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대서양 상공 브래드 퍼트의 전용기 안.
일반 항공기보다는 작았지만, 비즈니스 제트기답게 속도는 더 빨랐다.
전용기의 뒤편에는 짐을 싣는 공간 및 차고가 있었다. 차고엔 경호용 방탄 차량이 한 대 있었고, 그 앞칸에는 경호원들이 숙식하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쪽 즉 정우현 부자와 브래드가 거하는 곳엔 정말 있을 게 다 있었는데, 커다란 스크린은 물론 침대와 쇼파 그리고 각종 주류에 냉장고까지 일반적인 편의 시설을 전부 갖추고 있었다.
물론 정우현과 아버지가 미국에 올 때 타고 온 여객기 퍼스트 클래스도 좋았지만, 전용기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퍼스트 클래스에선 어디까지나 커다란 좌석 근처로 개인 공간이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용기에선 말 그대로 널찍한 비행기 내부를 모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기에, 훨씬 더 쾌적하고 편했다.
“특히 이건 말이야.”
브래드가 큐대를 잡고 당구공을 치며 말을 이었다.
“당구의 마스터만 할 수 있단다. 수평 비행이 아닐 시, 기체가 기울어져 언제든 공의 궤적이 바뀔 수 있거든.”
“세상에, 비행기에서 당구라니….”
아버지 정기석이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서 슬며시 큐대를 하나 잡았다.
“오우, 칠 줄 알아요?”
“오브 커어어얼스!”
아버지가 브래드의 말을 듣고 곧장 답했다.
그간 LA에 있으면서, 그는 영어가 꽤 늘었다.
일반적인 생활 영어라면 듣기는 얼추 무리가 없었고, 말하기도 기초적인 단어를 나열하는 식으로 대강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
“우현아! 아빠, 왕년에 당구장에서 살았다고 해!”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옆에 유능하기 짝이 없는 통역사 아들 정우현이 있었기에, 애써 힘들게 정확하지도 않은 영어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브래드가 아버지의 말을 전해 듣자 흥미로운 눈을 하고 말했다.
“오우, 그럼 한번 칩시다!”
“좋아요, 근데 당구는 내기를 해야 하는데….”
“하하하! 내기를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지면 그냥 패배자! 완전한(absolute) 패자가 되는 겁니다!”
짓궂은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브래드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패배자 즉 루저(Loser)라고 크고 또렷하게 발음을 하며 도발을 했다. 그것도 평소 그가 즐겨 쓰는 앱솔루트라는 무지막지한 수식어를 붙이며.
가뜩이나 영어를 잘 알아듣게 된 아버지였는데, 루저라는 단어를 들으니 바로 귀에 꽂혔다. 심지어 루저는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안 좋은 의미로 왕왕 쓰는 단어니까.
“좋아요, 그럼 합시다.”
아버지가 모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브래드를 보고 말했다.
정우현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봐서 조금 낯설기까지 했다. 퇴사한 이래, 물론 아들 덕에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본인이 직접 나서 대결을 하는 것이니 그럴 만했다.
심지어 상대는 세계 최고의 톱스타 브래드 퍼트였으니까.
물론 정우현도 당구를 잘 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전생에서는 거의 쳐 보지도 않았고 잘하지도 못했지만, 이번에는 큐대를 잡고 몇 번 연습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책 덕분에 이미 이론적으로 빠삭히 알고 있기도 했고.
하지만 이번에는 구경만 하기로 했다. 아직 몸이 작아 당구대가 높기도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와 브래드의 대결이라는 빅 매치가 눈앞에서 벌어질 참이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만큼은 잠자코, 어디까지나 아이처럼 지켜보며 응원할 때라는 걸 직감했다.
“규칙은 3구 쓰리쿠션으로 합시다. 괜찮죠?”
브래드 퍼트가 씨익 웃으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좋습니다.”
이에 아버지가 곧장 답했다.
3구 쓰리쿠션은, 당구공 하나를 큐대로 쳐 레일을 세 번 접촉하고 공 두 개를 맞혀야 1점을 얻는 방식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프로 당구의 규칙이기도 하다.
