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정우현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영어로 미국인들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의사를 표했다.
기회가 되면 꼭 미국에 방문해 직접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앵커를 포함해 PD와 스태프들은 눈만 껌벅껌벅 감았다 떴다.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아이가, 이렇게나 영어를 잘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 했으니까.
정적이 흐르던 스튜디오도 잠시, 마침내 앵커가 입을 열었다.
“…아, 정우현 군. …영미권 국가에서 태어났거나 거주했었나 봐요? 미국이나 호주, 아니면 영국이라든가….”
“아니요!”
정우현이 밝은 표정으로 크게 답했다.
물론 다시 한국어였다.
“한국에만 있었습니다! 아직 비행기도 타 본 적 없어요!”
그랬다. 심지어 그는 전생에서도 비행기를 타 보지 못했다. 학창 시절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갈 때도, 그는 여행 비용이 부담스러워 가지 않았다.
“…아.”
하며 앵커가 계속 당황하더니, 뒤늦게 카메라를 보고 생방송임을 재차 깨닫고 급하게 말을 이었다.
“…하하하하! 대단합니다, 대단해! 우리 정우현 군! 못 하는 게 하나도 없네요!”
정우현의 모국어는 비록 한국어였지만, 모든 면에서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었다.
한 살즈음 말을 하기 시작한 이래, 김은정 박사 덕으로 온갖 도서를 맘껏 볼 수 있는 그였다. 물론 해당 도서에는 외국어 교육책도 있었다.
실상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문자로 기록되어 도서로 공부한, 세계의 언어를 모두 읽고 쓸 수 있었다.
말하고 듣는 건 따로 자료가 있어야 해서 연습하지 못한 언어도 많았지만, 영어 중국어 불어 스페인어 등 다이얼로그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는 실용 언어까지 완벽하게 터득했다. 즉 현지인과 다를 바 없었다.
한창 언어에 흥미를 붙여 몰두할 때는 고대 유적에 쓰여 있으나 아직 해독되지 못한 오래된 언어나 암호어 같은 암호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했고 성과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학습한 다른 많은 분야의 지식처럼, 그저 재미를 위해 한 공부였기에 그저 머릿속에 가지고만 있었다.
“…아, 오늘 나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우현 군!”
영어 및 다음 활동 계획 등 몇 가지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더 나눈 다음 드디어 앵커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국민의 수신료로 방영되는 공영 방송이기에, 애초 워낙 짧게 편성된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저도 감사합니다! 모두 힘든 시기지만 꿋꿋이 버티시면 금세 다시 좋은 날을 맞이하리라 확신합니다!”
정우현도 밝은 표정으로 크게 말했다.
단순 인사이긴 했지만, 알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수년 안에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IMF 관리 체제를 벗어나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되니까.
다음 날 곧장 언론에선 이 방송을 크게 기사화했다.
‘천재 국민 아역 배우, 언어 능력도 천재였다’
‘생방송 중 갑작스러운 영어에 온 국민이 놀라워해’
‘정우현 군 지능에 관한 다양한 추측’
사람들은 자연스레 아역 배우 정우현을 넘어 인간 정우현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한데 한 언론사가 용케도 그가 더 어릴 적 모 대학교 심리 센터에서 지능 검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언론사는 즉각 해당 기관에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모두 단박에 거절당했다. 기관이 검사 결과는 물론 실제 검사를 했는지 여부조차 알려 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엔 한국대학교 심 리센터의 김은정 박사가 있었다.
“누굽니까! 대체 누가 언론에 정우현 군에 관해 정보를 흘린 거죠!”
박사가 직원들을 소집해 크게 말했다.
직원들이 슬금슬금 서로 눈치를 보다가는, 한 남자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아.”
“당신이에요?”
“…아뇨, 저는 아니고요, 박사님. …하지만 누가 그랬는지 알고 있습니다.”
