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50)화 (50/200)

50화

“우현아.”

“…응?”

한국 영재 학교 교정 안 쉬는 시간.

정우현이 구태호와 함께 실외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그중에는 권유라도 있었다.

권유라가 다른 아이들과 뛰어놀다가, 벤치에 앉아 있는 정우현과 구태호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이에 구태호도 팔을 들어서는 손을 흔들었다.

“유라, 과제 도와줬다고?”

“아, 응!”

“그럼….”

하고서 구태호가 주저하다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도와줄 수 있어?”

“과제? 당연하지!”

“…아, 고마워.”

자존심이 강한 구태호이기에 이와 같은 부탁을 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다행히 정우현을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친구로 인정을 하고, 또한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면서도 그와 가까웠기에 한 부탁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였다.

동시에 역시 친한 친구인 권유라가 정우현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듣고서, 이렇게 자신 또한 용기를 내 부탁을 할 수 있었다.

“하하하, 됐어! 우린 친구잖아!”

정우현이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그치?”

“응!”

“그럼, 오늘 끝나고 우리 집에 좀 가자!”

“아, 좋아!”

“네가 꼭 도와줬으면 하는 게 있어!”

하고서는 구태호가 슬며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치킨도 시켜 먹고….”

“하하하하!”

* * *

서초동 구태호네 집.

구태호네 어머니는 아들이 친구 정우현을 집에 데려오자 한껏 웃으며 말했다.

“우현이 왔구나!”

“안녕하세요!”

“하하하, 아줌마는 태호가 우리 우현이랑 노는 게 제일 좋더라!”

그러고서는 정우현과 구태호 말고 또 누군가를 찾는 듯 잠시 현관문 쪽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근데 유라는?”

“아, 유라는 오늘 집안 행사 있대!”

구태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아, 그래?”

하고서 구태호의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애들아! 좀만 기다리렴. 내가 맛있는 거 해 줄게!”

“네, 알겠습니다!”

정우현이 크게 답했다.

“엄마, 치킨도!”

이에 구태호도 얼른 한마디 했다.

* * *

구태호의 방 안.

정우현의 방 크기와 비슷했고 책들이 잔뜩 있는 것 또한 거의 같았다.

다만, 책이 대부분 역사서라거나 법률, 그리고 국내외 문학 전집 등 인문 사회 서적인 게 달랐다.

정우현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구태호의 책상 위에서 낡은 책 두 권을 발견했다.

“와아….”

그러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대단하다, 태호야.”

고서였다. 고서가 두 권 책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역시 우현이 넌 아는구나. 이 책이 무슨 책인지.”

“응. 고사기(古事記)랑 일본서기(日本書紀)잖아. 각각 8세기 초에 쓰인,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랑 왕실이 편찬한 정사(正史).”

“맞아, 하하!”

정우현이 두 고서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원문으로 되어 있는 건 나도 처음 보네….”

“…응! 아버지 서재에 있었어. 예전에 한번 일본에 방문했다가 현지 학자한테 얻었대! 아마 꽤 오래전에 원본을 베껴 쓴 필사본인가 봐.”

“으음….”

정우현이 두 고서를 더 자세히 봤다. 분명히 고대 일본인이 쓴 책이지만, 오늘날의 일본어 즉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하나도 있지 않고 온통 한자였다. 두 문자는 나중에야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 고대 중국어의 어법과 표현으로만 적힌 한문은 아니었다. 즉 한자의 음만을 일본 언어에 맞게 차용한 만요가나와 중국의 한문을 일본식으로 바꿔 쓴 변체한문(変体漢文)으로 쓰여 있었다.

한마디로 하자면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현대의 일본어가 아닌 고대 일본어로 쓴 책이었다.

“하하, 중국이나 우리나라 고서는 모두 고대 원문 그대로 해석했는데 말이야.”

하고 구태호가 일본의 두 고서를 보고 있는 정우현에게 말을 이었다.

“…이, 고대 일본어는 좀 어렵더라고. 이것만 해석하면, 과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구태호가 오늘 정우현을 자신의 집에 데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고대 일본어 해석을 도와 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구태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정우현이 계속 고서를 보다가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구태호를 보고 답했다.

