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리더가 또렷한 목소리로 정우현의 이름 석 자를 불렀다.
“….”
이에 정우현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리더가 곧장 정우현에게 가려다가는, 들고 있던 AK 소총을 한번 쓱 보더니 무대 위에 내려놓고서 객석으로 향했다.
그러고서 긴장과 불안함, 그리고 약간의 마지못한 온화함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하고 정우현에게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일단, 네 뜻대로 하기로 했다.”
“잘하셨어요!”
정우현이 즉각 힘차게 답했다.
“지금까지, 이 정도만 해도 러시아와 대항하고자 하는 체첸의 뜻이 충분히 알려졌을 거예요. 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예요! 그러니까 아주 잘 결정하신 거예요!”
행여 마음이 바뀔까, 테러리스트 리더를 얼른 북돋아 주는 정우현이다.
“곧 모두가 웃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으음….”
그럼에도 리더는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소리를 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린아이와 임산부 그리고 외국인들을 석방시킨 것부터 해서 모두 정우현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테러리스트들이 더 이상의 인질극은 포기하고 평화적인 해결을 추구하는 것 또한 정우현이 주도권을 가지고 설득한 덕분이었다.
이에 리더가 아예 정우현에게 앞으로의 행동을 묻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인질들을 다 석방하면, 우리들의 안전 또한 보장할 것이라고는 했다.”
“오, 정말요?”
하고 물었으나, 정우현은 사실 이 또한 예상하고 있었다.
체첸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는 가운데, 정말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고 평화적으로 인질들을 구해 내는 건 불가능함을 러시아도 감안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정우현은, 러시아가 최소한 테러리스트의 신변에 관한 모종의 제안을 대가로 인질의 안전을 꾀했으리라 전망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죠!”
하면서도 정우현이 리더에게 한 가지를 요청했다.
“제가 러시아 측과 교신해 보고 싶어요!”
“…네가?”
리더가 놀라며 물었다.
“예!”
“왜?”
“그들도 인질이 모두 무사한지 알고 싶을 거예요! 또 저는, 어쨌든 몇 년 전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촬영한….”
하고 정우현이 자신의 국제적 인지도를 내세우며 이 점을 활용하면 러시아 측과 대화를 나눌 때 유용한 점이 여럿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하려는데, 리더가 불쑥 입을 열며 말했다.
“…안다, 알아. <인크레더블 킹 보이>의 정우현이지….”
하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렴풋한 미소까지 지었다.
자신이 벌인 인질극을 결국 평화적으로 끝내기로 마음을 먹자 긴장이 다소 풀리며, 그간 억눌렀던 팬심이 슬며시 드러난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정우현은 이제야, 테러리스트 리더가 유독 자신만 대하면 표정이 풀어지고 태도가 다소 유순해지는 이유를 정확히 이해했다. 그 역시 자신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리더가 자신이 배우임을 알고 있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인질극 초기에 자신을 보자마자 이름을 불렀으니까.
하지만 안다면 얼마나 아는지,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에 관해서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즉 정보가 부족했다.
하지만 방금 그가 지은 미소로써 이제 알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숱하게 스쳐 왔던 국내외 수많은 팬이 자신을 대할 때의 모습과, 리더 또한 솔직히 크게 다르지 않음을.
“….”
리더가 말없이 무대로 가더니, 핸드폰을 하나 가져와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정우현에게 건넸다.
테러리스트들은 주로 무전기로 러시아 측과 교신을 하는 가운데, 이 핸드폰으로도 이따금 그들과 통화를 하곤 했었다.
“Ты решил? (결정했는가?)”
전화기 넘어 중년의 남성 목소리가 들렸다. 체첸 출신으로 러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 언론인이었다. 해당 언론인이 러시아 측 대표로 그간 테러리스트들과 얘기를 했던 것이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최후통첩을 전달한 뒤, 아직 테러리스트들로부터 확답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정우현이 즉각 답했다.
“예! 모두 석방하기로 했습니다!”
“…오오, 신이시여… 다행이군!”
하면서도 언론인이 의아한 목소리로 곧장 물었다.
“…근데, 당신은 누구지?”
분명 전화기 넘어 이제까지 몇 마디 얘기를 나눴던 성인 테러리스트들이 아닌,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묻는 말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우현입니다!”
“…오오… 정우현?”
하고 되물으면서도, 이내 괜찮냐고 묻는 언론인이다.
“예, 괜찮아요! 러시아인을 포함한 모든 민간인이 전부 무사합니다!”
“…아아!”
언론인은 물론 안에 세계적 스타이자 천재 수학자인 정우현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한국 영재 학교 소속 학생과 선생들이 일찌감치 대거 풀려나면서 안에 정우현이 있다고 러시아 측은 물론 여기저기에 온통 알린 것이다.
