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그렇게 해서 12세 미만의 아이들과 임산부, 그리고 외국인 모두가 뒷문 앞에 서 있었다.
물론 단 두 명만 빼고.
바로 정우현과 부빈 선생이었다.
한편 뒤에 있던 권유라가 뒤늦게 정우현이 곁에 없음을 깨닫고 두리번거렸다.
여기저기 마구 사람들이 일어나 뒤로 향하는 행렬에 속해 있다 보니, 정우현이 어디 있는지 챙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당연히 그가 뒤로 향하고 있겠거니 지레짐작하기도 했다.
이에 그녀가 절박하게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드디어 객석 한편에서 뒤를 바라보고 있는 정우현을 발견했다.
그러고는 한국어로 크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현아! 정우현!”
정우현은 물론 가만히 선 채, 뒤로 향하는 사람들 특히 KGI 선생들과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 즉 권유라와 구태호를 역시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그들이 무사히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데 권유라가 뒤늦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소리를 치는 것이다.
“정우혀어어어어어언!”
엄청난 목소리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물론 테러리스트들까지 그녀에게 주목했다.
“거기서 뭐해애애애애! 얼른 이리 와아아아아아!”
“….”
하지만 정우현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가로저었다.
자신은, 이곳에서 남아 있는 사람들 모두와 함께 밖에 나가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괜한 영웅심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다.
만약 정우현이 그럴 사람이었다면, 일찍이 CIA 내부망을 해킹해 9.11 테러를 막아 내고서는,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를 쳤을 테니. 내가 바로 어나니머스라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무고한 사람들이 괜스레 정치적 이유로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이었다.
즉 정우현은,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무사히 살리고 싶었다.
사실 애초 이렇게까지 남을 생각은 아니었으나, 부빈 선생이 자진해서 남아 사람들을 구출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러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여러모로 판단했을 때,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이라면, 이 사건을 단 한 사람의 사상도 없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강한 확신이 들었다.
벌써부터 오로지 그의 힘으로 12세 미만의 아이들과 임산부, 그리고 외국인 등 약 70명 즉 인질 700명 가운데 10분의 1을 무사히 석방하기로 합의를 이끌어 냈기에 더 자신감이 생겼다.
한편으로 이로써 정우현이 확인한 게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저들 테러리스트가 나름대로 합리적인 사람들이라는 것 즉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화가 가능한 상대라면, 나머지 사람들도 구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정우혀어어어어언!”
권유라가 계속해서 정우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어디까지나 아직 밖에 나가지 못해 극장 안에 붙잡혀 있는 인질로서, 튀는 행동을 하면 테러리스트들의 눈에 띄어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물론 모두 정우현을 위해서다. 당연히 함께 밖에 나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정우현이, 뒤로 나오지 않고 객석에 남아 있는 모습을 그녀는 두 눈을 뜨고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유라야!”
이에 정우현도 소리쳤다.
“걱정하지 마! 나도 금방 나갈게!”
“…안 돼애애애애애애!”
순간 테러리스트 리더도 의아해서는 정우현을 보고 다가왔다.
“…너는 나가지 않는 건가?”
“…예!”
“어째서?”
하고 리더가 그의 두 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우현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에 리더는 그가 조금도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히려 정우현은 리더를 보고 반문했다.
자신은 끝까지 남아 사람들과 함께할 것을, 알면서도 왜 물어보냐는 뜻이었다.
“…으음.”
솔직히 테러만 아니었으면, 마음 같아서 종이를 한 장 꺼내 사인을 받고 싶을 정도로 정우현의 팬인 리더였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애써 마음을 억누르며 내색하지 않았다.
한데 그런 정우현이 자진해서 나가지 않겠다니, 리더로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당장 판단이 되지 않았다.
“우현아아아아!”
그때 다시 친구가 정우현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엔 구태호였다. 구태호가 권유라 옆에서 자신을 보고는 팔을 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정우현은 답하지 않았다. 계속 친구들의 외침에 일일이 답을 하다가는, 좀처럼 그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른.”
그 대신 리더를 보고 체첸어로 또렷하게 말했다.
“저들을 내보내 주십시오. 약속대로.”
“….”
리더가 말없이 정우현을 바라보다가는 고개를 돌려 뒷문을 지키고 있는 동료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문을 열라는 뜻이었다.
이에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커다란 극장의 뒷문을 열었다.
이에 문 사이로 빛이 들어왔고, 문밖으로는 곧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아아!”
극장 뒷문 넘어 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 사이 중문 밖으로 러시아의 경찰 및 군들이 탱크까지 끌고 와 이곳 극장을 포위한 것이다.
러시아의 군 통수권자 즉 러 대통령의 말 한마디면, 이대로 극장을 초토화시키는 게 순식간이면 가능할 터였다.
