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정우현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뭐어어어!”
어머니 황희진이 크게 외쳤다.
아들 정우현이 연기를 시작하게 된 이래 가정 내외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지만, 오늘 같은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정말 브래드 퍼트랑 영화를 찍는다고?”
“네!”
“그, 잘생긴 브래드 퍼트랑?”
“…여보.”
아버지가 방에서 불쑥 나왔다.
어머니는 남편이 집에 없는 줄만 알고 있었다.
“…어? 여보, 마트 간다고 하지 않았어?”
“좀 이따 갈 거야.”
어머니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황급히 말했다.
“…들었어? 아, 미안, 미안! 하하, 여보! 연예인일 뿐이잖아! 지구가 반으로 쪼개져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자는 당신이라고! 잊었어? 난 여보 자고 일어난 모습도 사랑한다는 거.”
“하!”
어머니가 이렇게 흥분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국내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90년대에 이르러, 브래드는 한국에서도 최고의 인기 배우였기 때문이다.
“…아아, 대단하다, 아들!”
아버지가 눈을 살며시 뜨고 물었다.
“…우현이가 미국에 진출하는 게 대단하다는 거야, 브래드 퍼트랑 영화를 찍는다는 게 대단하다는 거야?”
“…당연히 아들이 미국에 간다는 게 대단하지!”
하고 어머니가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언제 호들갑을 떨었냐는 듯, 곧장 미간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으음….”
그러고서 정우현네 가족은 열띤 토의를 하기 시작했다.
약 한 시간 뒤, 마침내 결론이 나왔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한국에 남고, 정우현은 아버지와 단둘이 미국에 가기로.
“여권은 이미 신청해 놨으니까, 발급받는 대로 곧장 LA로 가면 돼.”
아버지가 말했다.
이에 어머니가 곧장 되물었다.
“대략 얼마나 있는다고?”
“6개월이요. 일단 6개월 촬영 일정 잡혀 있는데, 정확히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래.”
하면서 어머니가 갑자기 정우현을 와락 끌어안고 속삭였다.
“엄마, 아들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괜찮아요, 엄마.”
하고선 정우현이 장난꾸러기처럼 말했다.
“전화 자주 할게요! 편지도 쓰고요! 브래드 퍼트랑 같이 찍은 사진 첨부해서!”
“…어머.”
어머니가 얼굴을 조금 찌푸리면서도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이제 엄마를 놀리네!”
“하하하하!”
아버지가 재밌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러고서는 아내가 주는 눈치에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한순간 짐짓 근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하여간 여보 잘 지내고 있어. 다 같이 가면 좋지만, 일정도 불확실한데 온 가족이 무작정 다 미국으로 가는 건 아닌 것 같고. 또 다현이는 아직 너무 어려서 여기 어린이집에 다녀야 하고, 우리 집도 마냥 비워 둘 수는 없으니까.”
“응, 알았어, 걱정 마.”
그럼에도 어머니는 애정과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들 정우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현이가 걱정되고, 또 보고 싶을 것 같고 그러네.”
“…엄마.”
이번에는 정우현이 어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엄마의 강인한 아들이에요. 제가 어디서 무얼 하든 그 사실은 변치 않아요. 그러니까 마음 놓으세요.”
이에 어머니가 눈을 살며시 감고 천천히 말했다.
“엄마가 사랑해.”
그러고는 아들의 볼에 뽀뽀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 * *
아버지와 단둘이 비행기를 탔다.
좌석은 무려 퍼스트 클래스였다.
정우현과 아버지가 할리우드로 오기까지, 스티븐 스틸버그 감독이 무려 최상의 편의를 제공한 것이다.
“…와아….”
아버지가 널찍한 좌석에 몸을 거의 눕다시피 하며 말했다.
“우현이 덕분에 아빠 출세했다!”
“하하하! 아빠, 저도 너무 좋아요!”
하고서는 크게 소리쳤다.
“비행기도 처음 타고!”
“하하하하! 아빠는 타봤는데!”
신나게 웃는 아버지가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가 자랑스러운 듯 얘기했다.
“언제요?”
“엄마랑 신혼여행 갈 때!”
“아아.”
“근데 우현아.”
“…네?”
“그때랑은 비할 수 없이 좋다. 그때는 비좁은 데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마구 섞여 탔어!”
이코노미석이었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근데 지금은, 뭐! 아빠가 왕이 된 기분이다! 가만히 있는데 뭐 자꾸 좋은 걸 갖다주고!”
하면서 아버지가 고급 와인을 홀짝 마셨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생산된 와인으로서, 이코노미석에는 제공되지 않는 퍼스트 클래스 전용 와인이었다.
“하하하! 아빠가 왕이면, 그럼 전 왕자겠네요!”
“아아, 그럼, 그럼 당연하지!”
은은한 와인의 풍미를 느끼는 가운데 아버지가 크게 답했다.
“우리 아들은 왕자다! 세계 최고의 왕자! 하하하!”
그렇게 두 부자가 웃고 떠들며 퍼스트 클래스를 즐기다가는, 한순간 아버지는 술도 취하고 졸려 잠이 들었다.
이에 정우현은 좌석에서 이런저런 영화를 보고 음악도 듣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스튜어디스 한 명이 정우현 곁에 다가왔다.
“…혹시.”
“네?”
정우현이 곧장 고개를 돌리고 답했다.
“…아역 배우 정우현 아니니?”
“…아, 맞아요!”
“어머!”
