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정우현네 가족이 외제 차 대리점 앞에 도착했다.
스포츠머리의 사장은 웬 작고 낡아빠진 에이치 자동차 차량이 한 대 자신의 대리점 앞에 주차하기에, 그저 뜨내기 고객인 줄 알았다.
그간, 한눈에도 비싼 외제 차를 살 만큼의 구매력은 없어 보이는 고객들이 이따금 왔다가는 차들을 쭉 둘러보고 슬쩍 사라지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심지어 마치 차를 살 것처럼 시승을 해보고 더 이상 대리점을 찾지 않고 자취를 감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로지 외제 차를 한 번 타보는 것이 목적이었던 사람들이다.
‘또 좀 둘러보다 가겠지…….’
하고 머리가 짧은 사장이 자리에 앉은 그대로 차에서 내린 정우현네 가족을 한번 살피는데, 그의 시야에 놀라운 사람이 한 명 들어왔다.
정우현이었다.
<겨울 방학>과 <인크레더블 킹 보이>의 정우현이 있었던 것이다.
“…아, 안녕하십니까…!”
사장이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그것도 허리를 완전히 숙이며 아주 제대로 했다.
“아, 안녕하세요!”
아버지도 역시 인사했다.
“차 보러 오신 거죠? 고객님!”
하고서 사장이 재빠르게 정우현네 가족 곁에 다가가 상체를 살짝 숙이고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좋아! 우리 볼부가 아직 국내에서는 다른 수입 차량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데 오로지 성능만큼은…!”
그러면서 사장이 고개를 살짝 돌려 정우현을 보고 마치 연극을 하듯, 팔다리를 활짝 펼치며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 이, 이 분은…. 세계 최고의 아역 배우…! …한국이 낳은 자랑거리! 글로벌 스타 정우현 군 아닙니까…!”
의도된 말과 행동이었다. 고객을 살펴 조금이라도 구매 의사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설득해 단번에 차를 팔아 버리는 세일즈맨.
그가 바로 이곳 대리점 사장이었다. 고객들을, 마치 독 안에 든 쥐처럼 치명적인 방법으로 공략해 결국 계약서에 사인하게 만든다는 것에서, 일찍이 그는 자동차 판매업계의 살모사로 불리고 있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볼부코리아의 제1호 대리점 사장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어머, 그런 극찬을…!”
어머니 황희진은, 아들 정우현을 지칭하는 사장의 엄청난 미사여구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하하! 요즘 우현 군 모르면 간첩이죠! 아니, 이북 사람들도 정우현 군은 다 알 겁니다! 하하하하하!”
크게 웃는 사장을 따라 가족들 모두 따라 웃는 가운데, 정우현이 곧장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이고! 제가 감사하죠! 우현 군이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행차하시니…!”
영업에 도가 튼 사람들은, 영업을 위한 말과 진심을 표현하는 말이, 상대가 듣기에 그리 크게 차이가 없다. 그만큼 고객들을 어떻게든 만족시키는 것이다.
“하하하!”
정우현도 물론 그저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
한편 사장이 눈을 힐끗 돌려 정우현네 가족이 타고 온 에이치 자동차의 오랜 차를 살짝 봤다.
분명히 이 가족의 차였고, 그렇다면 이러나저러나 오랜 세월 이들 가족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자동차인 게 틀림없었다. 즉 단순히 차량이기 전에, 고객이 애착하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굳이 왜 아직도 저런 차를 끌고 계셨냐, 얼른 낡은 차는 치우고 새 차를 계약하시라는 등 괜한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말을 하는 게 효과가 있었다.
“…아이고.”
사장이 대리점 앞 주차장에 주차된 정우현네 가족의 오랜 차를 보고, 자신의 짧은 머리를 한 손으로 긁적이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참 소중해 보이는 차네요.”
“…맞습니다. 제가 총각 때부터 끌고 다닌 차거든요. 그것도 대출해서.”
아버지가 그 시절을 추억하며 감상에 빠진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하지만 어쩔 수 없더라고요, 세월 앞에 장사 있습니까? 오래오래 이리저리 잘, 끌고 다녔었는데, 결국 오늘 고장 났습니다. 고치기는 금방 고쳤는데, 카센타 사장님이 더 끌면 위험할 거라고 하더군요.”