정우현은 러시아 측 언론인과 몇 마디 더 얘기를 나누다가는, 마지막 확인차 한마디 물었다.
“그런데 밖에 러시아 말고 해외 다른 국가의 언론도 와 있나요?”
“…당연하지!”
러시아 측 언론인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곧장 답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전화를 바꿔 드릴게요!”
하고서 전화기를 테러리스트 리더에게 넘겼다. 리더 입으로 이제 인질을 모두 석방할 것이라 직접 밝히고 러시아 측과 그 과정에 관해 얘기를 나눠야 할 터였다.
사실 정우현이 러시아 측과 전화를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러시아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인질 석방을 조건으로 테러리스트의 안전을 보장한다 해 놓고, 테러리스트가 틈을 보이는 즉시 러시아군이 군사 작전을 감행하며 이곳 극장에 들이닥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민간인 또한 다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한 가지 물은 게 있었으니, 바로 해외 언론의 존재 여부였다.
해외 언론이 있다면 현재 러시아군과 테러리스트의 대치 상황이 전 세계적으로 생중계되고 있을 것이기에 그와 같은 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 즉 마침내 인질을 석방하며 평화적인 해결을 꾀하는 테러리스트를 러시아군이 무력으로 진압할 수는 없을 거라는 얘기다. 만약 그런다면 카메라를 통해 모든 영상이 낱낱이 방영되어, 국제적인 비난을 피할 수 없으니까.
사실 유수의 해외 언론들이 안전거리 확보 차 극장에서 떨어진 채 러시아군 못지않게 진을 치고 있는 이유는, 테러도 테러지만 정우현 때문이기도 했다. 테러리스트들이 점거한 예술 극장 안에 세계적 유명 인사인 정우현이 있다는 것만으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기에 충분했다.
“….”
리더가 드디어 전화를 끊고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러고는 한순간 러시아어로 크게 소리쳤다.
“모두 일어나서 뒷문으로 가도록!”
“….”
이에 관객들이 어안이 벙벙해서는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그간 정우현 그리고 부빈 선생과 테러리스트 리더가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체첸어로 대화를 했기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리더가 머뭇거리는 인질들을 보고 다시 소리쳤다.
“자, 얼른! 전부 뒤로 가라! 너희들은, 이제 자유다!”
“와아아아…!”
사람들이 놀라더니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 상황이 오히려 믿기지 않는다는 듯 테러리스트 리더를 몇 번 살펴보다가,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뒷문으로 향했다.
정우현도 뒷문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발걸음을 옮겨 그들을 살피려 하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우현!”
“예?”
리더였다. 리더가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하는 것이다.
“…미안하고, 고맙다. 너와 그리고 우리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란다.”
“틀리지 않아요!”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그러니까 일단, 끝까지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이 일이 끝나기만을 소망해요!”
“…그래.”
그러고는 이윽고 뒷문이 열렸고 이내 중문까지 열려, 극장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드디어 외부 사람들을 눈앞에 두게 됐다.
“아아아아아!”
러시아군은 물론 테러리스트와 민간인들의 석방 절차에 관해 합의를 봤음에도,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총구를 여전히 문 사이로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약속한 대로 민간인들이 우르르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그들은 마음을 놓게 됐다.
물론 끝이 아니었다. 테러리스트들 또한 나와야 하니까. 그것도 무장하지 않은 채로.
민간인들이 한창 나오고 있는 가운데 누군가가 그들 가운데 애타게 정우현을 찾았다.
권유라와 엄규환이었다.
권유라가 극장에서 나온 뒤 한시도 움직이지 않고 문만을 바라봤던 것이다. 정우현이 언제 나올까 하고.
엄규환은 엄규환대로 정우현이 뮤지컬을 관람하기 위해 들어간 예술 극장에서 인질극이 일어났음을 전해 듣고, 권유라의 경호원과 함께 곧장 극장으로 향했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미 러시아 경찰이 출입을 막고 있던 것이다.
“…우현아! 우현아!”
“도련님!”
하지만 아직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둘은 점점 애타기 시작했고,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두려운 생각까지 하게 됐다.
“정우현!”
“아아아아아!”
그러다가는 권유라와 엄규환은 물론 사람들이 한순간 탄성을 내뱉었다.
민간인들이 다 나왔다고 생각될 즈음, 즉 문밖으로 나오는 민간인들이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는, 세 명의 사람들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우현과 부빈 선생, 그리고 러시아인 할머니였다.
정우현은 사람들이 뒷문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서도 일찌감치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자신이 맨 마지막으로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한데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부빈 선생이었다.
