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영화 <인크레더블 킹 보이>의 촬영이 무르익으며 중후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야기상 정우현은 고고학자인 브래드와 끝내 가까워져 그의 설득으로 어느덧 다른 세계에서 지구로 넘어왔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며 슬슬 전 지구적으로도 두각을 내고 있었다.
즉 할리우드 특유의 무지막지한 큰 스케일과 액션 씬이 돋보이는 촬영이 시작될 참이었다.
정우현은 한국에선 경험하지 못한 촬영 규모에 흥미로운 눈으로 여기저기를 바라봤다.
‘대단해, 이게 진짜 할리우드 영화구나.’
그러고선 곧 스태프들이 촬영 준비를 알렸는데, 그중 한 명이 정우현에게 말했다.
“우!”
“예?”
“감독님이 너 찾는다!”
“그래요?”
하고선 그가 곧장 스티븐 감독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감독님?”
“오, 왔구나, 우.”
스티븐이 특유의 너그러운 미소를 띠며 정우현을 바라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민이 있는 듯 어딘가 복잡한 표정을 살짝 비치기도 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감독님?”
그 모습을 정우현이 재빠르게 포착하고서는 곧장 물었다.
이에 스티븐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되물었다.
“…아, 혹시 지금 세트장 자세히 봤니?”
쑥 둘러보기만 했을 뿐 제대로 보지 않은 정우현이었다.
“아니요.”
“음, 실은 말이다.”
하고선 그가 조금 난감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오늘 촬영할 씬이 내가 일찍이 말했던 그 점프 씬이다. 소년 왕이 높은 지점에서 지상을 향해 단숨에 뛰어내려야 하지. 물론 아래 매트가 깔려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결국 결정했다.”
“…어떻게요?”
“CG를 쓰기로.”
“아아!”
하고서 정우현이 스티븐의 두 눈을 빠르게 살폈다.
단호했다. 더 이상 어떤 말을 해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다 너의 안전을 위해서란다. 이 점프 씬을, 아이인 네가 어떻게 하겠니. 걱정 마라, 요즘 컴퓨터 그래픽이 많이 발달해서, 그렇게 부자연스럽지도 않을 테니.”
라고는 했지만 때는 아직 1990년대 말. 세계를 선도하는 할리우드의 영상 기술이긴 해도 지나친 CG는 육안으로도 쉽게 티가 날 때였다. 즉 부자연스럽고 어색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정우현이 흔들림 없는 스티븐 감독의 두 눈을 보며 생각했다.
‘나에게는 첫 액션 영화다. 그것도 한국을 벗어나 해외에 진출해서 찍는 첫 할리우드 영화. 거기에 감독은 세계 최고의 스티븐 스틸버그고 동료 배우는 무려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라는 브래드 퍼트다.’
그러고서는 입을 굳게 다물며 생각을 이었다.
‘한데 여기서 내가 단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액션 씬에서 제외당해 의도치 않게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트리고 싶진 않아. 더군다나 파트너인 브래드는 실제 거의 모든 액션을 직접 해내고 있잖아!’
하고 그가 마침내 작정한 듯 크게 외쳤다.
“아니요!”
그러고는 더욱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해 보겠습니다!”
하고 스티븐 감독의 대답도 듣지 않고 뒤를 돌았다.
그러고서는 그가 말한 세트장을 빠르게 찾아 놀라운 속도로 달려갔다. 그간 아이라서 일부러 속도를 낮춰 달리곤 했는데, 이젠 그런 것 상관없이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리고 끝내 세트장 위로 올라갔다.
“…어? 지금 뭐 하는 거야!”
“안 돼!”
이에 스태프들은 물론 감독도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일순간 촬영장이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잠시 쉬고 있던 브래드도 높은 곳에 홀로 올라간 정우현을 보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내려와! 킹 보이! 위험해에에에에에!(dangeeeeeerous!)”
하지만 정우현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뛰어내렸다.
슈우우우욱!
