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21)화 (21/200)

21화

영화 <인크레더블 킹 보이>의 촬영이 시작됐다.

흑인, 백인, 히스패닉 등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정우현을 둘러싸고 분장을 시작했다.

“…이렇게 잘생긴 아시아 소년은 처음 봐!”

흑인 여자가 정우현의 얼굴에 파우더를 칠하며 영어로 말했다.

“그러게! 너무 귀여운걸!”

뒤에서 정우현의 머리를 손질해 주던 백인 여자가 곧장 동의했다.

“감사합니다!”

이에 정우현이 크게 말했고, 두 여자가 즉각 놀라고선 되물었다.

“오우! 너 영어 할 수 있니?”

“그럼요!”

그러자 가만히 있던 히스패닉 여자가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알고 있었어! 신문에서 봤거든!”

“오, 정말?”

때는 1998년. 백인을 중심으로 세계 스타들이 즐비한 할리우드에서 동양인을 찾아 보기란 아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양인을 향한 시각이 긍정적이고 부정적이고를 떠나 워낙 수가 없으니, 촬영장 사람들로서는 아예 그들에 관해 잘 모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보 자체가 거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정우현은 무려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실상 그는 감독 스티븐 스틸버그의 덕을 본 셈인데, 그는 유태인으로서 소수 민족으로서의 역사와 그 아픔을 부모로부터 뼛속 깊이 교육받고 자랐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다양한 인종 간의 조화로운 세상을 꾀하는 서사를 즐겨 쓰고 메가폰을 들었다. 그런 그에게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인 한국의 한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는 건 그리 남다른 일도 아니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스태프를 특히나 애초 인종에 편견이 없거나 덜한 사람들을 골라 팀을 꾸리기도 했다. 평범한 감독이었으면 생각도 못 했겠지만, 스타 감독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아, 미안하다! 나는 잘 모를 줄 알았어!”

흑인과 백인 여자는 아시아 소년 정우현이 주연이라고 하기에, 영화 내에서도 그저 아시아 말을 쓸 줄 알고 있었다.

“괜찮아요! 전부 칭찬이었잖아요!”

“맞아, 맞아! 하하! 우린 너처럼 매력적인 소년은 처음 본다!”

“감사합니다! 저도, 누나들처럼 분장을 잘 하는 분들은 처음 봐요!”

“어머!”

정우현의 말에 여자들이 깔깔 웃었다.

“얘! 말하는 것 좀 봐!”

“애인 줄 알았는데 어른이었네! 하하하!”

기분이 좋아 연신 웃는 여자들을 보며 정우현이 생각했다.

‘으음. 전생까지 하면 이 분들보다 실상 내 나이가 더 많긴 할 텐데.’

하고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 * *

실상 아시아인 소년 정우현을 향한, 행여 있을지도 모르는 편견은 부지불식 간에 걷혔다.

정우현 본인이 누구보다 먼저 솔선수범해 촬영장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연기를 잘 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그는 배우, 스태프 등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한 모든 사람 중 촬영장을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당일 작업이 끝나서도 가장 늦게 촬영장에서 떠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곳 할리우드에서만큼은 신인이고 무명이며, 결정적으로 이방인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모든 힘을 촬영장에 쏟아부었다. 다행히 그의 놀라움을 넘어 가공할 체력은 그런 생각을 뒷받침하고도 남을 수 있었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스태프들이 오히려 그런 그를 말리며 보호하기까지 했다.

“우! 좀 쉬어! 네 촬영은 다 끝났잖니!”

“…피곤하지도 않아? 하하, 널 보면 나도 힘이 나는구나!”

“오오, 우… 널 보면 게으른 내 아들이 생각난다. 우리 애가 너의 10분의 1이라도 닮았으면….”

그때마다 정우현은 밝게 웃으며 크게 말했다.

“제가 쉬면, 누군가는 그만큼 더 일을 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저는, 촬영장에 있는 게 재미있어요! 그러니까 그냥 다 같이 빨리 끝내고 함께 쉬어요!”

그런 그를 보면서, 스태프들은 피부 색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정우현 즉 동양의 소년을 보며 점차 열광하기 시작했다.

* * *

“레디…!”

스티븐 스틸버그가 카메라를 주의 깊게 보며 외쳤다.

“…액션!”

영화 줄거리상 초반부. 브래드 퍼트가 드디어 다른 세계의 소년 왕인 정우현 앞에 끌려와 무릎을 꿇는 씬이었다.

고고학자인 브래드는 왕이 뜻밖에도 어린 아이인 것을 알고, 우습게 생각하며 틈을 타 습격하려 한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초능력자인 정우현이 단숨에 브래드의 마음을 읽고 즉각 병사들을 시켜 그를 포박한다.

그러고서 곧장 그의 머리에 손을 대고 말한다.

“Don't be silly. (허튼짓하지 마라.)“

“으으으….”

브래드 퍼트가 순간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토한다.

소년 왕 정우현의 초능력으로 극심한 두통을 느끼는 것이다.

정우현이 곧장 건조한 목소리로 대사를 했다.

“3초, 아니, 1초만 내가 능력을 발휘해도 네 머리는 터져 버린다.”

“…아아!”

“그래도 계속 버틸 거냐.”

라는 대사를 끝으로 스티븐 스틸버그가 크게 외쳤다.

“컷, 오케이!”

단 한 번만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좋았어, 좋아! 잘했어, 우! (Woo!)“

정우현은 촬영장에서 한국 이름 석자 중 가운데 음절 ‘우’로 불리고 있었다.

