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이곳 LA까지 오는 데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스티븐 스틸버그 감독이 아버지 정기석을 보고 물었다.
그러자 정우현이 곧장 아버지에게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해줬다.
“아… 덕분에 편히 왔다고 말씀드려, 하하.”
하고 웃으면서 말하는 아버지였고, 정우현은 즉각 다시 한국어에서 영어로 스티븐 감독에게 통역해 줬다.
그러자 스티븐 감독이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하고선 정우현을 보고 말을 이었다.
“역시 통역사가 필요 없을 줄 알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게 됐니?”
“아.”
정우현이 잠깐 생각하고는 외쳤다.
“A long time ago! (오래전부터요!)“
* * *
공항에서부터 리무진이 약 한 시간가량 빠르게 달리고서는 드디어 어느 널따란 철문을 앞에 두게 됐다.
철문에는 차단봉이 내려져 있고 사설 경비가 서 있었는데, 멀리서 리무진이 오는 것을 보자 즉각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차단봉을 올리며 문을 열었다.
“와아….”
아버지는 티브이에서만 보던 으리으리한 광경에 연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리무진은 철문에 들어선 뒤 약 10분을 더 달렸고, 이윽고 대저택이 눈앞에 나타났다. 차량은 저택에 딸린 커다란 차고 안으로 들어가 멈춰 섰다.
“다 왔다.”
스티븐이 말했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가까운 내 별장이다. 하지만 워낙 번화가 근처에 있다 보니, 여기 오기까지 이래저래 복잡해서 자주 거하지는 않는단다.”
이에 정우현이 주위를 둘러보며 곧장 말했다.
“별장이 참 멋져요!”
“하하하, 고맙다!”
한데 정우현이 곧 차고 한쪽에 주차된 다른 차를 발견했다.
날렵한 윤곽에 끝은 부드러운, 유선형의 차체가 돋보이는 연두색의 2인승 스포츠카였다. 한눈에도 고가의 슈퍼카임을 알 수 있었다.
스티븐 감독이 정우현의 시선을 확인하고는 곧장 물었다.
“아, 저 차를 보는 거니?”
“예!”
“하하, 저것 또한 멋진 차지. 하지만 내 차는 아니야. 내가 끌기에는 너무 화려하고 튀거든.”
“…아, 그럼 누구 차일까요?”
“누구긴 누구겠니.”
하고서 스티븐 감독이 정우현 부자를 이끌고 차고에서 나왔는데, 저택 위쪽에서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렸다.
브래드였다. 브래드 퍼트가 저택의 널따란 2층 발코니 난간에 서서는 두 팔을 활짝 편 채 눈을 찡긋 뜨고서 정우현 부자와 스티븐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Hey, guys! I've been waiting for a long time! (어이, 친구들! 한참 기다리고 있었다고!)“
스티븐 감독 또한 씨익 미소 짓고서는 브래드를 올려보며 정우현에게 말했다.
“That car belongs to him. (그 차, 바로 저 사람 거다.)“
이러나저러나 브래드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특유의 익살스러우면서도 굵은 음성으로 연식 킥킥대고 웃었다.
“하하하하하.”
정우현이 전생에서 본 영화 속 그의 모습과 똑같았다.
* * *
“한국에서 온 꼬마야, 반갑다.”
브래드 퍼트가 1층 응접실로 내려와 정우현에게 악수 차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는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저택 관리인의 안내를 따라 휴게실에서 쉬고 있었다. 애초 영어를 하지 못했기에 함께 있어도 무언가 아들 정우현에게 도움을 주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먼 타국까지 함께 온 아이의 보호자, 아버지 정기석의 역할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족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정우현이 브래드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단단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네 영화, <겨울 방학> 겁나 압도적으로(absolutely fucking) 감명 깊게 봤단다, 꼬마야!”
세계적 톱스타인 브래드가 정우현을 먼저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것도 무진장 거친 언어를 섞어 가며.
브래드는 실제 성격도 영화에서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시원시원하고, 무엇보다 거침이 없었다.
그러자 정우현도 그의 작품을 내세우며 화답하려 했는데, 하마터면 2,000년 이후의 히트작을 얘기할 뻔했다.