타아아악!
“아아아아아!”
“…말도 안 돼!”
정우현이 매트 위에 사뿐히 두 발로 착지하고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I can do anything! (저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심지어 마치 체조 선수처럼, 공중에서 화려하게 여러 바퀴 돌기까지 했다.
어느새 정우현 앞까지 달려온 브래드 퍼트가,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정우현을 보고 말을 잃었다.
“….”
한국의 대표 아역 스타가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음을 당당히 입증한 순간이었다.
* * *
그 이후로 촬영은 일사천리 진행됐다.
정우현은 온갖 액션 씬을 직접 앞장서서 보여줬고, 사람들의 노파심은 금세 걷혔다.
물론 촬영진도 정우현의 몸에 와이어 복장을 입히는 등 안전 장비 및 시설도 철저히 준비했다.
“하하하! 우! 나 너무 신난다!”
브래드 퍼트가 함께 액션 씬을 촬영하다가는 크게 웃으며 정우현에게 말했다.
“왜요?”
“이렇게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는 처음이다! 액션 씬을 찍는데 말이야!”
“하하, 그래요?”
“그래! 솔직히 하자면, 연기도 뛰어나고 매력 있는 배우 중 이 액션까지 직접 잘 해내는 사람은 별로 없단다. 대부분 대역을 쓰고는 하지. 몸값이 어마어마하니까, 혹시나 다칠까 봐 몸을 사리는 거야. 때론 그저 자신 없어 하기도 하고.”
“자, 준비!”
스티븐 스틸버그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촬영 개시를 알렸고, 이에 브래드가 즉각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짜 배우라면, 이 정도 액션은 직접 해 줘야 하지 않겠어? 솔직히 이제껏 나 혼자만 뛰어다닐 때가 많았는데, 너랑 같이 호흡을 맞추니까 너무 재밌구나! 하하! 자! 다시 촬영이다. 집중하자, 우!”
“옙! (Yeap!)”
“레디, 액션!”
감독의 외침과 함께 촬영이 시작됐다.
촬영이 막바지에 이르며 씬도 거의 종반에 다다랐는데, 오늘이야말로 두 배우의 가장 고난도 액션이 필요한 때였다.
소년 왕 정우현과 고고학자 브래드가 합심하여, 지구 암흑 세력의 최후 우두머리인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응징하는 씬이었다.
악당 매드 사이언티스트는 고도로 발달된 과학 기술을 이용해서 정우현 브래드 콤비에게 무지막지한 공격을 가했는데, 전투 씬의 초반은 둘이 다소 고난을 겪는 모습이었다.
날아오는 레이저 광선과 안드로이드의 습격을 가까스로 피하느라 몹시 날렵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등 카메라 앵글 여기저기를 빠르게 뛰고 굴러야 했다.
물론 안드로이드의 움직임이나 광선 같은 경우 불가피하게 CG 처리를 할 예정이지만, 인물들의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배우들이 직접 해내야 한다.
“컷, 오케이!”
다행히 정우현의 몸놀림은 아주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었고, 재빨랐으며 힘찼다. 누가 봐도 영웅 인크레더블 킹 보이였다.
그렇게 초반의 합동 씬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브래드!”
정우현이, 줄거리 상 이어지는 단독 액션 씬을 먼저 준비하고 있는 브래드를 불렀다.
“으음? 왜?”
“이번에 브래드가 촬영할 때 말이에요!”
“응?”
브래드가 곧장 정우현의 말을 경청했다. 연기는 물론 액션뿐만 아니라 태도까지, 동아시아에서 온 이 작은 소년은 그야말로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대단하고 기특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제3호 안드로이드의 목을 뽑잖아요!”
“그렇지!”
“그때 안에서 콸콸 솟구치는 기름이 브래드의 얼굴에 잔뜩 튈 때 애드립을 하나 하는 거 어떨까요?”
“애드립? 어떤?”
브래드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즉각 물었다.