박사는 즉각 남 직원과 따로 면담한 뒤, 정보를 흘린 사람을 찾아내 징계 위원회에 회부해 해고하고서는 끝내 형사 처벌까지 제기할 수 있었다. 병원 및 심리 센터의 의료 사항 등 다양한 개인 정보의 누설은 직원들에게 금기시되는 사항이었다.
김은정은 일찍이 마음먹었다. 천재 아이 정우현을, 사회로부터 지켜야겠다고.
소위 영재 혹은 천재라는 아이들이 언론 및 사회에 의해 한껏 추켜올려졌다가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상은 아동 발달학을 연구하는 그녀에게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사례가 세계적으로 심심찮게 있었던 것이다.
“맛있다, 너무 맛있다!”
김은정 박사가 티브이에 나와 과자를 광고하고 있는 정우현을 보며 생각했다.
‘천재 소년 소녀만큼… 한 사람의 일생을 뉴스화해 소모해 버리기 좋은 기삿거리는 또 없지.’
그래서 그녀는 일찍이 정우현과 그의 놀라운 지적 발달 상태에 관해서 함구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여태껏 살아오고 있었다.
어머니 황희진이 아들 정우현에 관한 한국대학교 심리 센터의 연구를 공식적으로 거절했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그렇게 비밀을 준수하는 게 김은정 박사의 직업적 신념이자 의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정우현의 공식적인 지능에 관한 언론의 취재는 모두 실패했다.
정우현은 다만 대중들에게 단순한 아역 배우를 넘어 막연하게나마 천재 소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 * *
그러던 어느 날 정우현의 핸드폰으로 이상한 발신 번호가 떴다.
+1 하고 213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하지만 정우현은 번호만 보고 어디서 걸려오는 전화인 줄 알았다.
즉각 핸드폰에 입을 대고 말했다.
“Hello? (여보세요?)”
미국이었다. 미국 국가번호 1에,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의 지역 번호 213이었다. 즉 미국 LA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정우현은 미국은 물론 널리 알려진 세계 주요 국가의 지역 번호를 모조리 알고 있었다. 역시 흥미 삼아 전에 몇 번 책으로 봐 뒀던 것이다.
“Hi! (안녕!)”
중년의 쾌활한 남자 목소리였다. 그러고서 이어지는 그의 말은, 정우현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Nice to talk to you, Korean marvelous boy, Jung Woo-hyun! I’m Steven Stielberg! (통화하게 되어서 반갑다, 한국의 놀라운 소년, 정우현! 나는 스티븐 스틸버그야!)”
“…Really? (…진짜요?)”
믿기지 않았다.
스티븐 스틸버그라니. 바닷속 무시무시한 상어의 습격을 섬뜩하게 표현한 <샤크>, 백악기 시대의 각종 공룡을 현대에 스릴 넘치는 모습으로 선보인 <백악기 공원>, 미지의 생명체인 설인(雪人)과 한 소년과의 우정을 감명적으로 그린 <예티> 등을 연출한 세계 최고의 흥행 감독 스티븐 스틸버그였다.
“Yeah! (그럼!)”
하고 스티븐 스틸버그는 자신이 직접 정우현의 연락처를 알아내 통화하게 된 배경을 빠르게 설명했다.
일찍이 뉴욕 포스트의 기사를 통해 한국의 아역 배우인 정우현의 존재와 그의 미담을 알게 됐는데, 스티븐 감독은 이에 영감을 받아 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정우현이 한국의 공영 방송사에서 팬레터를 보낸 미국인들에게 완벽한 영어로 감사의 표현을 전한 것을 또한 알게 됐다.
이에 스티븐 감독은 시나리오를 마무리하고 곧장 세계적 감독 특유의 넓은 인맥으로 한국의 한 영화 관계자에게 연락을 취했고, 곧장 한국 영화를 주관하는 한국 영화 개발 위원회와 공식적으로 접촉할 수 있었다.
