 즉 그 시간까지 하면 대략 40년이라는 짧지 않은 삶을 산 사람이 정우현이다.
그런 그의 눈에 올해 아홉 살짜리 여동생은, 그야말로 마냥 귀여울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전생에서도 속 한 번 썩이지 않는 동생이었기에, 이번 삶에 그런 그녀와 함께하니 때로는 동생이 아니라 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그녀에게 정우현은 영원히 오빠이지만 말이다.
* * *
한편 한파가 찾아온 2월 초의 어느 날, 권유라에게 전화가 왔다.
권유라와는 물론 구태호까지 셋이서 방학에도 종종 만나서 놀았으나, 날씨가 최근 너무 추워져서 며칠 집에만 있으며 핸드폰으로만 연락하고 있었다.
“우현아!”
“응?”
“너, 다음 주 금요일에 시간 돼?”
“다음 주?”
“응.”
“딱히 아직 뭐 없으니까… 근데 왜?”
“아.”
하고서 권유라가 어울리지 않게 조금은 뜸을 들이고는 답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너, 만나고 싶대.”
“…할아버지?”
“…응!”
그러니까, 에이치 그룹의 회장이 정우현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이번에 우리 아빠를 포함해서 회사 그룹 임원들 모두 모이는 자리가 있거든? 근데 그 자리에 할아버지 이름으로 널 초대한 거야.”
“아….”
“어떻게, 와 줄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