“응!”

그렇게 정우현과 구태호는 일본의 고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다만 정우현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해 원문을 해석하면서 구태호에게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태호야, 우리나라의 향찰(鄕札) 알지?”

“응! 주로 신라 시대에 사용한, 우리 말을 한자의 음과 뜻으로 표현한 방법이잖아. 어순이나 표현까지 거의 모두 다!”

“응, 만요가나도 그거랑 비슷해. 보통 한자 하나가, 발음 혹은 뜻을 따라 일본어의 한 음절을 뜻하지.”

하면서 정우현이 일본서기에 적힌 한자를 짚으며 설명을 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어. 발음이 비슷할 경우 일본어의 두 음절 ‘しな’가 한자의 ‘信’처럼 한 음절로 표현되거나, 반대로 뜻 즉 한자의 훈이 비슷할 경우 감탄사인 일본어의 한 음절 ‘あ’가 한자에선 ‘嗚呼’ 두 음절로 표현되기도 하는 거야.”

“…아아.”

그러고는 정우현이 구태호의 노트에 한자까지 직접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변칙적인 표현도 있는데 예컨대 ‘山上復有山’라는 한자는 일본어로 밖으로 나가라는 동사의 활용형 ‘イデ’를 나타내기도 해. 나가다 라는 뜻의 한자 ‘出’를 쓰지 않고, ‘山’ 자 위에 또 ‘山’ 자가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저렇게 표현한 거지. 물론 이런 표현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아.”

“….”

구태호가 정우현이 쓴 한자를 보고 놀라서 말을 잃었다.

분명 정우현이 현재 보고 있는 고서에도 없는 한자를 쓰며 만요가나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아, 만요슈(万葉集) 알지?”

“…응! 8세기 중반에 쓰인,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집(歌集). 즉 가요 모음이잖아.”

“하하, 응. 그게 사실 우리 집에 있거든. 그것도 원문으로! 예전에 고대 동아시아 문학을 공부했는데, 흥미가 생겨 구해 볼 수 있었지. 나도 그때 알게 된 거야!”

하고는 정우현이 말을 이었다.

“만요슈에는 일본 고유의 시가, 즉 와카가 4,500여 수나 되는데, 그것 역시 만요가나로 쓰여 있어. 한데 분량이나 내용 면에서 이 고사기랑 일본서기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양한 표현이 실려 있거든.”

그러고는 그가 쓴 한자를 보고 말을 이었다.

“이건 거기서 나온 표현이야!”

“…와아.”

이제는 정우현을, 놀라움을 넘어 경외의 눈빛으로 우러러보는 구태호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정우현 너는… 진짜… 짱이야. 아니, 짱이라는 말로도 부족해. 너는….”

하고서 구태호가 짧게 말을 이었다.

“내 구세주야.”

“….”

구태호의 극적인 표현에 정우현 또한 말을 잃었다.

그러고는 한순간 무지막지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게 뭐야, 하하하하하하!”

정우현은 마구 웃었지만, 구태호는 진지했다.

애초 정우현을 만남으로써, 완벽해야 한다는 오랜 압박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우면서도 마음이 가벼워진 그다. 즉 해방감을 느끼게 됐다.

그러고서 함께한 그는 그야말로 다정하기도 다정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즉 정우현은 구태호에게 단순히 친구 이상의 존재였다. 크나큰 의지가 되는, 믿고 따라야 할 커다란 존재였다.

똑똑.

그때 구태호의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태호야.”

구태호의 어머니였다.

“…응?”

정우현의 가르침으로 잔뜩 일본 고서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부르자 조금 신경이 쓰인 구태호다.

미간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우현이랑 나와, 이제. 치킨 왔다!”

“…어?”

한데 순간 구태호의 표정이 단숨에 풀렸다.

“…치킨?”

“응!”

“오케이이이이이이이이!”

치킨을 몹시도 사랑하는 구태호였다.

* * *

이로써 정우현의 도움으로, 구태호는 자신의 과제를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구태호 또한 뛰어난 언어 신동이기에 정우현이 가르쳐 준 방식대로 고대 일본어를 순조롭게 해석했다.