스튜어디스가 곧장 놀라면서 밝은 표정을 지었다.
“맞네! 맞아! 어디서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하하하, 반갑습니다!”
“와아아! 안녕! 누나, 너 엄청 팬이야! <겨울 방학>을 무려 세 번이나 봤단다!”
“와아, 감사합니다!”
“엄청 울었잖아, 누나! 김도진 배우가 진짜 네 삼촌인 줄 알았어!”
“하하하, 실제로도 삼촌이라고 불러요!”
“아, 그래? 하하하! 아이고.”
하더니 그녀가 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잠깐만.”
그러고서는 곧장 어딘가로 사라졌다.
보통 기내에서 항공사 직원은 승객과 가급적 사적인 대화를 하면 안 된다. 어디까지나 승객들의 쾌적함과 편의를 위해 힘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스튜어디스는 워낙 정우현의 팬이기도 했고, 또한 나름 연차가 좀 되는 고참이라서 아주 잠시 팬심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곧 나타났고, 손에는 흰 종이 한 장과 조그마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저기.”
스튜어디스가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워하며 종이와 펜을 건네고 말했다.
“…사인해 주면 안 될까?”
“아.”
하고서 정우현이 곧장 종이를 받아 멋진 필체로 곧장 사인을 했다.
“여기요!”
“와아, 사인도 멋지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어 여섯 살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여섯 살짜리 아이가 하는 사인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졌다.
정우현은 영화 겨울 방학이 흥행하면서 팬들에게 사인해 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는 일찍이 필체학에 관한 서적도 여럿 독파한 끝에, 어느 날 즉흥적으로 자신만의 글씨체를 만들어 사인을 했다. 유려하면서도 깔끔한 느낌이 돋보이는, 독특한 사인이었다.
그렇게 사인이 적힌 종이를 받아들자 스튜어디스는 몹시 기뻐하며 손에 있던 상자를 정우현에게 줬다.
사탕 박스였다.
“…이거, 원래 VVIP 사람들, 그러니까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 어쩌다 자녀들이랑 함께 여기에 타면 거기 아이들한테만 주는 사탕이거든.”
하면서 그녀가 박스를 열고, 커다랗고 딸기 향이 은은한 막대 사탕을 정우현의 작은 손에 쥐어 줬다.
스위스에서 생산되는 사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싸기로 유명한 사탕 브랜드였다. 하나에 무려 5만 원 정도 하는 가격이었다.
“우현이 먹어. …부끄럽네, 누나가 지금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아아,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누나!”
하고서 정우현은 아이답게 사탕을 얼른 입 안에 넣어 한 번 핥았다.
“와아!”
그러고는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말했다.
“…진짜 맛있어요, 누나! 이제껏 먹은 사탕 중 가장 맛있어요!”
“그래?”
그제야 스튜어디스는 마음이 놓인다는 듯 밝게 웃었다.
“다행이네. 필요하면 또 말해. 얼마든지 갖다 줄게. 나,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누나가 귀찮게 했지? 얼른 쉬어.”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니야. 어차피 누나, 여기 계속 있으면 안 되거든. 일도 해야 하고.”
하는데 마침 다른 승객이 스튜어디스를 찾았다.
이에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뒤로 돌아 어딘가로 사라졌다.
* * *
스튜어디스의 각별한 친절과 관심으로 정우현과 아버지는 피로감은 하나 없이 기분 좋게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잘 가, 우현아.”
비행기에서 내리려는 정우현에게 누나가 애틋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정우현은 머리를 꾸벅 숙이고 크게 답했다.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잊지 못할 거예요!”
“그래, 나야말로 잊지 못할 비행이었어…! 수백 번을 넘게 비행기에 올라탔지만 말이야.”
그러고서는 그녀가 한마디 덧붙였다.
“멀리서나마 계속 응원하며 함께할게, 우현아! 그게 누나 같은 수많은 팬의 마음이야!”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러고서 정우현은 작별했는데, 그는 처음으로 팬과 깊이 소통하며 자신의 위치에 관해 좀 더 생각하게 됐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만큼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스스로에게도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 * *
한편 LA 공항에서 나오자, 약속된 장소에 검은 리무진이 한 대 정차되어 있었다.
리무진 운전석에 앉아 있던 덩치가 큰 대머리 백인이 공항에서 동아시아인 남자 어른과 소년이 나오는 걸 보자 즉각 말했다.
“Are those people right? (저 사람들이 맞나요?)”
그러자 뒷좌석에 있던,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한 중년의 남자가 차창 너머 그들을 확인하더니 짧게 답했다.
“Yes! (그래!)”
“그럼 데려오겠습니다.”
하고서 덩치가 큰 백인이 즉각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정우현과 아버지 정기석을 향해 커다란 손을 흔들고 외쳤다.
“Mr. Jung! (미스터 정!)”
이에 정우현과 아버지 정기석, 즉 정 씨 부자가 즉각 그를 바라봤다.
“Come here, please! (이리로 오세요!)”
하면서 대머리 백인이 리무진 뒷좌석을 활짝 열었다.
정우현과 아버지는 곧장 운전사에게 인사한 뒤 차 안에 탑승했다.
그러자 쾌활한 중년의 목소리가 곧장 들려왔다.
“Hello! (안녕)!”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구나! 나는 스티븐 스틸버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씩씩하게 인사하는 정우현의 모습에, 스티븐 감독이 좀 더 그를 자세히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와우, 와우… 실제로 보니까 더 멋있고 의젓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