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정우현은 한국 영재 학교가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단숨에 인기 최고의 학생이 됐다.
애초 글로벌 스타였던 그였기에 인기가 많았지만, 이곳 학교는 말 그대로 영재 학교.
어디까지나 지능 검사 등 엄격한 기준에 의해 무척 똑똑한 아이들만 모아 놓은 학교다.
즉 아무리 유명 배우라고 해도, 학교에 들어와 좋은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다른 뛰어난 학생들에 비해 처지고 인기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컨대 정우현이 없었다면 외국어나 문학, 그리고 법률 등 인문사회 과목 시간엔 구태호에게 수학, 그리고 물리학 등 자연과학 시간엔 권유라에게 학생들의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얘기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 사이에선 어쨌든 공부를 가장 잘하는 아이가 최고니까.
계속되는 여러 수업 시간.
“마야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확연히 다른데요…!”
세계사 수업 때 정우현이 발표를 했다.
“민법상 사해 행위와 채권자 취소 소송이란…!”
이번엔 법률 수업이었다.
“백색 왜성인 시리우스 B의 질량은…!”
이번엔 지구과학 수업이었다.
이렇듯 정우현이 과목을 불문하고 모든 수업시간에 압도적인 실력을 보임으로써, 학생들에게 그는 완전한 선망의 대상이 됐다. 가뜩이나 글로벌 스타로서 인기가 많았던 그가 명실공히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KGI 최고의 학생이 된 것이다.
“우현아!”
권유라가 어느 날 정우현을 불렀다.
“응?”
“오늘 우리 집 놀러 가자!”
“오늘?”
“응!”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그래!”
딱히 다른 약속은 있지 않았다.
이에 권유라가 크게 소리쳤다.
“오예에에에!”
“태호는?”
정우현이 곧장 되물었다.
“아, 태호도 당연히 가지!”
이렇듯 최근 셋은 무척 가까워져 거의 온종일 함께했다.
권유라가 생각하기에 맨 처음 구태호네 집에 놀러 간 이후로, 정우현네 집도 한번 놀러 갔으니, 이번에는 자신의 집에 놀러 갈 차례라 여기고 이렇게 날을 잡은 것이다.
“좋아, 좋아!”
권유라가 신난다는 듯 크게 외쳤다.
* * *
방과 후 KGI 정문 앞.
정우현은 일찌감치 경호원 엄규환에게 그만 집에 가라고, 즉 교문에서 자신을 기다리지 마시라고 핸드폰으로 미리 알렸다. 자신은 친구 집에 놀러 간다고 한 것이다.
물론 곧장 전화가 오기는 했다.
“…하지만 도련님. 경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예?”
엄규환이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친구도 경호원이 있거든요!”
“…아아.”
그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소리를 냈다.
KGI에서 정우현 말고 경호원이 등하교를 책임지는 학생이 또 한 명 있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간 정문에서 경호원들끼리 여러 번 마주친 것이다.
바로 권유라였다.
그녀의 경호원들을 생각하자 엄규환의 마음이 놓였다.
“…음, 그럼 알겠습니다. 다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별일 없을 거예요!”
이윽고 하교 시간.
권유라가 정우현 그리고 구태호와 함께 정문 밖을 나서자 정장을 입은 덩치가 큰 두 명의 경호원이 즉각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끝나셨습니까, 아가씨!”
“응!”
이내 즉각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이 커다란 차량의 뒷문을 열었다.
에이치 그룹 외동 손주이자 에이치 자동차 사장의 딸답게, 차량은 이번에 에이치 자동차에서 새로 출시한 3,500cc 대형 승용차였다.
“내 친구들이야!”
권유라가 경호원들에게 정우현과 구태호를 소개하며 말했다.
그녀는 정우현과 달리 경호원들에게 살갑게 말을 놓았다.
“…안녕하십니까.”
이에 그들이 정우현과 구태호를 보고 역시 말을 높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정우현 군이군요….”
그중 머리를 거의 삭발하다시피 짧게 자르고 눈썹이 짙은 경호원이 정우현을 보고 말을 이었다.
“맞아요!”
“…하하하, 반갑습니다.”
그는 정우현이 자신이 모시는 권유라와 함께 KGI에 다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정문에서 몇 번 보기는 했는데, 이렇게나 가까이 그것도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라 조금 신기할 정도였다.
“하하하하하! 우현이는 내 친구라구!”
이미 차에 탑승한 권유라가 자랑스러운 듯 웃으며 재차 크게 말했다.
“공부도 짱 잘하고! 하여간 오늘 우리 집에 놀러 갈 거야, 태호도 같이! 그러니까 얼른 가자!”
“…예!”
권유라의 말에 경호원 둘이 즉각 운전선과 조수석에 탑승했고, 차가 곧 출발하기 시작했다.
