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17)화 (17/200)

17화

한편 정우현은 핸드폰을 갖게 됐다.

20세기 말 핸드폰이 조금씩 보급화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정작 정우현은 의도치 않게 갖게 됐는데, 무려 장필도 감독에게 선물을 받은 것이었다.

영화 감독들이 으레 그렇듯, 장 감독은 <겨울 방학> 후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엄연히 대한민국 최고 배우 반열에 오른 정우현과 함께 이따금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했는데, 어느 날 포장된 선물 상자를 가지고 그의 집에 방문한 것이다.

“…이게 뭐예요, 감독님?”

물론 정우현의 뒤에는 부모도 있었다.

“핸드폰이다.”

“아아….”

당연히 정우현은 핸드폰을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애초 단순 통화와 메시지 기능만 있었던 핸드폰이 얼마나 놀랍게 진화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으니까.

“너는 배우다. 아직 어리지만, 대한민국 대다수 사람이 알아보고, 그것도 열광하는 공인이지.”

그러면서 그는 혼자 너털웃음을 짓고 말했다.

“하하… 솔직히 나보다 너를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을 거다. 그게 감독과 배우의 차이기도 하고.”

“….”

“그러니까 이걸 갖고 스스로 전화도 하는 등 용무도 볼 줄 알아야 한다. 마냥 부모님 품에서 아이로 남을 수는 없어.”

“…알겠습니다!”

정우현 또한 물론 알고 있었다. 그가 아역 배우가 되기로 한 순간, 부모님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남아 있을 수 없음을.

또한, 실제로 영화 일을 시작한 이래 정우현네 집 전화가 줄기차게 울렸는데, 그중 열에 아홉은 그의 전화였다. 아버지가 일을 관두게 된 이래 더 그랬다.

그래서 가족들은 이제 집 전화가 울리면 으레 아들이자 배우 정우현과 관련된 전화임을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거절하지 않고 정우현이 핸드폰을 받았다.

수년 전 말을 하고 글을 읽기 시작했을 시점, 김은정 박사로부터 지원을 받게 된 이래, 사람들이 그에게 건네는 선의의 표시는 마냥 거절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재능에 걸맞은 당연한 대우였다.

동시에 그 이상의 무언가로 보답하면 될 일이었다.

* * *

어느 날 그런 정우현의 핸드폰으로 낯선 발신 번호가 떴다.

02로 시작하는 서울 시내 번호였다. 곧장 전화를 받았고, 핸드폰 너머 목소리는 자신을 KBC 보도국 PD라고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예, 우현 군!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 저희가 창사 특집으로 일주일간 매일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한 명씩 모셔서, 희망의 메시지라는 프로그램을 짧게 방영하려고 하거든요!”

“아, 예!”

“그런데 이번에 미성년 대표로 정우현 군과 함께했으면 해요! 어떠세요? 괜찮을까요?”

KBC는 대한민국 유일의 공영 방송이다. 그래서 비교적 상업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게, 공익을 위한 방송을 편성할 수 있었다. 이번 희망의 메시지라는 프로그램도 외환 위기를 극복하자는 의도에서 편성된, 순전히 공익을 추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예! 가능합니다.”

별생각 않고 답하는 정우현이었다.

CF를 몇 편 촬영한 뒤 딱히 공식적인 일정이 없던 정우현이었다. 어머니는 어디 따로 나서서 다음 작품을 알아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한 마디 했지만, 정우현은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어쩌다가 배우가, 그것도 최고의 아역 배우가 되기는 했지만,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시간에 쫓겨 가며 추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행복해지기 위한 일환으로 배우의 길을 밟게 된 것이지, 오로지 배우라는 목표를 위해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권유를 거절하고 예전처럼 집에서 책을 읽고 이따금 밖에서 운동하며 삶의 여유를 즐겼다.

그런 정우현을 보며, 아버지 또한 괜한 걱정이 들었다. 아직 어리지만 이미 너무 사회적으로 성장한 아들을 평범한 부모로서 제대로 뒷받침해 줄 수 없게 된 것 아닌가 하고.

그래서 그는 어느 날 정우현과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현아.”

“…예?”

“…너 말이야.”

“예.”

“이대로 괜찮겠니. 그러니까 보통 연예인들은 매니지먼트란 게 있어서, 소속 연예인들의 공식적인 활동에 관한 모든 걸 관리하고 지원도 해 준다고 하던데.”

“아….”

“그러니까 너도 그런 게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거지, 아빠는….”