다만 역시 무고한 민간인인 인질들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물론 중문을 지키고 있는 테러리스트가 있어, 극장 내부에 있는 테러리스트들도 무전을 통해 이와 같은 상황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광경을 보니 퍽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들은 조금 우왕좌왕하다가, 우선 아이들부터 문 사이로 앞세워 보냈다.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문이 열린 틈을 타 러시아군이 총을 쏘며 들이닥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우선 아이들을 보낸 것이다.
과연 러시아군은 갑작스레 열린 극장의 뒷문에 즉각 문 사이로 총구를 향했다가, 눈에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에 탄성을 내뱉으며 다시 총구를 거뒀다.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도 테러리스트들이 아이들을 풀어 준 게 분명했다.
“아니야, 난 안 갈 거야! 우현이 여기 두고 안 갈 거라구우우!”
“저도 안 가요!”
한편 KGI 학생들을 선두로 아이들이 거의 다 문밖으로 나갔는데 단 두 명의 아이가 발을 동동 굴리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권유라와 구태호였다. 오랜 두 친구가 정우현을 안에 두고 나갈 수 없다며 힘을 쓰는 것이다.
이에 수학 선생인 박주희가 즉각 권유라를 강제로 안고 섰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선생이 역시 구태호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 정우현과 시선을 한번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우현아아아…!”
친구들의 목소리가 극장 내부에 울려 퍼졌지만, 이내 작아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KGI의 몇몇 교사들이 뒤늦게 정우현을 데려가기 위해 뒤를 돌아 다시 객석으로 향했지만, 즉각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
“그만!”
객석으로 다가오면 총을 쏘겠다며 AK 소총의 총구를 그들을 향해 겨누기까지 한 것이다.
“외국인은 좋은 말할 때 그냥 나가라!”
이에 교사들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들고는 천천히 문밖으로 향했다.
문밖의 러시아군은 아이들과 임산부, 그리고 외국인까지 수십 명 나오는 것을 보고 일단 한시름을 놓았다.
쾅!
그러고서 곧장 커다란 문이 다시 닫혔다.
* * *
다시 문 닫힌 예술 극장 안.
고요했다.
아이들과 임산부, 그리고 외국인은 다 나가고, 이제 안에는 12세 이상의 러시아 사람들과 정우현 그리고 부빈 선생뿐이었다.
다만 부빈은 누가 봐도 러시아인처럼 보였기에 명백히 외국인에 심지어 아이인 사람은 정우현밖에 없었다.
“….”
리더 역시 조용히 주위를 둘러봤다.
정우현의 말대로 사람들을 일부 석방했다. 한데 그 과정상 잠깐 본 러시아군의 위용은 그야말로 무지막지했다.
단순히 상상만 하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리더 또한 각오하고 저지른 일이지만, 막상 군대를 눈앞에 두니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솔직히 애초 목숨을 걸지 않았다면, 벌써 투항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고 동료들을 격려했다. 자신보다 동료들이 더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록 폭탄을 전신에 두르기는 했지만, 한 여성 테러리스트는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에 그녀에게로 가 잠시 자리에 앉히고 폭탄을 몸에서 해제한 뒤 쉬게 해야만 했다.
이를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정우현이었다.
이미 자신의 계획대로 KGI 학생 및 교사를 모두 포함해 다수의 사람을 내보낼 수 있었다. 즉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했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도 내보내야 한다. 한데 상황이 나쁘지 않다. 잠깐 본 러시아 군의 위용에 의해, 테러리스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정우현은 분위기를 살피며 잠자코 있다가, 천천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고선 이때다 싶어, 작정했던 소리를 냈다.
“우후우우우.”
하는 허밍으로 시작되는 음악에 러시아 인질들은 물론 체첸 테러리스트들이 깜짝 놀랐다.
이에 거의 본능적으로 정우현을 제지하려 했으나, 이내 계속되는 그의 선율과 노랫말에 그들 모두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정우현이 완벽한 체첸어로 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끝내는 사람들 모두, 정우현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선율에 넋을 놓게 됐다.
이 순간 사람들은 인질범과 인질이 아니었다. 그저 천상의 선율을 노래하는 정우현 앞의 관객일 뿐이었다. 예술 극장이라는 장소가 이렇게나 적합하게 느껴질 때도 없었다.
이윽고 정우현이 노래를 마쳤다.
체첸 테러리스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들고 있던 총기를 모두 내려놓고 정우현의 노래에 흠뻑 빠져 있었다. 심지어 그들 중 누군가는 감격스러운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
그렇게 잠시, 사람들이 여운을 느꼈다.