그러고서 아버지와 브래드는 10점 내기에 합의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하고서 브래드가 먼저 특유의 시원시원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하고 당구공을 쳤다.
그가 뱅킹 즉 자신의 공을 쳐서 아버지보다 반대편 레일에 더 가깝게 붙여 선 공격을 하게 된 것이다.
타닥!
브래드가 친 당구공이 레일 두 개를 접촉한 후 하나의 공을 맞히고 레일 하나를 더 접촉한 뒤 아슬아슬하게 나머지 하나의 공을 빗겨 나갔다.
“…아아!”
그가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으음.’
아버지는 즉각 브래드의 수준을 파악했다.
‘못하지는 않지만 엄청 뛰어나지도 않아. 그저 일반인이 꽤 노력하면 칠 수 있는 수준, 딱 그 정도군.’
하지만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공 하나를 간발의 차로 빗겨 나간 것이다.
“…아, 너무 오랜만에 치니까 잘 안 되네.”
“하하하! 나쁘지 않네요!”
“브래드도 뭐, 잘하네요.”
이렇게 정우현을 통해 서로 덕담을 주고받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남자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게임에 집중하는 것이다.
‘…루저… 외국까지 나와서 루저라는 말을 들을 수는 없지.’
큐대를 다시 잡으며 자세를 취한 채 생각하는 아버지다.
퇴사 후, 사실 아버지는 집에만 있으면서 이런 상념에 빠졌다.
자신은 졌다고. 그렇다고 브래드 말마따나 완전한 패배는 아니겠지만, 일단은 지금 져서 집에만 있는 거라고. 물론 아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성공해, 가정이 잘 풀리고만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버지 정기석이 아닌 아들 정우현 덕이었다.
그렇게 홀로 패배를 곱씹었는데, 이 순간 루저라는 타이틀을 걸고 내기 당구를 하게 된 것이다. 상대가 외국인이든 배우든, 아니 세계 최고의 톱스타든 상관없었다. 현재로선 누구든 간에, 무조건 이겨 루저가 아닌 위너로 거듭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아아!”
하지만 아쉽게도 아버지의 공이 또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며 브래드의 차례가 되었다.
“…헤이, 브래드.”
정우현이 그런 브래드 옆에 있다가 영어로 그를 작게 불렀다.
“으음?”
이제 막 공을 치려고 한껏 집중했던 브래드였다.
한데 누가 봐도 큐대 방향을 잘못 잡고 있었던 것이다.
“실수는 하면 안 되죠!”
“….”
정우현의 말이 무슨 뜻인가 싶어 잠깐 생각하더니, 브래드가 곧장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고맙다!”
* * *
시간이 흘러 어느덧 9 대 9 매치 포인트 시점.
“으!”
브래드 퍼트의 공이 아쉽게 빗맞으며 승리를 놓치고 말았다.
“분명히 완벽했는데! 왜 안 맞는 거지!”
그가 안타깝다는 듯 크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차례는 넘어가 아버지가 큐대를 손에 들었다.
한참을 당구대를 바라보며 드디어 상체를 숙이고 자세를 잡았는데, 순간 옆에서 아들 정우현이 한국어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왼쪽 상단이요.”
공의 정중앙에서 조금 왼쪽으로 치려고 했는데, 아들이 갑자기 속삭인 것이다.
“…상단을 치세요.”
아버지는 정우현의 말을 듣고 잠자코 있다가, 끝내 아들의 말대로 왼쪽 상단을 쳤다.
타닥.
곧장 당구공이 레일을 한 번 접촉하고 공 하나를 맞힌 뒤 레일을 두 번 더 접촉하고서 마침내 나머지 공 하나를 맞혔다.
“와아!”
아버지가 순간 소리를 질렀다. 이긴 것이다.
“오….”
브래드 퍼트가 순간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금세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했네요, 하하! 제가 졌습니다. 당신이 승자예요, 승자!”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브래드의 입에서 위너라는 말을 들었으니 그럴 만했다.
물론 정우현 또한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브래드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하고 생각을 이었다.