그러다가는 ‘山上復有山’ 같은 변칙적인 표현이 나오면 궁리하고 궁리하다가는, 그럼에도 해석이 되지 않을 시 학교에 가 정우현에게 묻고 이내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마침내 성공적으로 과제를 마무리 짓고, 학교에 제출했다.

선생들은 물론 정성 어린 구태호의 과제를 높이 평가했는데, 특히 외국어 선생인 부빈이 구태호의 짧은 논문을 보고 만족해하고서는 그에게 물었다.

“It must not have been easy to interpret ancient Asian languages such as Korea, China, and Japan. How did you do it? (한·중·일 등 고대 아시아어를 해석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해냈니?)”

그러자 구태호가 활짝 웃으며 역시 영어로 답했다.

“선생님,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언어라면 다 자신 있다고요!”

하고서는 슬쩍 웃으며 교실 한편에 있는 정우현을 보고 말을 이었다.

“…실은 우현이가 많이 도와줬어요! 특히 고대 일본어를 해석할 때요!”

그러자 부빈 역시 정우현을 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현이라면 그 모든 게 가능하다는 것을, 부빈 선생 역시 잘 알고 있었다.

* * *

시간이 흘러 나뭇잎이 물들기 시작하는 9월 초.

정우현이 집에서 가만히 달력을 보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표정이 경직됐다.

2001년, 9월 11일.

세계적으로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전생의 그는 아직 어렸음에도, 그날의 참상을 결코 잊지 못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 즉 여러 대의 항공기가 공중에서 납치되어 건물에 돌진해 폭발해 버리는 믿을 수 없는 일이 티브이를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된 것이다.

당일 저녁 그는 집에서 티브이를 보다가 우연히 그 모습을 봐버렸다.

처음엔 솔직히 의심스러웠다. 무슨 영화가 아닌가 하고. 솔직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실제 일어난 일이었고, 결코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한데 그날이 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바로 9월 11일.

정우현이 곧장 생각했다.

‘…안 돼. 또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 안 된다.’

물론 이번 생의 정우현이, 세상의 모든 불행과 비극, 그리고 재난과 악행 따위에 책임이 있거나 책임을 가져야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염라대왕의 선물로 놀라운 새 삶을 살게 됐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이 넓은 세상의 일개 인간일 뿐이다.

즉 우주를 관장하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정우현이 9.11 테러를 떠올리고 그 사건을 막고자 하는 이유는, 전생에선 본 그날의 참상이 너무 절망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테러가 일어나는 미국은, 이제 정우현에게도 무척 가까운 나라였다.

당장 미국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먼저 지금도 문자와 통화를 하곤 하는 절친 브래드 퍼트부터 해서, 자신을 세계적 스타가 될 수 있게 뽑아 준 스티븐 스틸버그 감독, 그리고 영화 <인크레더블 킹 보이>의 촬영 현장 때 그를 아끼고 도와준 수많은 스태프.

거기에 자신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모든 미국의 팬들까지.

즉 그는 할리우드에서 촬영한, 미국 영화로 오늘날처럼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에서 상까지 받아 더욱더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이 모든 것들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더욱더 좌시해선 안 되는 일이 미국의 9.11 테러였다.

물론 꼭 자신과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도, 해당 사건은 워낙 참혹하고 절망적이기에, 인류사를 통틀어 그만한 비극은 손에 꼽을 정도로 몇 안 되는 최악의 사건 중 하나였다.

그런 비극적인 일을,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고 싶었다. 마치 전생에서 등산 중 낙상해 일찌감치 삶을 다한 자신의 아버지를 이번 생에서는 살려 냈듯, 미국에 있는 수많은 사람 또한 살려 내고 싶었다.

비록 정우현은 일개 인간이지만, 현재로선 그날의 참혹한 일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기도 하니까.

‘…생각하자, 생각해. 9.11 테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이내 정우현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양손을 깍지 낀 채 자신의 턱에 대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자신이 처한 상황하에, 효율적으로 테러를 막을 수 있는 방법.

그 방법을, 생각해 내고 싶었다.

“…아!”

그러고는 마침내 그가 소리치며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실행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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