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40)화 (40/200)

40화

이른 아침. 한국 영재 학교로 향하는 차량 안.

“졸리진 않으십니까?”

호리호리한 체형에 날렵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정장 차림으로 운전석에 앉아 말했다.

그리고 뒷좌석에는, 정우현이 있었다.

“네, 괜찮아요!”

정우현이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그는 처음으로 사람을 고용하게 됐다. 차까지 한 대 더 샀다.

이름 엄규환. 수중파괴대 즉 UDT 출신에 연마한 각종 무술만 종합 20단이 넘는 실력파 경호원. 그간 정·재계 주요 인사들을 경호했다가, 이번에 정식으로 정우현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정우현 군의 팬입니다.”

부모와 함께 경호원 면접을 심사할 때 엄규환 그가 한 말이다.

다른 지망자들은, 오로지 정우현이 높게 책정한 보수만을 보고 왔다면 이 엄규환은 달랐다. 그가 출연한 영화 속 이야기를 낱낱이 하며, 진심으로 정우현을 경호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매일 열심이시네요, 도련님.”

“하하! 큰마음 먹고 다니는 학교니까요!”

한편 엄규환의 경호원 채용이 확정되고서, 그와 정우현 서로는 서로에게 말을 놓을 것을 청했다.

먼저 정우현이 삼촌 뻘인 엄규환에게 한참이나 어린 자신을 향해 말을 놓으라고 했고, 엄규환은 또 정우현에게 엄밀히 자신은 고용된 사람으로서 편하게 대해 줬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다.

“…에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제가 경호할 분에게.”

이에 엄규환이 즉각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존대말 할게요!”

그러자 정우현도 곧장 답했다.

“…으음.”

엄규환이 생각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은 서로의 호칭을 정했다.

그렇게 정한 것이 정우현은 도련님, 엄규환은 실장님이었다.

“…그럼, 오늘도 잘 다녀 오십시오.”

엄규환이 KGI 정문에 이르러, 차에서 내린 정우현에게 밖으로 나와 꾸벅 인사했다.

“…하하, 실장님!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아닙니다. 제가 모시는 사람을 향한 공경과 예의는 경호원으로서의 당연한 자질이자 임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잘 다녀오십시오.”

하고서 학교 안에 들어가는 정우현의 뒷모습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는 엄규환이다.

학교 안은 자체 경비원들이 방호를 하고 있기에 마음 놓을 수 있었다. 물론 외부 경호인은 애초 들어갈 수 없기도 했고.

사실 정우현은 경호원을 고용하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 차를 타고 등하교를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건물 관리 등으로 바쁠 때가 있었고, 무엇보다 유명인인 정우현이 이제 집 밖에서 오래 생활해야 했기에 전문적인 경호원을 한 명 고용하는 게 적합하다는 판단을 했다.

물론 가족끼리 열띤 토의를 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 * *

KGI 외국어 시간.

스무 명의 학생들이 자리에 앉아 열심히 선생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자리는 두 명이서 같이 앉는 기다란 책상 앞이 아니라, 대학에서처럼 1인용 책상 앞 의자에 각자 앉았다.

아직 어리지만 워낙 뛰어난 학생들이니만큼, 그들의 자율적인 학습 태도를 존중하기 위해서다.

외국어는 구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 태생으로 예카테린부르크 국립 대학을 나와 미국으로 귀화한 알렉산더 부빈(Alexander Vuvin)이라는 학자가 가르쳤다.

“The basics of language is…. (언어의 기본은 말이지….)”

하며 시작되는 수업을 학생들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부빈의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즉 학생들 모두 영어 수업을 듣고, 오로지 영어로만 말해야 한다.

영어는 평범한 아이들도 종종 조기 교육을 받을 정도로 학습이 일반화 되었기에, 영재인 KGI 학생들의 집중도와 이해력은 대체적으로 뛰어났다.

다만 학생들 개별적인 재능은 각기 달라서, 조금 애를 먹는 학생들도 있었다.

예컨대 권유라 같은 아이들.

“…아아.”

재벌가 외동딸답게 권유라는 아기 때부터 한국에서 가능한, 가장 뛰어난 사교육을 받고 자랐다. 하지만 그녀의 재능은 언어 쪽으로는 다소 평범했다.

영어 중국어 등 주요 외국어는 어떻게든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으로 학습하긴 했으나, 비교적 소수만 사용하는 언어를 배울 때면 흥미를 잃고 딴청을 피우곤 했다.

이에 반해 눈을 반짝이며 자신 있는 표정으로 선생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구태호였다.

구태호는 아기 때부터 언어 신동으로 유명했다. 네 살 때엔 주요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며, 자랑스러운 얼굴로 언론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Sir! How many languages will we learn in total roughly? (선생님! 우리는 대략 총 몇 개의 언어를 배우게 되나요?)”

구태호가 손을 번쩍 들고 선생에게 물었다.

이에 푸른 눈의 부빈이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우선 영어를 기본으로 중국어, 불어, 스페인어 등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통용되는 언어를 학습하게 될 거다. 우선은 약 대여섯 개 정도라고 할 수 있지.”