뒤에는 아이들 세 명이 쪼르르 앉아 있었는데, 구태호가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만 경호원 아저씨들 없네.”
비록 현직 검찰 총장의 아들이지만, 정우현처럼 본인이 유명인이거나 권유라처럼 엄청난 부자는 또 아니어서 딱히 경호원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구태호였다.
“…태호야, 그게 좋은 거야.”
그러자 권유라가 구태호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어디든 도무지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어….”
“하하하하!”
정우현은 권유라의 말을 듣고 재밌어서 웃었다.
“…진짜야. 너희 거기 개미 분식 알지? 우리 학교 뒤편에 있는데? 애들 다 가 봤다는데, 나는 아직 못 가 봤잖아.”
하고선 그녀가 동그란 눈을 작게 뜨고 앞에 있는 경호원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불량 식품 파는 허름한 데는, 절대 가면 안 된대.”
“…아가씨.”
조수석에 앉은, 머리가 짧은 경호원이 상체를 틀며 낮고 굵은 음성으로 말했다.
“들려요, 목소리.”
이에 권유라가 다시 눈을 크게 뜨고서는 소리를 냈다.
“…헐.”
“저는 아가씨가 1km 떨어진 곳에서 얘기해도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구태호가 놀라서는 소리를 냈다.
“와아아.”
경호원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희는 사모님의 말을 따를 뿐입니다. 사모님께서는 아가씨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며, 조금이라도 아가씨에게 해를 끼칠 만한 장소나 사람은 가까이하지 못하게 철저히 하라고 하셨죠. 그러니까 이 얘기는 여기서 마지막으로 합시다.”
“…아니, 분식점이 어떻게 그래!”
하고는 권유라가 억울한 듯 구태호를 보며 하소연했다.
“…이것 봐! 다 이런 식이야! 답답하다구…!”
“…하하하하!”
정우현은 그런 권유라가 재밌어서 계속 웃었다.
* * *
한남동 권유라의 집.
“…와아.”
드라마에서만 보던 거대한 대저택이 모습을 드러내자 구태호가 탄성을 내질렀다.
널찍한 마당과 그에 딸린 차고만 해도 최대 다섯 대의 차량이 들어갈 수 있었고, 거기에 2층짜리 건물의 연면적은 2천 제곱미터 즉 600평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가격은 무려 95억 원에 달하는 대한민국 최고 상류층만 사는 한강 뷰 고급 주택이었다.
“…오셨어요!”
멀리서 중년의 한 여성이 권유라를 보자마자 외쳤다.
“…응! 오늘은 친구들 데려왔어!”
“하하하! 맨날 얘기하던 그 친구들인가 보네요?”
여성은 가정부, 그것도 보모 겸 고급 가정부였다.
국내 제일 자동차 회사 사장의 집이니만큼 때때로 외국인 손님을 맞이해야 할 일이 잦았기에, 영어 등 주요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은 물론 학식도 출중한 명문대 출신의 유아 교육과 여자였다.
“응! …엄마는? 엄마는 어딨어?”
“집에 계세요! 얼른 들어오세요, 아가씨!”
하고선 가정부가 상체를 숙이며 권유라의 가방을 대신 들었다.
“…헤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권유라는 보모를 한 번 강하게 끌어안고 갑작스레 볼에 뽀뽀까지 했다.
“어머? …하하!”
이에 보모는 놀라면서도 기뻐하며 밝게 웃었다.
자신을 아기 때부터 돌본 보모이기에, 엄마 못지않게 서로 애착했던 것이다.
“유라 왔니?”
이윽고 권유라의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넓고 고풍스러운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다가, 자신의 딸 권유라가 친구들을 데리고 온 모습을 슬며시 보고 있던 것이다.
“네, 엄마! 학교 다녀왔어요오오오!”
“하하, 그래. 친구들이네?”
“안녕하세요!”
정우현과 구태호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이에 권유라의 어머니, 즉 에이치 그룹 회장의 며느리이자 에이치 자동차 사장의 아내인 그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구나, 유라가 맨날 말한 친구들이.”
정우현이 얼른 답했다.
“하하하, 네! 저는….”
하고 소개를 하려는데 곧장 권유라의 어머니가 정우현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우현이지, 정우현.”
“…아, 네!”
“하하, 알지, 아줌마도 알아. 세상 누가 널 모르겠니?”
“…하하.”
그러고서 그녀는 정우현에게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애써 참고서 고개를 돌려 구태호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넌 태호지?”
“아, 예….”
구태호는 조금 낯을 가렸기에 다소 목소리가 작았다.
“실은 너희 아버님, 몇 달 전에 한 번 만났다. 회사 일 때문에.”
“…아아.”
대기업과 검찰. 좁은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어떻게든 관련이 없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여간 잘 왔다!”