“…이런, 이런.”
하며 사장이 마치 자기 일처럼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타깝지만… 그럼 어쩔 수 없었겠네요. 아무리 소중한 차라도, 고객님의 안전이 최우선이니까요.”
“…맞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회사의 자동차는 안전이라면 세계 제일, 타의 추종을 불허하거든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다시 회사의 차량을 홍보하는 사장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작정하고 볼부 자동차를 사러 이곳에 온 아버지는 물론,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 어머니조차 얼른 여기서 신차 계약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청산유수처럼 막힘 없이 말을 하던 사장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을 보고 이제는 거의 다 됐다는 듯 물었다.
“…어떠세요? 지금 당장 시승해보시겠어요? 다양한 모델이 있는데…!”
“아니요!”
아버지가 무어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정우현이 크게 대답했다.
“…예?”
사장은 놀라서 고개를 내려 정우현을 바라봤다.
“…뭐라고요, 우현 군?”
“시승 필요 없어요!”
“…아.”
순간, 들떠있던 사장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공략했다고 생각했다. 우선 유명 배우인 정우현을 극찬해 부모들을 기쁘게 하고, 사연이 있어 보이는 오랜 그들 가족의 차를 마치 자신의 차인 것마냥 애틋한 감정을 보이며, 마지막으로 판매할 차의 우수함을 강조해 생각할 틈 없이 시승까지 하게 만든다.
사장 경험상 이렇게 시승까지 하게 하면, 열에 아홉은 끝내 자연스럽게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한데 지금 정우현이 시승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이에 사장이 순간 자괴감에 빠졌다.
‘…그래, 이들 가족의 핵심은 부모가 아니라 정우현이었어. 그럼에도 나는 정우현이 그저 미성년이라는 생각에 빠져, 성인인 부모님, 특히 실질적으로 차주가 될 아버님에게만 말을 붙였다. 어쩌면 모든 결정권은 여기 이 작은 아이에게 있었을 텐데 말이지….’
하는데 정우현이 곧장 다시 말을 이었다.
“그냥 바로 살게요!”
“…네?”
금세 눈이 휘둥그레진 사장이다.
“가장 크고 튼튼한 차로요! 바로 살게요! 시승할 필요 없이!”
정우현 때문에 울고 웃는 사장이었다.
* * *
“…아아, 감사합니다.”
새 차에 탑승한 정우현네 가족에게 사장이 허리를 거의 직각으로 숙이며 말했다.
“저희도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오랜 소망대로 볼부사의 가장 크고 튼튼한 모델을 샀다.
1억 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이었다. 그것도 카드 할부가 아니라 현금 일시불로 샀다. 사장으로서는 조금이나마 더 득을 본 셈이다.
낡은 에이치 자동차는 사장이 대신 처리해 주기로 했다. 너무 오래되고, 계속 타고 다니기엔 조금 위험해 중고로 되팔기에도 힘든 차였다. 심지어 바로 폐차를 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임시 번호판까지 달며 바로 새 차를 인수한 것이다.
“그럼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하고 사장이 정우현네 가족의 오랜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가족들은 잠시 오랜 차를 바라봤다. 그간 함께했던 차인데, 이제는 영영 볼 수 없게 된다니, 여러 감정이 들었다.
“…잠깐만요.”
그때 정우현이 말했다.
그러고는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그 오랜 차 앞에 섰다.
‘정이 참 많이 든 차다….’
하고 그가 홀로 생각했다.
‘전생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헐값에 바로 팔아 버린 차였는데, 이번엔 훨씬 더 오래 탈 수 있었어.’
그러고는 이 차와 함께한 추억을 빠르게 되새겼다.
‘…하하, 브래드가 한 말이 생각나네.’
하고서는 그가 뒤로 돌아 다시 새 차인,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차량에 탑승했다.
“가요, 이제!”
“…그래!”
아버지가 아들 정우현의 말에 드디어 액셀을 밟았다.
새 차를 운행하니, 지난 차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느낌으로 대리점을 빠져나왔다.
그럼에도 정우현은 차창 너머 낡아빠진 지난 차를 보고 크게 외쳤다.
“Bye, bye! Really real supercar! (안녕! 진짜 진짜 슈퍼카!”)