“그렇군요!”

역시 구태호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정도 언어라면 이미 모두 익혔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너희들의 수준을 봐서 더 가르칠 수도 있고…. 개별적인 편차가 클 경우에는 얼마든지 따로 가르칠 수도 있다. 뭐, 너희들은 이미 KGI의 학생. 짧게는 5, 6년 길게는 10년 넘게 이곳에서 학습하게 될 거야. 그러니 이런저런 언어를 배울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각자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하겠지.”

“저는 모두 할 수 있습니다!”

역시 구태호가 다부진 표정으로 크게 답했다.

“어떤 언어든 다 할 수 있어요!”

“…흐음.”

부빈이 구태호를 보고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배움에 있어 자신감은 좋지만 과한 건 독이 된다. 구태호가 언어 방면에서 무척이나 뛰어난 수준인 건 알고 있지만, 저렇게 자신이 최고인 듯 들뜨는 건 좋지 않아.’

하고 그가 교실 한 편에서 잠자코 앉아 있는, 한 학생을 보고 생각을 이었다.

바로 정우현이었다.

‘정작 진정한 실력자는 가만히 있기도 하고….’

부빈 역시 정우현이 어떤 아이인지 자료를 통해 알고 있는 것이다.

이내 소련 태생의 부빈이 고개를 돌려 구태호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Итак, Тэхо, ты можешь говорить по-русски? (그럼 태호. 너는 러시아어를 할 수 있니?)”

부빈 선생은, 일부러 한국에서는 접하기 쉽지 않은 러시아어를 말했다.

혹시나 구태호가 모른다면, 이로써 그의 기를 조금 누를 작정이었다.

하지만 곧장 구태호가 입을 열었다.

“Абсолютно! Русский очень интересный язык! Язык, основанный на кириллице, на котором говорят около 200 миллионов человек в мире! (당연하죠! 러시아어는 매우 흥미로운 언어입니다! 키릴 문자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에서 2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죠!)”

“으흠….”

부빈이 자신만만하게 러시아어로 답하는 구태호를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쁘지 않았다. 원어민처럼 완벽하게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의 막힘 없는 표현이자 발음이었다.

“하하하하!”

구태호가 크게 웃었다. 드디어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남다른 외국어 능력을 뽐내게 됐기 때문이다. 내심 이 순간을, 그는 무척이나 기다렸다.

‘…다들 깜짝 놀랐겠지! 뭐, 영어 중국어 같은 건 너무 흔하잖아!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들은 일찌감치 터득한 뒤, 러시아어는 6살 때부터 배워서 무리 없이 익힐 수 있었다.

한데 그런 구태호에게 부빈이 다시 곧장 물었다.

“Якщо так, то чи можете ви говорити цією мовою? Схоже на російську, але ніколи не російську. (그렇다면 이 언어도 할 수 있니? 러시아어와 비슷하지만 러시아어는 결코 아니지.)”

“….”

웃고 있던 구태호의 표정이 순간 경직됐다. 선생님이 분명 러시아어처럼 키릴 문자를 바탕으로 말을 한 것 같은데 어휘나 문법, 결정적으로 발음까지 조금씩 달랐던 것이다.

즉, 구태호는 수업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부빈 선생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 정도까지만 하자. 구태호도 이제 반성하고 우쭐대지 않겠지.’

당황한 구태호를 보며 선생이 생각했는데, 순간 놀라운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Так, сер, я можу це зробити. (예, 선생님, 할 줄 압니다.)”

“….”

부빈이 깜짝 놀라 자신의 말에 대답한 학생을 즉각 쳐다봤다.

정우현이었다.

정우현이 슬며시 웃으며 더할 나위 없이 유창하게 말을 하는 것이다.

“Це українська. Українська схожа на російську, але зовсім інша мова! (우크라이나어잖아요. 러시아어와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언어인 우크라이나어!)”

“…아아!”

탄성을 내지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부빈이었다.

“…와아아아아!”

이와 함께 다른 학생들 모두가 놀라며 웅성거렸다.

이미 구태호가 러시아어를 할 때 놀랐던 그들이지만, 이어지는 부빈 선생의 질문에 어쩐지 그가 이전과 달리 당황하며 답을 하지 못했다.

한데 곧장 정우현이, 그것도 훨씬 유창한 발음으로 말을 하니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

그 와중 정작 구태호는 꼿꼿이 앉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않았고, 심지어 얼굴마저 새빨개졌다.

그렇게나 자신만만하게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께 러시아어를 구사했는데, 뭔지도 모르는 언어에 단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게 되니 몹시 부끄러워진 것이다. 더군다나 외국어 수업 시간에서만큼은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자신보다 더 뛰어난 아이가 있다는 사실 또한 당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놀랍구나. 언제 우크라이나어를 공부했니? 한국에선 자료도 찾기 힘들 텐데….”

부빈 선생이 계속 우크라이나어로 정우현에게 말했다.

“하하, 미국에서요! 미국에 있었을 때 유럽의 소수 언어를 많이 공부할 수 있었어요. 즐거운 시간이었죠!”

하며 해맑게 웃는 정우현을 보고 부빈은 말을 잃고 말았다.

