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56)화 (56/200)

56화

2002년 10월 23일, 모스크바의 예술 극장 안.

40명의 테러리스트가 700여 명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

사실 이 사건은 전생에서도 실제 일어난 사건이다.

다만 2001년의 9.11 테러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은 만큼 당시 한국에서도 이 역시 작게 보도했다.

즉 이에 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는 물론 정우현도 예외가 아니었다.

9.11 테러와 달리 알지 못하는 사건이니 따로 대비할 수 없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한국 영재 학교 유럽 여행과 일정이 겹쳐 사고가 난 것이다.

“아아아….”

KGI 학생 및 교사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탄식만 내뱉었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사고는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사고니까.

사고를 당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비현실적인 일이,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는 현실 그 자체다. 그리고 누군가는 불가피하게 사고를 당한다. 이번엔 그 누군가가 KGI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한데 가만히 상황을 살피고 있던 정우현이 드디어 객석에서 일어났다.

테러리스트의 습격에 이어 글로벌 스타 정우현의 등장으로, 대다수의 러시아인을 포함한 민간인들은 도무지 경황이 없었다.

“정….”

테러리스트 리더가 정우현을 주의 깊게 보며 물었다.

“…우현 맞나?”

이에 정우현이 역시 즉각 답했다.

“예, 맞습니다!”

“아아아아!”

스스로 정우현임을 밝히는 그의 말에, 사람들이 다시 한번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는 그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우현이 여기 왜 온 거지?”

“그러게! 하지만, 지금 상황이, 아아…!”

“…신이시여, 부디 우리를 구하소서!”

리더가 사람들을 둘러보고 다시 소리쳤다.

“조용, 조용!”

이에 사람들이 재차 입을 다물었다.

다만 리더는 이번엔 천장에 총을 쏘진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정우현을 바로 앞에 두고 그러기가 왠지 마뜩잖은 것이다.

“….”

한편 옆에 있는 권유라와 구태호 심지어 한국 영재 학교의 선생들조차 숨을 죽이고 몸을 옹송그린 채, 그런 정우현을 가만히 올려보고 있었다.

일어서서는 흔들림 없이 테러리스트들을 바라보고 있는 정우현을.

정우현이 위험을 무릅쓰고 대담하게 손을 들어도 괜찮겠다고 판단한 이유가 몇 개 있었다.

첫째 비록 테러리스트이긴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민족을 위해 나름의 숭고한 이유에서 이와 같은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순전히 인질을 붙잡고 몸값을 요구하는 단순 범죄자였다면, 아무리 정우현이라 한들 쉽게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결코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실제 그들이 생각 이상으로 악해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무고한 사람들을 인질로 잡은 것 자체가 나쁜 짓이다. 다만 그들이 인질을 다루는 방식, 예컨대 괜한 살상이나 폭행은 일절 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서 이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특히 총을 오로지 천장을 향해서만 발포하는 것은….’

정우현이 총알 자국으로 구멍이 듬성듬성 난 천장을 잠시 보고 생각했다.

‘위협의 의미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오히려 인질들을 해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하지. 만약 이들이 어떻게든 공포감을 최대한 조성하고 자신들의 무시무시함과 악랄함을 과시하고 싶었다면, 인질들 앞에서 얼마든지 본보기로 사람을 골라 총을 쐈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만약 위험이 생긴다면, 오히려 러시아 정부의 테러리스트 소탕 과정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정말, 테러리스트들이 폭탄을 폭발시키거나 양측의 전투 과정으로 인해 크나큰 위험이 촉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정우현 자신의 특수성 때문이다. 즉 그는 우선 어리고 또한 검은 머리의 외국인이다. 거기에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다. 그럼에도 단순히 손을 들고 의견을 표출하는 것에서, 테러리스트들이 그를 함부로 한다면, 체첸 내 러시아군의 철수라는 인질극의 목적은 결코 달성할 수 없다.

이번 사태와 관련 없는 외국인에 글로벌 스타인 어린아이를 해쳤다는 것에서 국제 사회의 무지막지한 비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러시아는 오히려 명분을 얻고 테러리스트 소탕은 물론 체첸 내 군사 활동을 더욱 강화할 게 뻔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정우현이 용기를 내고 손을 들었다.

“…무슨 일이지?”

리더는 정우현에 관해 마구 아는 척하고, 친근하게 말하고 싶은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사뭇 경직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리 평소 좋아하는 정우현이지만, 목숨을 걸고 저지른 이 일을 괜한 실수로 그르쳐선 안 되니까.

“이대로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듭니다.”

정우현이 힘 있는 목소리로 짧게 한마디 했다.

“…뭐?”

리더가 의아해져 곧장 물었다.

“이대로는 체첸 내 러시아군 철수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우현의 당찬 말에 테러리스트들이 다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다소 동요했다.

이에 리더가 그들을 진정시키고 곧장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보십시오. 이곳엔 물론 러시아의 국민이 대다수지만, 저와 같은 외국인 그리고 아이들도 있습니다. 즉 인질로 삼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말이죠! 생각해 보세요! 행여 아이들과 외국인들에게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조국 체첸은 오히려 더욱더 고립될 것입니다. 국제 사회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

테러리스트들이 조용해졌다.

정우현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이와 외국인을 인질로 삼아 득을 볼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외부 사람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 무지막지한 테러리스트 악당이라는 꼬리표만 달게 될 터였다.

러시아와 대항하는 체첸 민족을 위해서라는 나름의 대의(大義)가 아니라 강도와 다를 바 없는 단순 악당으로 비칠수록 협상은 불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가 아까보다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쩌자는 거지…?”

“아이들과 외국인을 석방시켜 주십시오!”

“….”