일단 미국인들이 발음하기 쉬웠고, 또한 간결했기 때문이다.

“하하, 훌륭해, 훌륭해! 역시 잘할 줄 알았어!”

하고 스태프들 모두 들으라는 듯 한껏 정우현을 치켜세우는 스티븐 감독이었지만 내심은 더했다.

기대 이상이었던 것이다.

‘…이건 말이 안 돼.’

스티븐이 생각했다.

‘물론 내가 고르긴 했지만…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온 여섯 살짜리 아이가 이렇게나 빨리 할리우드에 적응하고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니…. 그것도 내로라하는 세계 스타들 사이에서 하나도 주눅 들지 않고,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대사를 하면서 말이야….’

하면서 자신이 촬영한 씬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카메라를 주의깊게 보고 있은 정우현을 보고 생각을 이었다.

‘심지어 이 천재 아이는 사전에 카메라의 움직임을 모두 꾀고 있어. 뿐만 아니라, 브래드 그리고 조연들, 아니 수많은 엑스트라의 대사와 행동까지 모두 알고 있다고! 이건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머릿속에 집어넣었다는 얘기지! 하! 그야 말로 믿을 수 없는(incredible) 일이야!'

솔직히 마음 같아선 촬영하는 내내 정우현을 칭찬하고 싶었지만, 다른 배우, 특히 세계 최고의 톱스타인 브래드 퍼트가 기가 죽을 것 같아 극도로 자제하는 스티븐 스틸버그였다.

감독은 촬영장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고, 각 역할마다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내야 한다. 따라서 만약 한 배우만 지나치게 편애한다면, 분위기가 안 좋아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팀워크가 깨지고 영화의 질은 나빠지기 마련이다.

한데 어느 날 촬영 중간 잠깐 쉬는 시간에, 브래드 퍼트가 스티븐 스틸버그를 은밀히 찾아왔다.

“헤이, 감독님.”

“오우, 브래드! 무슨 일이야?”

“하하! 보고 싶어서 와 봤습니다!”

“맨날 보는데 무슨 말이야?”

하자 브래드가 씨익 웃더니 수 초간 스티븐 감독을 살피고서,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독님, 그러실 필요 없어요!”

“…뭐가?”

스티븐은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브래드 퍼트가 자신을 따로 찾고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항상 유쾌한 모습으로 농담을 즐겨 하며 여기저기 껄껄 웃고 다니는 브래드였기 때문이다.

“우! 말이에요! 우리의 인크레더블 우!”

“…으응?”

스티븐은 모르는 척 되물었다. 브래드 퍼트가 상대 역인 정우현에 관해 무슨 말을 할 줄 몰랐기에 일단 말을 아껴야 할 때였다.

“하하하! 왜 모르는 척하세요, 감독님! 정우현. 엄청난 연기를 선보이고 있잖아요! 아뇨! 제가 보기엔 연기라는 말도 부족해요! 그냥 감독님이 쓴 이 가상 세계 속에서 애초 소년 왕으로 태어난 것 같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스티븐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러자 브래드가 더 신나서는 크게 말했다.

“솔직히 저는 놀랐어요. 아니, 놀란 것뿐이겠습니까! 뭐, 영화고 연기고 감독님이 더 잘 아실 테니 긴말 않겠습니다!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제 생각해 준답시고 더 이상 자제하실 필요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킹 보이에게 더 힘을 실어 주세요!”

“…으음, 알고 있었군?”

스티븐이 그제야 표정을 다소 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하하! 당연하죠! 정작 저는 배울 점이 많아서 좋은데, 감독님이 자꾸만 눈치를 보니까 제가 더 어려웠단 말입니다!”

“…하하하, 그랬군!”

“감독님, 실망이에요! 저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닌 거 알지 않습니까!”

브래드의 말에 스티븐 스틸버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바보 같았군. 너무 어렵게 생각했어!”

“하하! 괜찮아요, 괜찮아! 이제 다 얘기가 됐으니까요! 그럼 다시 갑시다, 감독님! 인크레더블 우와 인크레더블한 영화를 찍으러! (to shoot an incredible movie with incredible Woo!)“

모든 오해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 * *

촬영이 다시 시작됐다.

브래드 퍼트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촬영장을 둘러보며 크게 소리쳤다.

“자자! 파이팅 합시다! 파이팅!”

하면서 눈으로는 누군가를 계속 찾았다. 정우현이었다.

“어이! 인크레더블 킹 보이!”

멀리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우현이 두리번거렸다.

브래드였다. 브래드 퍼트가 금발을 휘날리며 자신에게 마구 달려오고 있었다.

‘…하하, 뭐지.’

정우현이 그런 그를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약간의 미소를 짓고 생각했다.

‘원래도 보통 그랬지만, 평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이는 브래드다!’

“가자, 가!”

이윽고 브래드가 정우현 곁에 오더니 그를 번쩍 들고 자신의 어깨 위로 목말을 태웠다.

“와우, 브래드!”

정우현은 물론 깜짝 놀라 당황하면서도 즐거워서 마구 웃었다.

“하하하하!”

“우리의 보물! 킹 보이! 가자, 가! 영화 찍으러 가자! 하하하하!”

그 모습을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며 미소 짓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스티븐 감독이었다.

거리낌 없이 함께하며 즐거워하는 두 배우를 보면서 감독은 영화의 성공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하하하하하!”

브래드의 어깨 위에 있는 정우현의 웃음소리가 촬영장 위로 맑게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그런 그를 보며 모두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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