“Fortunately, I was able to find out quickly! (다행히, 금세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고서 정우현의 핸드폰으로 이렇게 국제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영화 개발 위원회 측은 자기들이 대신 연락을 하겠다고 했으나, 스티븐 감독 본인이 한사코 거절했단다. 직접 꼭 대화를 나누며 할 얘기가 있다고.
그러면서 그는 위원회 위원장의 연락처를 알려 주면서, 이와 관련해 의문점이 있으면 곧장 확인해 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Wow…. (와우….)”
정우현은 말을 잃었다. 전생에서 영화를 잘 몰랐던 그도,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감독 하면 단연 그의 이름 스티븐 스틸버그를 떠올릴 정도였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스티븐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Anyway the reason I called you…. (어쨌거나 너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하고서 그가 본론을 말했다.
“내 다음 차기작에 출연을 부탁하기 위해서다. 그것도 주인공으로.”
“…주인공이요?”
“그래! 이번에 내가 찍을 영화의 스토리가 대략 이렇거든. 미국의 한 고고학자가 고대 아시아 유적을 탐사하러 갔다가 다른 세계로 이동하게 되지. 그 세계는 일종의 거대한 왕국인데, 왕국의 왕은 다름 아닌 소년, 바로 너야! 정우현!”
“와우….”
연신 탄성만 내지르는 정우현이었다.
“그곳에서 고고학자는 어린 왕을 얕보고 대적하게 되지만, 금세 굴복하게 되지. 소년 왕은 특수한 능력이 있었거든! 온갖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거야! 결국 고고학자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끝내는 소년 왕과 일종의 친구 사이가 되고 만다.”
“아아.”
“한데 고고학자가 어느 날, 소년 왕에게 부탁해 함께 다시 지구로 돌아오게 되고 본격적으로 좌충우돌 모험이 시작된다! 소년 왕이 초능력을 발휘해 지구 이곳저곳을 신나게 누비며, 악당도 물리치고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 거지!”
스티븐 스틸버그다운 영화였다.
무엇보다 대중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요소를 바탕으로 끝내 권선징악과 인간애를 잊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인기 감독으로 오랫동안 롱런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때, 부디 내 영화에 출연해 주지 않겠어? 이 모든 시나리오를 오직 널 생각하며 썼어!”
“당연하죠, 감독님!”
흔쾌히 승낙하는 정우현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티끌만큼도 없었다. 배우로서 이보다 더 짜릿할 경험이 있을까. 스티븐 스틸버그라니! 그것도 자기가 주인공이라니!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이래 가장 놀라운 순간이었다.
“좋았어!”
하고서 그가 흥분하며 빠르게 말했다. 무진장 빠른 속도로 말하는 스티븐의 말은, 실상 영어를 단순히 특정 시험을 위해 공부한 평범한 한국인이었으면 못 알아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우현은 상관없었다. 빠르든 말든, 모두 한국어처럼 쏙쏙 귀에 들렸으니까.
“그럼 최대한 빨리 이곳 할리우드로 오렴! 일단 와! 경비고 뭐고 내가 다 지원해 줄 테니! 우리의 톱스타 고고학자도 너를 무척 기다리고 있어!”
톱스타라는 말에 바로 궁금증이 생겨, 정우현이 즉각 물었다.
“…Who is he? (…그 사람이 누군데요?)”
“Oh, I didn't tell you. (오, 내가 얘기를 안 했었구나.)”
하더니 스티븐 감독이 곧장 말을 이었다.
“Brad, Brad Putt. (브래드, 브래드 퍼트다.)”
“Holy…. (세상에….)”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는 정우현이었다.
금발의 브래드 퍼트.
모든 사람이 이름만 들으면 열광하는, 세계 최고의 톱스타였다.
그런 엄청난 사람이 출연하는 영화에, 무려 정우현이 주인공으로 낙점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