하며 그녀가 활짝 웃고 다시 자신의 딸 권유라를 바라보며 그녀를 어루만졌다.
“솔직히 우리 말괄량이 유라가 학교에 간다기에, 내심 걱정을 많이 했는데, 금세 학교에 친구도 생겼다 하고 아줌마는 참 마음이 놓이더구나! 고맙다, 애들아.”
어린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란, 자신의 아이와 함께하는 친구들에게 괜히 고마운 법이다.
이에는 대기업의 사모도 다를 바 없었다.
“아니예요, 유라가 우리한테 얼마나 잘 해 주는데요!”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하하, 그래? 우리 유라가 그렇단 말이야? …착하네.”
하고서는 그녀가 다시 자신의 딸을 한 번 쓰다듬더니, 잠시 일어서서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한편 멀리 부엌에서는 가정부가 아이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요리하고 있었다.
구태호는 무슨 음식이 나올까 궁금해 벌써부터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우현아.”
한데 권유라의 어머니가 한순간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다정한 목소리로 정우현을 불렀다.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예?”
“근데 아줌마, 사인 좀 해 줄 수 있겠니…?”
종이였다. 그것도 커다란 종이.
심지어 굵은 유성펜까지 가져와 정우현에게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실은 아줌마도 우현이 엄청 팬이거든…?”
“하하하, 맞아!”
이에 권유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전에, 아빠가 엄마 놀리는 거 들었어. 우현이 네가 나온 <겨울 방학>보고 엄마가 펑펑 울었대, 정말 엄청 울었대!”
“…얘는….”
그녀는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딸 권유라에게 눈치를 한 번 주고는 다시 정우현을 보고 말을 이었다.
“…하여튼, 하나만….”
하고 말끝을 흐리는 권유라의 어머니에게 정우현이 곧장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곧 멋지고 크게 사인했다.
“와아….”
권유라의 어머니가 사인을 보며 곧장 감탄했다.
“…아래, 이름. 내 이름도 좀 써 주고.”
하며 심지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말하는 그녀다.
일찍이 KGI 입학실 날, 권유라가 정우현의 사인을 받아 갔었다.
그날 저녁 권유라의 어머니는 그것을 보고 내심 자기도 하나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것도 이왕이면 자신의 이름까지 적어서.
그 정도로 그녀는 정우현의 팬이었다.
하지만 체면도 있고 해서 잠자코 있었는데, 마침 권유라가 정우현을 집으로 데려왔기에 얼른 따로 받아낸 것이다.
“하하하하, 아줌마 기분 좋다!”
권유라의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정우현의 사인을 보고 크게 웃었다.
실은 권유라가 입학 첫날부터 정우현에게 다가가 친근하게 대하고, 그를 따르게 된 이유가 여기에도 있었다.
더 어렸을 적 즉 다섯 살쯤, 자신의 엄마가 자신과 동갑내기인 한 아역 배우를 귀엽고 대단하다며 좋아하는 것을 가까이 보면서 크고 자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권유라 또한 엄마를 따라 오래전부터 아역 배우인 정우현을 자연스레 좋아하게 됐고, 급기야 어느 날 KGI에서 그를 만나게 됐다.
즉 그저 팬에 지나지 않았던 한 아이가 실제 정우현의 친구로 거듭나게 됐다.
* * *
그날 저녁.
정우현이 권유라의 경호 차량을 타고 청담동 자신의 집 앞에서 내렸다.
그러자 머리가 짧은 경호원이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정중히 말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이에 정우현이 곧장 대답했다.
“저한테는 말 놓으셔도 돼요!”
자신의 경호원도 아니고 친구의 경호원이니까 한낱 아이인 자신을 어렵게 대할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아닙니다, 유라 아가씨는 어디까지나 제가 모시는 분. 그러니 아가씨의 친구분들 또한 마찬가지죠.”
“…에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하고선 그가 머리가 짧은 경호원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경호원이 순간 멈칫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에 정우현이 즉각 눈치채고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그러면서 경호원이 주저하기를 잠시, 작정한 듯 한순간 상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종이였다. 그것도 반으로 곱게 접은 흰 종이였다.
“…저도 사인 좀….”
사실 처음부터 정우현의 사인을 받고 싶었지만, 그간 권유라와 그의 어머니 등 이래저래 괜스레 눈치를 보며 참았던 경호원이다.
그 역시 정우현의 오랜 팬이었던 것이다.
“…<인크레더블 킹 보이>를 영화관에서 세 번이나 봤습니다. 아아, 마지막에 우현 군이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무찌를 때의 그 전율이란….”
“와아아….”
정우현이 미처 생각도 못 했다는 듯 소리를 내고서 한순간 환히 웃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예, 당연히 해 드려야죠!”
어디에서든 사랑받는 정우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