부빈은 극장에 남은 유일한 KGI 선생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우현을 끝까지 돌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이 끝에 남아 빈자리만 남은 객석을 둘러보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극장 한구석에서 할머니를 발견했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였다. 연로한 할머니였는데 이번 테러 사건으로 몹시 놀라 정신이 쇠약해져 거동이 불편해진 상태였다.
이에 정우현과 부빈 선생은 곧장 할머니에게로 가 그녀에게 말을 걸고서는 부축하며 천천히 문밖으로 나갔다.
이 세 사람이 마지막 민간인이었다.
“정우혀어어어언!”
“도련니이이임!”
권유라와 엄규환이 곧장 정우현에게 뛰어갔다.
“…우현아!”
특히 권유라는, 울음이 펑펑 쏟아졌다. 가뜩이나 정우현을 안에 두고 나와 거의 울면서 극장 문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이렇게 무사히 친구가 나오는 것을 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진 것이다.
“…하하하, 유라구나.”
정우현이 슬며시 미소 지으며 친구를 보고 말했다.
부축했던 할머니는 러시아인들에 의해 곧장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응?”
“하하, 다행이야, 모두 무사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엄청, 엄청 놀랐잖아!”
하고선 그녀가 정우현을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유라야, 다들 무사하잖아. 그럼 된 거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응? 절대 그러지 마!”
“하하하….”
부빈 선생이 정우현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권유라를 보며 말을 했다.
“유라가 많이 놀랐나 보구나.”
“….”
한편 엄규환은 무사히 나온 정우현을 보고 입술을 깨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실장님!”
오히려 정우현이 그런 엄규환을 올려다보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 아주 말짱해요!”
“…도련님….”
이에 엄규환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도련님을 곁에서 보호했어야 했는데, 자리에 없었으니 그만….”
“아니에요! 제가 따로 시간을 보내시라고 했잖아요! 어쨌든 실장님도 여행 온 건데, 그간 자기 시간은 한 번도 없이 제 곁에만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이번 일은….”
“에이, 누가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상상이나 했겠어요!”
하고서 오히려 엄규환을 감싸는 정우현이었다.
그러자 엄규환이 감격한 듯 잠자코 있다가는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도련님… 이번 일은 그래도 유라 아가씨 말이 맞습니다. 정말 큰일 날 뻔하셨어요….”
“우현아아아!”
이번엔 다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태호였다. 구태호 역시 극장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조금 뒤늦게 정우현을 발견하고 다가온 것이다.
“보고 싶었어!”
“하하, 태호야….”
구태호 역시 정우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아아아!”
한데 사람들이 다시 극장 쪽을 보고 놀라기 시작했다.
테러리스트였다. 테러리스트들이 모두, 총기와 폭탄을 버리고 맨몸으로, 양팔을 번쩍 든 채 천천히 문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러시아군은 즉각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러고서 일부 요원과 병사들은 테러리스트들과의 합의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듯, 어서 발포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휘권자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지휘권자가 몸을 돌려 뒤편의 사람들, 특히 수많은 해외 기자들과 카메라를 슬쩍 살피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즉각 외쳤다.
“все оружие вниз! (모두 총구 내려!)”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는 가운데, 인질을 모두 석방한 채 총기까지 버리며 투항하고자 하는 그들을 사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는 요원들이 테러리스트들에게 달려가, 그들 모두에게 수갑을 채우고 체포했다. 비록 안전 보장과 함께 제삼국 망명을 약속받았지만, 실제로 망명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러시아 측으로부터 조사를 받는 등 필요한 절차를 밟아야만 하는 그들이었다.
“…정우혀어어어언!”
한데 수갑을 찬 채 연행되고 있는 그들 중 누군가가 두리번거리며 정우현을 크게 불렀다.
이에 정우현이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살폈다.
리더였다, 테러리스트 리더가 자신을 찾는 것이다.
“오오.”
리더가 정우현을 보고는 이제는 아예 홀가분한 표정으로 크게 말했다.
“사인!”
“….”
“사인 좀 해다오! 진작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인질범과 인질이 아니라, 그저 팬으로 돌아가 스타인 정우현의 사인을 받고 싶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우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러고서는 그에게 소리쳤다.
“다시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마세요!”
“….”
이에 리더가 가만히 그를 보는 가운데 러시아 요원들에 의해 어딘가로 향했다.
그러다가는 좀 더 멀어졌을 즈음, 정우현을 보고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알겠다는 뜻이었다.
실상 사인을 한 번 해 주는 것은 정우현에게 별일이 아니다. 심지어 비록 인질로서 불가피하게 그와 인간적인 유대감을 나누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테러리스트 리더는 어디까지나 테러리스트. 애초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한 악인이다.
그런 자에게까지, 정우현은 사인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남은 삶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
이로써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인질극은 끝이 났다.
그리고 다행히도, 단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
물론 전부 정우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