그러다가는 한순간 리더가 천천히 다가와 정우현에게 말을 붙였다.
“…어떻게 이 노래를 알고 있지?”
“아, 과거 한국 드라마의 OST였어요!”
해당 노래는 소련에서 만들어졌는데, 체첸 출신의 민족 시인이 쓴 저항시를 바탕으로 작사된 유명한 음악이다.
구슬픈 선율에 서정적인 가사가 백미였고, 워낙 노래가 히트를 친 나머지 1995년 한국의 한 드라마의 사운드 트랙이 되기에 이른다.
“…대단하구나.”
“감사합니다.”
“이 노래의 의미 또한 알고 있니?”
“예! 체첸 민족을 형상화하고 있잖아요!”
“…그래.”
하고서 리더가 잠시간 말을 않았다.
노래와 대비되어, 현재 상황이 지나치게 역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우현이 감동적으로 불러 사람들의, 특히 테러리스트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이 노래는 체첸의 평화 독립을 꿈꾸는 노래다.
한데 지금 리더를 포함해 체첸인들은 여전히 러시아에 예속되어 있으며, 결정적으로 평화로운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지도 않다.
무려 무기를 들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으니.
“…저기.”
여전히 노래를 음미하는 듯 잠자코 있는 리더를 정우현 체첸어로 불렀다.
“…음?”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
리더가 가만히 있다가는 역시 체첸어로 작게 말했다.
“계속 협상을 할 거다. 체첸에서 러시아 군이 물러갈 때까지….”
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리더는 한낱 인질에 불과한 정우현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할 필요가 없다.
한데 워낙 그가 정우현의 팬이기도 했고, 또한 정우현이 자신의 모국어인 체첸어로 조국의 평화 독립을 꾀하는 노래를 무척 감명 깊게 불러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체첸어로 대화를 하니 주위 러시아 인질들은 어차피 알아들을 수 없어 마음을 놓은 것도 있었다.
심지어 리더는 극장을 포위한 러시아군의 위용에 마음이 동요하며 비록 인질범이지만, 인질과 비슷한 일종의 동질감 즉 리마 증후군을 느끼고 있었다. 리마 증후군이란 대중들에게보다 잘 알려진 스톡홀름 증후군의 반대 개념으로,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되는 게 아니라 인질범이 인질에게 동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즉 이런저런 이유로 테러리스트 리더가 오직 정우현에게만 마음을 털어놓게 된 것이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정우현이 즉각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되긴 힘들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니?”
리더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삼촌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러시아의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
하며 정우현은 은연중에 친근한 목소리로 리더를, 영어의 Uncle과 비슷한 친한 아저씨를 뜻하는 체첸어로 칭했다. 이 역시 리더가 받아들이기에 정우현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표현이었다.
리더는 정우현의 말을 따라 곰곰이 러시아의 대통령을 떠올렸다.
2002년 현재 러시아의 대통령은 놀랍게도 전생의 2022년에도 러시아의 현직 대통령으로 부임하고 있는 사람이다.
즉, 러시아 대통령은 헌법까지 입맛대로 바꾸는 등 실질적으로 독재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전생의 정우현은 단순히 러시아 대통령이 오래 역임을 한다고만 생각했으나, 이번 삶에서 국제 관계 및 세계 주요 국가의 지도자 등에 관해 학습하며 그가 평범한 정치인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마어마한 권력욕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번 인질극과 관련해 순순히 체첸 반군의 요구를 들어주며 체첸에서 러시아군을 철수시킬 리는 만무했다.
더군다나 그가 기억하기로 전생에 체첸이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끝내 분리 독립에 성공했다는 얘기는 어디서든 짧게나마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다.
즉, 정우현은 현재 테러리스트 리더가 헛된 꿈을 꾸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으음.”
리더가 한참을 고심하다가는 역시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우리의 적이지만, 엄청난 사람임은 부정할 수 없지.”
그러면서도 그는 쓸쓸한 표정으로 스스로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있겠니? 이미 우리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여기에 왔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요?”
정우현이 지지 않고 바로 반문했다.
“그래요, 이미 일은 벌어졌어요! 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으세요? 저들은 협상에 일절 응하지 않으리란 것을요! 그렇죠?”
“….”
리더가 정우현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실상 부정할 수 없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해서 대체 무엇이 달라질까요? 생각해 보세요! 삼촌과 동료들은 조국 체첸을 위한답시고 이렇게 목숨을 걸고 큰일을 벌였습니다, 심지어 여자들까지 대동해서요! 하지만 그럼에도 러시아군이 체첸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이 모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정우현이 좀 더 힘찬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해서 체첸에게 득이 될 게 단 하나도 없어요! 보세요! 이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을! 이들이 대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어째서 이렇게까지 벌벌 떨며 목숨을 위협받아야 하죠? 설령 이럼으로써 목적을 달성한다 해도, 사람들이 체첸을 좋게 볼까요? 아니요! 심지어 이번 일로 이들 민간인 중 단 한 명이라도 다친다면, 국제 사회는 오히려 체첸에 등을 돌리고 러시아에 더 힘을 실어 줄지도 몰라요!”