전생에서 봤던 그의 영화 <트로이의 목마> 말이다.
그가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는 얼른 브래드의 초기작을 언급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브래드 퍼트 님(Mr. Brad Putt)의 영화 <델마와 로이스> 너무 재밌게 봤어요!”
그러자 그가 흥미롭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말했다.
“오우! 그 영화를 봤다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의 영화일 텐데?”
옳은 얘기였다. 델마와 로이스는 1991년 작품이고 정우현은 1993년에 태어났으니까.
해당 영화로 인해 브래드는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등, 그의 출세작이기도 했다.
“그럼요! 브래드 퍼트 님의 영화는 전부 꿰고 있다고요, 하하!”
스티븐 스틸버그로부터 연락을 받은 날, 정우현은 곧장 김은정 박사에게 전화했다.
이제 정우현은 핸드폰도 가지고 있겠다, 그녀와 더 자유롭게 연락을 하고 그랬다.
그러고서는 곧장, 그간 스티븐 스틸버그 감독이 연출하거나 브래드 퍼트가 출연한 모든 비디오 영화를 그녀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디브이디 플레이어는 아직 보급되기 전이었다.
물론 정우현은 이제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어서 얼마든지 직접 비디오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은정 박사가 정우현의 발달에 도움이 되는 도서 및 시청각 자료는 언제든지 자신이 지원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히고 강조한 끝에 여전히 그녀를 통해 그런 것들을 구해 보고 있었다.
정우현으로서도 그러는 게 훨씬 편하기는 했다. 그저 박사한테 언제든 무엇무엇이 필요하다고 말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오오, 좋군, 좋아.”
하고서는 브래드 퍼트가 곧장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꼬마야. 나를 어려워하지 말고, 그냥 브래드라고 불러라.”
“아, 정말요?”
“그럼! 미국에선 원래 그런 거다. 더군다나 앞으로 친해질 친구는 더 그렇지.”
“하하하, 알겠습니다! 브래드!”
“자, 자, 그럼.”
스티븐 감독이 정우현과 브래드를 흐뭇한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유쾌한 인사는 여기까지 하지! 벌써부터 우리 두 스타가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이니, 영화가 잘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드는군!”
스티븐 스틸버그 감독의 입에서 두 스타란 말이 나왔다.
즉 정우현을, 세계 최고의 톱스타인 브래드 퍼트와 함께 지칭하며 스타라고 한 것이다.
“그럼, 이제 슬슬 작업 얘기를 하자고. 브래드. 그리고 우현. 시나리오는 다 읽어 봤겠지?”
“예.”
“그럼요!”
정우현이 씩씩하게 답했다.
“좋았어. 다 봐서 알겠지만, 이번 영화는 뭐 엄청 심오하거나 내면의 무언가를 쥐어짜는, 그런 연기가 필요한 게 아냐. 스피디한 흐름 속에서 유쾌하면서도 통쾌한 모습을 시종일관 보이는 게 중요하지.”
맞는 얘기였다. 시나리오를 통해 정우현이 생각한 이상적인 인물들의 모습도 딱 그랬다.
“그러니까 그에 맞춰 연기를 펼치도록. 아, 그리고 우현.”
스티븐 감독이 정우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알다시피 액션 씬이 많은데, 우현이는 아직 어리니까 불가피하게 스턴트맨이나 CG를 많이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줄 알고 있으렴.”
순간 정우현이 크게 말했다.
“아니요!”
“…으응?”
그러자 스티븐 감독은 물론 브래드도 놀란 눈으로 정우현을 바라봤다.
“제가 다 할 수 있어요! 대역 필요 없어요!”
“오우, 멋지다! 하하하!”
브래드는 정우현이 귀엽다는 듯 크게 웃었다.
스티븐 감독 또한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하, 의욕 넘치는 건 참 보기 좋구나. 하지만 안 된다, 꽤 높은 곳에서 점프 후 착지하는 씬도 있거든. 성인은 괜찮아도 아이가 하기엔 조금 위험해서, 그냥 CG를 쓸까 생각 중이지. 그 외에도 고난도 액션 씬이 한두 개가 아니야.”