“브래드가 즐겨 쓰는 표현 있잖아요!”
하고선 정우현이 그의 흉내를 내며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짐짓 굵은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What a absolutely fucking metal! (이런 겁나게 빌어먹을 고철 덩어리!)”
정우현의 말에 브래드가 조금 놀란 듯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한순간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그러고선 계속 킥킥대며 말을 이었다.
“좋다, 좋아! 한번 해 보지. 잘 맞아떨어졌으면 좋겠구나!”
역시 흔쾌히 받아들이고 촬영을 시작하는 브래드였다.
배우들의 애드립은 감독의 성향과 촬영장의 분위기에 따라 허용될 수 있는 범위가 정해진다.
어떤 감독은, 배우들이 시나리오에 쓰여 있는 글자에서 토씨 하나라도 벗어나 대사를 하는 걸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어떤 감독은 굵직굵직한 서사만 시나리오에 쓰고 그때그때의 자잘한 대화는 즉흥적으로 짜거나 배우들의 애드립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스티븐 스틸버그는 다행히 애드립에 관대한 편이었다. 얼마든지 서사가 더 탄력이 붙고, 대화가 맛깔스러워져 영화가 빛을 발할 수만 있다면 애드립이든 무엇이든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실은 정우현이 스티븐 감독의 그와 같은 성향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브래드에게 조언한 것이다.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브래드가 능숙하게 액션을 펼쳤다.
그러고서는 드디어 안드로이드 3호의 목을 뽑고 얼굴에 기름을 뒤집어쓰며 크게 말했다.
“What a absolutely fucking metal!”
원래 대사가 없는 씬이었기에, 스티븐 감독이 조금 놀랐으나 금세 그가 분위기를 파악하고 계속 카메라를 주시했다.
이 순간 천하의 브래드 역시, 조금 긴장했다.
갑작스러운 애드립에 언제든 NG 사인이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고, 마침내 스티븐 감독이 외쳤다.
“컷, 오케이!”
그러고서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감독은 물론 스태프들도 긴장을 풀며 촬영장이 일순간 웃음바다가 되었다.
“잘했군, 잘했어! 딱 맞는 애드립이야!”
“하하하, 감독님!”
하고서 브래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가 알려 준 거예요! 한번 해 보라고!”
“…오, 그렇군!”
스티븐이 바로 고개를 돌려, 다음 단독 액션 씬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 정우현을 봤다.
그러고서는 그를 향해 엄지를 세워 보였다.
정우현이 뒤늦게 감독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엄지를 세워 화답했다.
* * *
정우현의 액션 씬이 시작됐다.
마침내 무지막지한 습격과 장애물을 모두 극복하고, 수많은 사람을 살상한 최후의 악당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대면해 단숨에 물리치는 씬이었다.
“레디, 액션!”
먼저 CG로 처리될 미사일을 연신 피하고 바닥을 빠르게 구른 뒤 점프해 옆 벽면을 빠르게 디뎌 서너 발자국 달려야 한다.
실상 벽면을 달리는 씬은, 높은 데서 뛰어내릴 때처럼 성인 배우들도 자세가 흐트러져 영상화하기 쉽지 않으나 정우현은 또 무리 없이 직접 해내고 말았다.
탁탁탁!
빠르게 벽면을 디디며 달리고선 다시 바닥에 착지한 뒤 또 점프를 하고, 역시 CG 처리될 악당이 탄 로봇의 팔 공격을 공중에서 피해 낸다.
이를 실감 나게 보이기 위해선 점프력이 높아야, 즉 체공 시간이 길어야 하는데 정우현은 또 놀라운 점프력을 보여 줬다. 심지어 그러고는 마치 지난날 높은 세트장에서 뛰어내렸을 때처럼 몸까지 회전시키며 스릴 넘치면서도 화려하게 회피 씬을 단번에 성공시켰다.
마침내 소년 왕 정우현이 매드 사이언티스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에 손을 대고 외치는 거의 마지막 씬이었다.