‘아버지가 이기는 게 훨씬 중요하다. 브래드는 어쨌든 부족함 없는 톱스타, 이에 반해 아버지는….’
“하하하하하! 내가 브래드 퍼트를 이기다니! 엄마한테 자랑해야겠다! 하하하하하!”
마구 웃으며 들떠 있는 아버지를 정우현이 가만히 바라봤다.
‘…우리 아버지니까. 내색은 안 하시지만, 퇴사로 분명 상심하셨을 텐데 잘됐어. 오늘의 승리를 평생 기억하실 거야.’
옳은 생각이었다. 브래드 퍼트에게 이번 당구 게임은 그가 평소 즐기는 수많은 놀이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아버지 정기석에게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더 이상 루저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정우현은 둘의 대결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한데 브래드 퍼트가 아버지를 도발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게임일 뿐이지만, 만약 아버지가 지면 게임이 단순히 게임으로만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이에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브래드는 게임 결과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변함없이 쾌활한 모습으로 정우현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크게 말했다.
“헤이, 우! 뭐 먹고 싶어? 신나게 놀았으니, 이제 맛있는 걸 먹어야지! 말만 해! 뭐든 다 있다고! 이 커다란 독수리에는 조종사고, 셰프고, 경호원이고, 배우고 모두 세계 최정상급만 탈 수 있단다! 하하하하!”
무지막지한 브래드의 웃음을 들으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정우현이었다.
* * *
시간이 지나 빛이 차단된 비행기 실내, 정우현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아버지 곁에서 편히 쉬고 있었다.
한데 아버지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우현아, 어떻게 알았니? 왼쪽 상단을 쳐야 하는지.”
“비행기가 기울어져 있었어요.”
“…뭐?”
“말 그대로예요. 비행기가 조금 기울어져 있었어요, 살짝 느껴졌죠.”
정우현이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사실 브래드 차례에서 끝이 났어야 했어요. 그가 정확히 노리고 공을 쳤거든요. 근데 평소와 다른 궤적을 보고, 확신했죠. 비행기가 조금 기울어져 있구나. 그래서 알려 드린 거예요.”
“…대단하다, 역시 우리 아들….”
하고서는 놀라움도 잠시 아버지가 곧장 되물었다.
“근데, 브래드한테 미안해서 어떡하지?”
“하하하. 아빠. 브래드는 당구고 뭐고 이미 다 잊고 있을걸요?”
“그건 그래도, 내가 너한테 도움을 받아 이긴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
“에이, 아빠. 저는 어디까지나 말로만 알려 줬을 뿐이잖아요, 마치 코치처럼요. 그리고 기억 안 나세요? 게임 중반엔 제가 브래드한테도 도움을 줬다고요.”
그랬다. 중반, 누가 봐도 명백히 공을 잘못된 방향으로 치려고 자세를 취한 브래드에게, 정우현이 실수는 하면 안 된다고 영어로 넌지시 말했다. 이에 브래드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곧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큐대를 제대로 잡아 공을 쳐 점수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엄밀히 하면 이것 또한 정우현이 게임에 개입한 것이었다. 즉 결과적으로 그는 공평하게 아버지와 브래드 모두에게 한 번씩 도움을 준 셈이었다.
“그러니까 정작 말만 듣고 공을 제대로 쳐서 이긴 사람은 아빠예요. 즉 아빠가 뛰어난 선수라서 이길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브래드한테는, 저도 더 잘해 줄 거니까 걱정 마세요.”
하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드르렁. 드르러엉.
코 고는 소리였다. 브래드 퍼트가 자신의 침대에서 코를 무진장 크게 골며 자고 있는 것이다.
이에 아버지가 슬쩍 브래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아들을 보고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브래드는 항상 유쾌한 사람이지. 잠도 유쾌하게 자는 것 같고.”
“하하하, 맞아요.”
하고서 정우현이 모처럼 아이답게 커다란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전생에서는 안을 수 없었던 아버지를 끌어안을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일이었다.
“잠깐 우리도 눈을 좀 붙이자.”
“예, 아빠.”
하고서 둘은 다시 평온히 눈을 감았다.
즐거운 추억을 간직하게 된 정우현과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