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나는 이런 걸 바라고 널 지원한 게 아니야.”
김은정 박사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서는 말했다.
“솔직히 말하마. 애초 무언가를 바랐다면, 널, 이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다. 어떻게든 너와 부모님을 설득해서 연구하고 무엇이든 결과를 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물론 그럴 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널 도운 건, 그저 네가 아무런 상처나 두려움 없이 너의 재능을 꽃피우며 잘 자라기만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것뿐이란다.”
“예, 박사님!”
하고서 정우현이 가방을 김은정 박사 앞쪽으로 더 밀었다.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저야말로 그저 보답하고 싶어서, 이렇게 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받으세요! 네? 박사님!”
“….”
잠자코 명품 가방을 바라보며 김은정 박사가 생각했다.
‘…우현이가 아직 성인이 되려면 십수 년이 남았지. 그동안 나는 지금처럼 이 아이를 곁에서, 가깝게 지켜보고 싶다. 정우현이 어떻게, 얼마나 더 대단하게 성장하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어.’
그러면서 그녀가 못 이기는 척 가방을 손에 쥐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선물은 그저 받아야겠지. 만약 끝까지 거절한다면, 우현이는 이제 날 어려워할 거야.’
“와아!”
과연 김은정의 생각대로 그녀가 가방을 손에 들자 정우현이 무척 기뻐했다.
“너무 어울려요, 박사님!”
“…하하하, 고맙다, 우현아… 그래도 이렇게 좋은 거 안 사 줘도 되는데….”
“아니에요! 박사님이 평소 애써 연구하시고, 우리나라 아동에 관해 공헌하시는 걸 생각하면 이런 선물은 오히려 부족하죠, 하하하!”
“아이쿠… 네가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구나.”
하고서는 그녀가 값비싼 가방을 보며 못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여간, 고마워. 내가 아직 더 도와줄 일이 많은데, 이런 좋은 선물을 그만 받아 버렸네.”
“하하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잘 쓸게. 심리 센터 연구비도 너무 고맙고. 정말 좋은 일에 쓰일 거야, 그거 하나는 내가 확실히 장담한다.”
“예, 예, 그래야죠! 아, 박사님! 연구비는 익명으로 보냈으니, 다른 데 알리지 말아 주세요!”
“…그럼, 그럼 당연하지.”
수년 전 KBC 공영 생방송에서 영어를 갑자기 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래, 정우현의 지능에 관한 추측이 여기저기서 제기됐었다.
당시 한국대학교 심리 센터 연구소 측은 김은정 박사의 주도하에 정우현의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이에 이번 1억 원 기부 역시 기부자인 정우현 이름 석 자를 밝히지 않는 게 당연했다.
정우현 또한 괜한 일로 언론에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 익명으로 기부한 터였다.
“…아, 그나저나 우현아.”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김은정 박사가 조금 다른 표정으로 정우현을 불렀다.
“예?”
“…네가 올해 일곱 살. 일곱 살 맞지?”
“예, 맞아요!”
“…그래, 벌써 그런 나이가 됐지….”
하고선 그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학교. 학교는 어떻게 할 거니?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데.”
“음….”
생각지 않은 게 아니었다.
물론 학습으로서 초중고 교과 과정은, 더 이상 정우현에게 의미가 없었다.
분야를 불문하고 각종 지식을 이미 전공자 이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지식의 습득 측면으로만 생각하면 학교에 진학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비록 초등 교육 과정은 의무이긴 하지만, 조금 까다로운 법적 그리고 행정적 절차를 통해 일명 홈스쿨링을 하는 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고서 상위 학교에 진학하려면 또 검정고시를 치르면 됐기에 결과적으로 학교가 꼭 필요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어찌 보면 정우현 같은 천재 아이들에게는 이처럼 학교를 다니지 않고 검정고시를 치르는 방법이 대학에 들어가 고등 학문에 전념하는 데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가, 특히 어릴 적 다니는 학교가 단순히 오로지 학습만을 위한 장이 아님을 정우현은 알고 있었기에 이래저래 고민하고 있었다.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구나, 하기야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 부모님이랑 얘기도 해 봐야 하고.”
그러고서는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학교에 관심이 있다면 말이다, 내가 얼마든지 알아봐 줄 수도 있다. 이것저것 몇 가지 선택 사항이 있거든. 그중 너에게 적합한 학교를 찾을 수도 있고.”
“…네, 감사합니다, 박사님!”
그러고서는 정우현이 아직은 생각이 없다는 듯 답했다.
“좀 더 고민해 볼게요!”
그러자 김은정도 뒤늦게 정우현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는 홀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 하긴, 우현이 널 두고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니. 오히려 학교나 제도가 너에게 짐이 될까 그게 더 우려되기도 하는구나.”