미국에서라면 분명 정우현이 영화 <인크레더블 킹 보이>를 촬영할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길어도 2년이 안 됐을 텐데, 어찌 저렇게 우크라이나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심지어 정우현은 오직 우크라이나어만 공부한 게 아니야. 그 시간에, 분명 다른 소수 언어들도 학습했겠지. …그렇다면 그 모든 언어도 지금처럼 유창한 수준이라는 거고….’

하고선 부빈이 잠시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을 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실제 일어난 일이군….’

더군다나 그는 온갖 외국어를 구사하는 뛰어난 언어학자로서 조금 좌절하기까지 했는데, 정우현의 우크라이나어 발음이 자신의 발음보다 훨씬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부빈은 어디까지나 구 소련이자 현재 러시아 영토인 예카테린부르크 태생. 즉 우크라이나어는 결국 그에게도 외국어이기 때문에 원어민 수준으로 완벽하게 발음하기 어려웠다.

한데 그걸, 무려 동아시아의 한 소년이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엄연히 러시아와 다른 자주 국가입니다. 언어는 물론 역사까지요!”

그러면서 정우현은 우크라이나와 관련해 짧게 한마디를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래, 그래.”

하고 부빈 선생은 잠시 말을 않았다.

그러다가는 작정한 듯 천천히, 하지만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

“…Etiamne linguam hanc loqui potes? (그렇다면 이 언어도 할 줄 아니?)”

이에 정우현이 즉각 대답했다.

“Cave! Splendide refulgens, nunc lingua detestata! (그럼요! 눈부시게 찬란하지만, 현재로선 사용되지 않는 언어죠!”

“….”

부빈 선생이 다시 말을 잃었다.

다른 아이들은 눈만 껌벅껌벅 떴다 감으며 정우현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구태호조차 이제는 부끄러운 감정은 뒤로 하고, 그저 정우현을 거의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라틴어였다.

선생의 라틴어 물음에 정우현이 라틴어로 대답한 것이다.

라틴어는 고대 로마 제국의 부흥과 함께 전 유럽에서 사용되던 언어로 고대 동아시아의 한자와 그 위상이 비슷하다.

한국과 일본 심지어 베트남까지 모두 언어적으로 한자 문화권에 속하듯, 서양의 거의 모든 언어가 직간접적으로 라틴어에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분열되며 유럽의 문화적 통일성이 사라진 뒤, 라틴어는 지역별 로망스어군으로 분화된다. 이로써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죽은 언어가 된 것이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동양의 고대 문헌을 연구하려면 한자를 공부해야 하듯이, 서양의 문헌을 연구하려면 라틴어는 필수이기에 지금도 세계의 많은 학자가 라틴어와 씨름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학문을 위해 읽고 쓰는 데만 몰두할 뿐 회화로는 사용하지 않기에, 현대에 들어 이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데 그런 언어를 정우현이, 마치 모국어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How did you study Latin? In particular, it is very difficult to have a conversation like that…. (…라틴어는 어떻게 공부했니? 특히 회화는 그렇게까지 하기 무척이나 어려운데….)”

부빈이 정우현을 보고 이번에는 영어로 물었다. 언어학자인 자신조차 라틴어로 말을 하는 것은 다소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자 정우현 역시 영어로 답했다.

“하하, 역시 미국에서지요! 사실 읽고 쓰는 건 더 예전에 익혔는데, 미국에서, 바티칸 및 가톨릭 교회에서 사용하는 라틴어 다이얼로그를 구할 수 있어서! 바로 학습했어요.”

“….”

교실이 술렁였다. 이제 학생들도 영어로 말하는 선생과 정우현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틴어라니.’

구태호가 강렬한 눈빛으로 정우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우현은 진짜, 단순히 천재 배우가 아니었구나. …그냥, 다, 천재였어…. 그래, 이런 애가 진짜 천재지… 아아, 나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야.’

* * *

수업이 끝나고 교실.

아이들은 정우현이 앉아 있는 자리에 몰려들었다.

“…아아! 우현아 넌 진짜 짱이야.”

“와… 너무 멋있다….”

그 와중에 가장 큰 소리로 말을 하는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권유라였다.

“하하하하하! 애들아! 선생님 눈빛 봤어? 완전 놀랐잖아! 우현이가 무슨 언어든 다 잘하니까!”

그러면서 권유라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배시시 웃고 말을 이었다.

“역시, 정우현! 난 네가 뭐든지 다 잘하는 줄 알고 있었어!”

“하하하, 고마워.”

“솔직히 우현아! 너 선생님보다도 발음 훨씬 좋았다! 그치?”

하면서 권유라가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아이들을 살폈다.

“맞아, 맞아!”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곧장 그렇다고 답했다.

“…저기.”

그러고 있는데 뒤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태호였다.

이제까지 유명인인 정우현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다른 아이와 달리 애써 억눌렀던 구태호가, 사뭇 긴장한 표정을 하고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온 것이다.

“아….”

그러고서는 다부진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무언가 말을 꺼낼 듯 말 듯 주저하며, 정우현 앞에 잠자코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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