친구 브래드 퍼트가 이름을 붙인 옛 차에 작별을 고했다.
* * *
새 차량 안.
“…오우, 오.”
아버지는 운전하며 연신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
어머니가 물었다.
“…응! 장난 아니야! 느낌이 달라, 느낌이!”
“하하하, 좋겠어!”
어머니 황희진도 운전을 할 줄 알았지만, 보통 가족끼리 이동할 때는 아버지가 운전했다.
무엇보다 차 명의가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는 데다, 드림카라는 아버지의 꿈이 실현됐기에 가장 기분이 좋은 사람 역시 아버지였다.
“…아아.”
동생 정다현도 지난 차와는 비교도 안 되는, 새 차의 푹신푹신하고 넉넉한 공간의 뒷좌석에 몸을 반쯤 누이며 조용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럼 차는 됐고….”
하더니 한순간 정우현이 느닷없이 외쳤다.
“…이제 백화점 가요!”
“…응?”
아버지는 계획한 대로 새 차를 샀으니, 당연히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정우현이 갑자기 진로를 바꾸자고 한 것이다.
“백화점이요, 백화점!”
“…왜?”
아버지가 물었다.
“아빠 선물 샀으니, 엄마 선물도 사야죠!”
“…아.”
아버지는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듯 소리를 냈다.
“…엄마 선물?”
어머니 역시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조용히 되물었으나, 입꼬리는 이미 슬쩍 올라가 있었다.
* * *
백화점 주차장에 도착하니 안경을 쓴 주차 안내인이 즉각 따라붙었다.
“VIP시죠?”
정우현네 가족이 타고 있는 커다란 새 외제 차량을 보고 바로 물어본 것이다.
전생의 2022년에야 외제 차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지만, 정우현네 가족이 차를 구매한 1999년 당시엔 비싼 가격과 세금 그리고 낮은 구매력과 괜한 편견 등으로 인해 그리 흔히 볼 수 없었다.
특히나 지금 정우현네 가족이 타고 있는 것과 같은, 커다란 차는 더 그랬다. 명백히 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어머니가 조수석 쪽 창문을 열고 대답했다.
이전에도 옛 차를 타고 가끔 왔었던 백화점이지만, 한 번도 이렇게 물어보지 않았던 안내인이다.
“…아, 그래요?”
하는데 정우현이 역시 차창을 열고 크게 소리쳤다.
“어떻게 하면 VIP가 될 수 있어요?”
“아, 연간 구매 금액이 3천만 원….”
하고 안내인이 기계적으로 답하다가, 뒷좌석의 정우현을 확인하고 안경을 한 번 고쳐 쓰더니 깜짝 놀랐다.
“…혹시 정우현 군?”
“예, 맞습니다!”
“…아아!”
그러고선 그가 머리를 꾸벅 숙이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저 이번 영화 너무 재밌게 봤어요! <인크레더블 킹 보이>!”
“하하하, 감사합니다!”“가족이랑 쇼핑 왔나 봐요?”
“예!”
그러자 안내인이 주위를 한번 빠르게 둘러보더니 얼른 말을 이었다.
“자, 내리세요, 우현 군 가족 여러분!”
“…예?”
어머니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답했다.
“…차 키만 꽂아 두시고 모두 내리세요! 발레파킹해 드리겠습니다!”
“와아!”
정우현이 신나서 탄성을 내뱉는데, 어머니가 확인차 물었다.
“…발레파킹은… VIP만 가능한 거 아닌가요…? 저희 그거 아닌데….”
“아아!”
안내인이 고개를 저으며 크게 말했다.
“상관없어요! 정우현 군이 왔지 않습니까! 이미 제 마음속의 VVVVIP란 말입니다! 자자, 얼른 내리세요!”
사실 굳이 안내인이 아니어도, 유명 배우는 VIP에 준하여 대우한다는 백화점 자체 규정이 있기도 했다.
결국, 정우현네 가족은 새 차에서 내려 편히 그에게 주차를 맡길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우현이 가족의 차량을 주차해 주는 안내인에게 꾸벅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안내인이 오른손으로는 운전대를 잡은 가운데, 왼손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운전석 차창 밖으로 쑤욱 내밀고는, 연신 팔을 흔들며 외쳤다.
“우현 군, 최고예요! 최고!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