하고서 둘은 다시 일상적인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 * *
시간이 좀 더 흘러 어느 날, 정우현의 핸드폰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미국 국가 번호 +1에 지역 번호 559였다.
물론 그는 해당 지역 번호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주의 프레즈노라는 곳이었다.
정우현이 즉각 통화 버튼을 누르고 영어로 말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인크레더블 킹 보이>의 정우현 군 맞죠?”
하고 말한 중년 여성은 자신이 프레즈노에서 포도를 생산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수출하는 사업가라고 말했다.
정우현의 연락처는 영화사를 통해 알아냈다고 덧붙였다.
“다름이 아니고 정우현 군이 이번에 우리 식품 TV 광고 모델로 출연해 줬으면 해서요!”
“…아.”
“우현 군이야 우린 미국에서는 물론 이제 다른 나라에서도 알아주는 세계 최고의 아역 배우잖아요! 언어는 물론, 이번에 해외 기부를 통해 이미지도 무척 좋아서, 부디 우리 식품 모델이 되어 주십사 하고 이렇게 전화를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여자가 말을 끝내자마자, 정우현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애초 한국에서도 CF를 거절하며 그저 쉬고 있었는데, CF를 촬영한답시고 무려 미국까지 먼 길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애써 자신의 연락처를 알아내 광고를 부탁한 사업가가 고맙고, 한편으로는 이제 해외에서까지 광고 제의가 들어오는 것에 스스로 기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아쉽군요. 하지만 우현 군!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다시 연락 주세요! 급한 광고는 아니니,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짧은 시간이지만 통화해서 무척 영광이었고, 감사했습니다!”
하며 예의를 다해 전화를 끊는 사업가였다.
하지만 며칠 후, 또다시 미국에서부터 걸려온 전화 내용을 정우현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은커녕 기쁘기 그지없었다. <인크레더블 킹 보이> 이후, 여기저기 돈을 쓰고 모처럼 휴식을 누리고 있는 이래 가장 기쁜 소식이었다.
바로, 브래드 퍼트의 전화였던 것이다.
“헤이, 우우우우우!”
“와우, 브래드!”
물론 브래드와는 핸드폰으로 간간이 연락하고 지냈다.
통화는 물론 문자도 자주 나누고는 했다.
특히 정우현이 자신의 명의로 된 명동의 커다란 빌딩을 사고서는, 해당 건물을 핸드폰 사진으로 찍고 유일하게 자랑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브래드 퍼트였다.
‘브래드, 이것 봐요! 제 빌딩이에요!’
하고 정우현이 빌딩 사진과 함께 문자를 국제 전송한 것이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브래드 퍼트에게 답장이 왔다.
‘오우, 그래? 코딱지만 한 게 굉장히 좋아 보이는구나!’
하면서 정우현의 빌딩과는 비교도 안 되는 훨씬 큰 자신의 빌딩을 사진 첨부한 브래드다.
‘하하하하하하!’
브래드다운 문자였다.
어쨌거나 익숙한 브래드의 개인 번호로 전화가 왔고, 정우현은 모처럼 흥분하며 전화를 받았다.
“하하하, 우우우! 언제 들어도 반가운 목소리군!”
“브래드도 마찬가지예요!”
“또 집에서 책 읽고 있어?”
“네! 저를 후원해 주시는 박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며칠 전 그분이랑 많은 대화를 하고 왔어요! 내년에 학교에 가야 하지 않겠냐고요!”
“오우, 오우, 오우. 그렇게 따분한 곳을, 굳이 가려는 거야, 우?”
“브래드도 학교는 다녔었잖아요!”
그러자 브래드가 어쩔 수 없었다는 투로 답했다.
“오우, 노우. 다니다 말았어. 말 안 했나? 나, 대학 중퇴했다고.”
“그래도 초등학교는 나왔을 거 아니에요!”
“하하하, 그렇지. 하여간, 그래서 어떻게 하게?”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이것저것 생각해 보고 있어요!”
이에 브래드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런, 이런. 무시무시한 지구 최후의 악당을 물리친 킹 보이 우가 방구석에 앉아 책이나 보고 학교를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니. 이거, 세상이 어떻게 돌아버린 거 아니야?”
“하하하하, 그런가요?”
좋았다. 오랜 친구와 마음속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아서.
사실 정우현이 취학 여부를 고민하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바로 친구.
물론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 품에서 부족함이 없었다. 한없이 다정한 어머니와 믿음직스러운 아버지, 그리고 귀여운 동생까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화목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완전한 가정이었다.