이 또한 옳은 말이었다. 전생에서 체첸은 이후, 국제 사회로부터 전반적으로 외면을 당하게 된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와 같은 인질극이 체첸을 고립시키는 데 크게 한몫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결과 체첸 내 친 러시아 세력이 주도권을 잡아, 독립의 꿈은 멀어지고 러시아 연방 내 자치 공화국으로 남고 마는 것이다.
“우현이의 말은 옳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조금은 어색한 발음의 체첸어로, 불쑥 말했다.
이에 리더가 즉각 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빈 선생이었다. 그간 잠자코 있었던 부빈 선생이 입을 연 것이다.
“…누구냐, 넌.”
리더의 물음에 부빈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우현이가 다니는 한국 영재 학교의 외국어 선생 알렉산더 부빈입니다.”
하고는 정우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즉각 말했다.
“맞아요, 이번에 저와 함께 여행 온 선생님이세요. 그리고, 외국인이시죠, 미국인!”
이에 리더가 정우현을 볼 때와는 달리 조금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없이 부빈을 바라봤다. 미국인이라고 하기엔 그가 러시아인 즉 슬라브족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즉 직모에 상대적으로 이목구비는 작아 얼굴이 짧으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을 줬다.
이와 같은 시선을 눈치챈 부빈이 곧장 입을 열었다.
“아아, 예, 저는 현재 미국인이지만, 원래 러시아 정확히 하면 소련 태생입니다.”
“….”
그러자 리더는 계속 입을 다물고 부빈을 주시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미국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며 공부를 했죠. 또한 귀화한 미국인으로서 미국의 국가 정책 및 대외 방침 또한 항상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고 선생의 모습으로 돌아가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태생으로서, 체첸과 러시아 사이의 일도 빼놓지 않고 확인하곤 하죠. 하여간 그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현이의 말이 옳다는 겁니다. 체첸이 러시아로부터 벗어나 자주권을 찾고 싶다면, 불가피하게 다른 동맹 즉 러시아와 대적할 수 있는 힘 있는 동맹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하자면 미국 같은 나라요.”
“…으음.”
“한데 미국은 공식적으로 테러와 관련된 국가나 세력은 어떤 지원도 하지 않겠다며, 대외 정책에 관해 일종의 윤리적인 선을 그은 지 오래입니다. 즉 우현이의 말대로, 이런 식으로 인질극을 벌이다가 사상자가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체첸은 장기적으로 국제 사회의 든든한 지지 없이 더욱 힘든 길을 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죠.”
“….”
정우현과 부빈의 말에 리더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당장 인질을 잡고 체첸 내 러시아군을 철수시키겠다는 눈앞의 목표에만 빠져 있었다. 그로 인해 자신과 동료는 차치하고, 자신이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조국 체첸이 어떻게 될지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리더가 그들의 말을 다 듣고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그러고서는 발걸음을 옮기며 짧게 말했다.
“생각 좀 해 보마.”
정우현이 잠자코 리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분명 그들의 설득이 효과가 있었다. 리더의 눈빛이 강하게 흔들렸으니까.
과연 리더는 동료들에게로 가더니 무언가를 긴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간중간 객석에 있는 정우현을 슬쩍 쳐다보기까지 했다.
그러다가는 한순간 외부와 통신도 했다. 러시아 측이었다.
사실 러시아는 계속해서 테러리스트들과 교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가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밝히고, 그에 관해 응할 수 없다는 러시아 측의 답변을 듣고서는 일부러 교신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이번에 다시 짧게나마 얘기를 나눴다.
물론 러시아 측의 내용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체첸 내 러시아군의 철수는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없으며, 다만 안에 있는 민간인들을 무사하게 모두 석방할 시, 테러리스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가운데 제삼국 망명을 주선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이 교신은 마지막이며, 자신들의 요구에 불응할 시 불가피하게 군사 작전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즉 테러리스트들에게 알리는 러시아군의 최후통첩이었다.
이에 테러리스트들은 자기들끼리 언성을 높이기도 했으나 금세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들 사이 어떤 무기력감마저 감돌기 시작했다.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곳에 봉착했음을 실감한 것이다.
그러다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몇 마디 더 수군거리더니, 한순간 리더가 일방적으로 크게 말하다가는 홱 뒤로 돌아 크게 소리쳤다.
“정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