하면서 브래드를 잠깐 보고 말을 이었다.
“액션이면 도가 튼 우리 브래드도 대역을 맡겨야 할 씬이 몇 개 있을 정도니 우현, 무엇보다 너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러는데 순간 정우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몇 발자국 걸어서 공간이 조금 트인 곳으로 가서는, 한껏 다부진 표정으로 스티븐 감독을 보고 말했다.
“Look! (보세요!)“
하더니 놀랍게도 제자리에서 껑충 뛰더니 순간 물구나무를 서 버렸다.
“…아니….”
스티븐 감독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와우….”
브래드도 탄성만 내지르며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정우현은 물구나무를 선 채 그대로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는 이제 좀 몸이 풀렸다는 듯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슈슈슈슉!
앞뒤로 텀블링을 하는 것은 물론 오른손과 왼손으로 번갈아 땅을 짚으며 말 그대로 곡예를 부렸다.
그러더니 한순간 다시 두 발로 서서는 자신만의 두 관객을 슬며시 바라보며 빠르게 두 발을 움직였다.
타닥, 다닥다닥!
탭 댄스였다. 탭 댄스를 추기 시작한 것이다.
“….”
이쯤 되자 할리우드의 두 스타 감독과 배우는 넋을 잃고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정우현은 한참을 흥겨운 춤사위에 몸을 맡기더니, 한순간 양손을 다시 바닥에 짚고 전신을 빠르게 회전시키는 카포에라를 추다가 그대로 드러눕다시피 하다가는 오직 머리로 거꾸로 서서 빙그르르 도는 헤드스핀까지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엎드려 자세를 취하고선 끊임없이 팔 굽혀 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원, 투, 쓰리, 포…!”
무진장 빠른 속도였다. 숫자는 어느새 30 가까이 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스턴트맨 따위는 필요 없이 직접 모든 씬을 해내고 말겠다는, 스티븐 감독을 향한 무언의 강렬한 호소였다.
“Stop! (그만!)“
결국, 한순간 스티븐 스틸버그가 소리쳤다.
“Enough is enough! (충분하다, 충분해!)“
라는 말을 끝으로 드디어 정우현이 동작을 멈추고 바로 섰다.
땀이 한 방울 그의 뺨을 타고 흐르기는 했지만, 숨도 차지 않고 얼굴색도 그대로인 등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하! 하!”
숨죽이고 정우현을 보고 있던 브래드 퍼트는 그제야 호흡을 크게 하며 깔깔 웃어 댔다.
“하하하하하하!”
스티븐 감독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우현. 어디 서커스단 출신이니?”
언젠가 티브이에서, 정우현 만한 어린아이들이 몸을 자유재로 움직이며 온갖 곡예를 부리는 서커스를 봤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아닙니다!”
“하하하하하!”
브래드 퍼트는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헐떡거리며 계속 웃다가 드디어 조금 진정됐는지 크게 거친 언어를 외쳤다.
“겁나, 겁나 대단하구만! (Fucking, fucking great!)“
“…으으음.”
이 와중 스티븐 감독이 무언가를 고심하다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드디어 떠올랐네.”
옆에 있던 브래드가 곧장 물었다.
“뭐요, 감독님?”
“…제목. 영화 제목 말이야. 시나리오는 일찍 다 완성하고, 촬영도 상세하게 다 계획을 짜 놨지만, 이 제목이 계속 떠오르지 않았단 말이지.”
그랬다. 정우현도 일찌감치 시나리오를 받았지만 맨 앞 장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제작, 캐스팅 등 모든 것이 준비됐지만 오직 제목만 미정의 영화였던 것이다.
“오우! 뭡니까!”
브래드가 곧장 물었다. 그 역시 그간 제목이 무척 궁금했었다.
“Incredible King Boy.”
스티븐 스틸버그가 짧게 한마디하며 자신의 어린 주인공 정우현을 마치 영웅을 보듯 바라봤다.
그러고서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인크레더블 킹 보이. 이보다 더 완벽한 제목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