거기에 그는 뭇 대중들로부터도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었다. 브래드가 물려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밖에 있다가, 어쩌다가 팬들이 그를 알아보면, 그들은 하나같이 열광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에게 없는 게 있었으니 바로 또래 친구였다.
격 없이, 정우현을 배우가 아닌 단순히 한 사람으로서 거리낌 없이 대하는 가까운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안타깝게도 진정한 사랑처럼 진정한 우정 또한 돈으로는 살 수 없기에, 아무리 글로벌 스타에 수백억 원대의 자산가인 정우현이라도 한순간 뚝딱하고 친구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그런 그에게, 비록 멀리 있지만 진정한 친구가 된 브래드 퍼트와의 통화는 언제든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 하지만 너도 이제 더 이상 집에 있을 수만은 없게 됐어!”
“…그게 무슨 말이죠?”
영문을 모르겠다는 정우현이 되물었다.
“오즈카! 오즈카 신인상에 노미네이트 됐어! 바로 우, 네가!”
“…와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인크레더블 킹 보이>의 세계적 대성공 이후, 그는 적지 않은 시간 언론 등 여기저기로부터 주목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조금 잠잠해질 즈음 자신의 이름으로 된 빌딩을 사서 부모와 함께 관리한답시고 역시 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고서야 최근에 조용히 쉬며 김은정 박사도 만나는 등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 아니 전 세계 영화인들의 축제인 오즈카 시상식 즉 미국 아카데믹(Academic) 시상식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니까 얼른 와! 여기 LA로! 롸잇 나우!”
“아아아….”
정우현이 잠시 생각하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알겠어요!”
하고서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금방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서 곧장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와아, 축하해, 아들!”
물론 부모는 바로 기뻐했다.
“에이, 엄마. 아직 수상한 것도 아닌데요, 뭐!”
“그래도 그게 어디야! 무려 미국에서 신인상 후보라니! 우리 우현이가 백인 흑인 등 미국 현지에서 태어나 배우의 꿈을 실현한 할리우드 스타들 사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거 아니야!”
“그래, 그래, 우현아. 축하할 일이지!”
아버지도 아내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후보로 그치는 게 아니라 상까지 확실히 받고서 축하받고 싶어요!”
“그래, 그래, 하하! 내 아들이니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만!”
그러고서 가족들은 지난번 미국에 처음으로 출국했을 때처럼, 열띤 토의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끝났다.
애초 수상식이 있는 날짜 전후로 해서 며칠만 머무르면 되기 때문이다.
“당신, 혼자 잘할 수 있지?”
한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정우현과 함께 미국에 가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의 물음에 아버지가 곧장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럼, 그럼!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 건물이고, 다현이고 내가 다 잘 보고 있을게!”
“아빠! 바쁘시거나 하면요! 집안일 도와주시는 아주머니 한번 불러 보세요!”
가정부를 부르라는 것이다. 이제는 가정 형편이 남 부러울 것 없이 넉넉한 정우현네 가족이었기에, 이 역시 당연히 가능한 얘기였다.
“에이, 됐어! 아빠가 다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엄마랑 잘 다녀와! 미국 구경도 시켜 주고! 아빠는 아메리카라면 이제 질려서, 별로 생각도 없어!”
“하하하하! 예, 알겠어요, 아빠!”
* * *
이것으로 정우현과 어머니는 미국 LA를 향해 다시 여객기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했다.
푹신푹신하고 넓은 좌석에 몸을 누인 어머니가, 창밖 활주로를 바라보고서는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와아, 엄마, 비행기 너무 오랜만에 타 본다. 특히 이렇게 좋은 자리는 처음이야….”
“하하하, 엄마! 브래드의 전용기는 훨씬 더 좋았다고요! 아예 침대가 있었다니까요?”
“…그래? 하지만 엄마는 이것만 해도 너무 좋은걸…?”
하고선 어머니가 오히려 아이처럼 연신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직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상공으로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마치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했다.
지난해 아들 정우현이 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미국에 있어, 집에서 주로 막내딸만 돌봤던 어머니였다.
한데 이렇게 모처럼 여행을 가는 기분으로 비행기를,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편한 좌석에 타니 솔직한 마음으로는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아아, 엄마, 너무 좋다, 좋아.”
하고 연신 탄성을 내지르는 어머니를 보며, 역시 이번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 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는 정우현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먼저 건물을 관리하겠답시고 스스로 한국에 남을 것을 자처했지만, 정우현 또한 은근히 이번엔 어머니와 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앞으로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머니가 상기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지금과 같았으면.”
“에이, 엄마! 더 더 좋아져야죠!”
“…그래?”
“그럼요, 제가 있잖아요!”
“하하하, 맞아, 맞아! 그렇지!”
환히 웃고 있는 어머니를 보니 정우현 또한 마음이 푸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