정우현의 말에 리더가 입을 다물었다.

소년의 말이 일리가 있는 만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진심으로 그는 정우현의 제안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번 일과 관련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아이들과 외국인은 자유롭게 풀려나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나라들도 여러분의 투쟁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으음….”

리더가 천천히 뒤로 돌아 자신의 동료들에게로 갔다.

그러더니 한참을 얘기 나누다가는 끝내 다시 뒤로 돌았다.

그러고서 사람들을 향해 러시아어로 소리쳤다.

“지금부터 외국인과 아이들! 정확히 하면 12세 미만의 아이들만! 자리에서 일어나라!”

“…아아아!”

사람들이 기쁜 듯 웅성거리더니 외국인과 아이들이 천천히 일어섰다.

물론 한국 영재 학교 학생들과 선생들은 모두 일어났다. 전부 외국인에, 학생들은 심지어 12세 미만의 아이들이니까.

“…우현아!”

“아아!”

옆에 있던 권유라와 구태호도 일어나 정우현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정우현이, 자신의 목숨을 살렸기 때문이다.

“…대단하구나.”

그러고서 누군가는 정우현의 등을 토닥이며 영어로 말했는데, 바로 외국어 선생인 알렉산더 부빈이었다.

한데 부빈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선생님은 왜 안 일어나세요?”

“나는… 러시아 사람이다. 비록 미국에 귀화했지만, 애초 러시아 사람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미국인 즉 외국인이잖아요!”

“그래, 그렇지만…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니? 저들이 분명 그냥 내보내 주지 않을 거야. 언뜻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백인이라지만, 이쪽 사람들은 그런 백인들 사이에서 러시아 사람이라면 또 기막히게 알아보거든. 내 영어 억양부터 그렇고… 그리고 또….”

하고서는 부빈이 테러리스트와 인질로 잡힌 사람들을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왠지 중간에 나가고 싶지 않구나… 이 사태를, 어떻게든 끝까지 함께하며 저들 무고한 사람들을 구출하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싶어….”

소련 태생으로서 러시아인의 피가 흐르는 부빈이, 정치적 이유로 벌어진 이번 일에 일말의 책임감을 갖게 된 것이었다. 즉 그는 러시아 출신의 미국인으로서, 누구보다 사건을 중립적으로 바라보며 위기의식을 깊이 통감할 수 있었다.

이에 정우현이 부빈 선생을 보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한데 리더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다시 소리쳤다.

“조용!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는데, 왜들 그렇게 말이 많은가! 자, 얼른! 다 일어난 아이들과 외국인은 극장 뒤쪽으로 가라! 실시!”

테러리스트 리더의 말에 아이들과 외국인이 천천히 뒤로 향했다.

뒤쪽엔 물론 문을 지키는 다른 테러리스트가 있었다.

“…엄마!”

한데 정우현의 뒤편에서 대여섯 살쯤 되는 러시아인 아이가 울면서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엄마만 남겨 놓고 자기만 가기는 싫었던 것이다.

“알렉세이! 얼른 가렴! 엄마는 금방 갈게!”

“…가기 싫어요!”

하면서 엉엉 울고만 있었다.

이에 정우현이 즉각 러시아어로 말을 걸었다.

“괜찮아.”

“….”

눈물을 흘리던 러시아 아이가 정우현과 시선을 맞췄다.

“형이 책임지고 무사히 엄마도 밖으로 내보낼게. 그러니까 괜찮아.”

아이는 눈물을 훔치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은 안 나가요?”

역시 아이인 정우현은 지금 밖으로 나가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그러자 정우현이 잠시 생각하더니, 잠깐 부빈 선생을 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아이를 보고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응!”

“…왜요?”

“너희 어머니가 여기 계시잖니. 사람들 모두 무사히 밖에 나갈 때까지, 형은 여기 있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얼른 일어나서 뒤로 가렴!”

아이의 어머니가 정우현을 가만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재차 아들에게 말했다.

“그래, 알렉세이! 엄마는 꼭 무사히 나갈 거다! 그러니까 얼른 가!”

이에 아이가 정우현과 어머니를 번갈아 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서 드디어 어머니와 작별을 하고 정우현을 믿는다는 듯 그를 강렬히 한번 바라보더니 한순간 뒤로 돌아 문 쪽으로 향했다.

“…고맙습니다.”

아이의 어머니가 뒤로 향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본 뒤, 정우현에게 말했다.

이에 그가 즉각 답했다.

“천만에요. 서로 힘을 뭉쳐야 할 때입니다.”

“….”

아이의 어머니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흑흑흑….”

한데 어디선가 한 여자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정우현이 또 고개를 돌려보니, 놀랍게도 임산부가 앉아 있었다.

임신했음에도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일어나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것이다.

이에 정우현이 다시 목소리를 높여 테러리스트 리더를 불렀다.

“저기요!”

사람들의 이동에 한층 더 긴장한 리더가 정우현의 부름에 즉각 고개를 돌렸다.

“…뭐지?”

“…여기, 여기 임산부가 있어요!”

“….”

“임산부도 아이들과 준해서 대우해야 합니다! 배 속에 있는 새 생명이야말로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고귀한 존재입니다!”

“…으음.”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미 아이들을 석방하기로 결정한 마당에 임산부를 석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리더가 여전히 앉아 있는 12세 이상의 러시아인들을 보고 소리쳤다.

“…임산부도 일어나서 뒤로 가라!”

이에 흐느끼고 있던 임산부를 포함해 세 명의 임산부가 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더의 외침에 그들은 물론 그들의 남편 등 가족들도 몹시 기뻐했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흐느끼던 임산부가 뒤로 향하며 정우현에게 소리쳤다.

“….”

정우현은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한번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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