“Bastaaaaard! (이 노오오오옴!)”
이에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동공이 한순간 풀렸다.
그러고서 정우현이 로봇을 강하게 발로 차면, 악당은 로봇과 함께 멀리 날아가 결국 폭발해 버린다.
“오케이, 컷!”
바로 오케이 씬이 떨어졌다.
“대단해, 대단해! 역시 우야!”
스티븐 스틸버그가 손뼉을 치며 크게 말했다.
그러고는 주위 모두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우 덕분에 웬만한 액션 씬부터 해서 대부분의 씬을 빠르게 다 잘 찍었어! 그래도 나머지 소소한 씬이 몇 개 남았으니, 다들 지금처럼 잘 해내자고!”
이에 스태프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예에에엡!”
* * *
촬영이 모두 끝났다.
정우현은 연기하는 한편, 지난번 한국에서 <겨울 방학>을 촬영할 때처럼 스티븐 감독에게 연출에 있어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할까 했는데 그냥 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미진한 부분이 세세하게 있기는 했지만, 큰 결점은 없었고, 결정적으로 감독이 의도한 대로 촬영을 해도 사람들이 몹시 좋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즉 이대로 크게 흥행할 게 분명했다. 세계적인 감독의 대중적인 작품이니만큼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 영화는 한 씬 한 씬….’
그가 촬영장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스태프들을 보며 생각했다.
‘<겨울 방학>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제작비가 투입됐다. 괜히 조언해서 씬이 변형되거나 추가되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더 들겠지. 그냥 이대로도 문제없어.’
하며 자신은 배우로서 할 일을 다 했고, 더 이상 작품에 관해 고민하지 않아도 잘 풀리리라 확신하는 정우현이었다.
“하하하! 고생했어, 우!”
브래드가 촬영 후 뒤풀이 파티에서 정우현에게 말했다.
그는 정우현에게 있어 어느 순간부터 마치 김도진처럼, 아니 김도진 이상으로 친근한 삼촌 같았다.
실은 브래드가 특유의 친근함과 시종일관 격을 두지 않는 태도로 정우현을 대해, 약 30살이라는 나이 차에도 삼촌보다는 오히려 형이라거나 심지어 친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특히나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며 서로 이름을 부르니 더 그랬다.
“브래드도 고생했어요!”
“나야 뭐, 재밌기만 했지. 내내 노는 것 같았다고!”
“저도 그래요!”
“하하하하, 알고 있다, 우도 일을 즐긴다는 걸.”
마음이 통했다. 세계적인 톱스타와 이렇게나 마음이 통할 수 있다니, 정우현은 한편으로 신기하기도 했다.
“브래드, 그럼 이제 뭐 할 거예요?”
“…뭘 하다니?”
브래드가 의아한 눈으로 되물었다.
“아니, 이제 촬영도 끝났잖아요. 감독님이야 영화 후반 작업으로 계속 바쁘시겠지만, 우리는 좀 쉴 수 있잖아요.”
“오, 아니야. 우리도 아직 할 일이 있어, 우. 그것도 꽤 많이 있다고.”
“…뭐요?”
“영화 홍보를 해야 할 거 아냐.”
“아아.”
“이곳 미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한다고. 잊었어? 여긴 할리우드야. 전 세계인들이 주시하는 영화의 본고장, 할리우드!”
그러고선 그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심지어 나, 브래드 퍼트와 세계적인 명 감독인 스티븐 스틸버그! 그리고 무엇보다 아시아 최고, 아니 세계 최고의 아역 스타인 인크레더블 우까지! 이렇게만 해도 벌써 엄청난 영화잖아! 그러니까 북미를 시작으로, 먼저 유럽 그다음 아시아까지 바쁘게 돌아다니며 홍보를 해야 해. 사람들에게 우리의 작품을 널리 알려야지!”
“와아….”
정우현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상상했다.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서게 될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생각했다.
‘…재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