생각이 없었다. 정우현은 소속사에 속한다면, 오히려 지금의 여유를 누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마냥 바빠질 것만 같아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괜찮아요, 아빠.”

“…그래?”

“예! 저는 지금이 좋아요! 매일처럼 여유롭게 제 시간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하는 거요!”

“하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리고 아빠.”

“…응?”

“저, 매니저 있잖아요.”

“…어디?”

“아빠요, 아빠! 아빠가 저의 영원한 매니저잖아요!”

아버지가 생각 못 했다는 듯 크게 웃었다.

“…아, 하하하하하! 그렇지, 그래! 내가 우리 아들 매니저지! 하하하!”

직장을 퇴사한 상실감은 어느 정도 씻은 지 오래된 아버지였다.

* * *

KBC 희망의 메시지 촬영이 시작됐다.

해당 방송은, 생방송이었다. 출연 제의 시 PD가 그 점을 알려 주며 괜찮겠냐고 묻자 정우현은 쾌활하게 답했다.

“당연하죠! 더 재밌을 것 같아요!”

그렇게 카메라는 돌아가고, KBC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한 나이 지긋한 중년의 앵커가 곧장 멘트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KBC 창사 특집,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늘은 그간 우리 프로그램 중 가장 어린 분이 참석해 주셨는데요. 바로 국민 아역 배우, 정우현 군입니다.”

하고서 전방의 PD 사인에 맞춰 카메라가 깜빡거리며 정우현을 단독 화면으로 비쳤다.

“안녕하십니까, 정우현입니다! 삼촌이 언제나 그리운, 정우현입니다!”

“하하하하.”

<겨울 방학> 모습에 익숙한 시청자들을 위해, 영화 속 이야기로 인사를 하는 정우현이었다.

“반갑습니다, 우현 군.”

“안녕하세요!”

“우현 군, 작년 초 영화 <겨울 방학>에서 따뜻한 모습을 선보여 국민에게 큰 힘을 줬는데요. 뿐만 아니라 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사회에 기부하고, 또한 영화제 수상 소감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아버지에게 힘을 주는 메시지를 줬잖아요?”

“예, 맞습니다!”

“하하, 솔직히 저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우현 군의 소감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거 아세요?”

하자 방송 화면이 전환됐다.

화면에는 한 신문 기사가 비쳤고, 기사에는 다름 아닌 그 날 밤 정우현이 트로피를 들고 양팔을 벌리며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기사의 제목이 영어였다.

“그날이 지나고 미국 최고의 일간지, 뉴욕 포스트에서도 우현 군의 기사를 실었었어요. ‘경제 위기의 한국, 한 아이로부터 위로받다’ '(Korea In Economic Crisis, Comforted By A Child)' 라는 제목으로요.”

“아아….”

이것은 정우현도 미처 몰랐었다. 아직 인터넷이 보급화되지 않았기에, 전생의 2022년처럼 뉴스거리가 그리 빠르게 퍼지지도 않았고, 심지어 해외 뉴스는 접하기 힘든 시대였다.

“그래서 말입니다.”

하고서 앵커는 자신의 테이블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플라스틱 상자였다. 미국에서 정우현에게 보낸 팬레터가 잔뜩 담긴 상자였다. 편지 봉투에는 다양한 필체의 영어가 쓰여 있었다.

“우리 방송사가 미국에서 온 몇 개의 편지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무작정 영사관을 통해 온 편지도 있고요, 국내 유일의 공영 방송사인 우리 보도국 앞으로 온 것도 있고, 심지어 청와대 앞으로 온 것도 있습니다, 하하. 하여간 어렵게 모았습니다.”

“와아….”

정우현이 놀라고 감동받는 장면을 카메라가 놓치지 않고 크게 포착했다.

이는 PD의 기획 의도였다. 무려 미국으로부터 팬레터가 왔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 주지 않고, 생방송에서 정우현에게 보여 줌으로써 그의 감동 어린 장면을 전 국민에게 방영하고 싶었던 것이다.

국민 아역 배우의 놀라움과 감동. 이보다 더 시청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와닿는 희망의 메시지가 있을까 생각했던 것이고, 아니나 다를까 정확히 적중했다.

애초 남녀노소 팬덤을 가지고 있는 정우현이 출연한다기에 원래도 시청률이 높았지만, 이 순간 더 빠르게 시청률이 올라가고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해외에서까지 저를 이렇게….”

하고서 말을 잇지 못하는 정우현이었다.

국적과 인종을 불문하고 한 아이의 순수한 선의를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날 뉴욕 포스트에서 보도된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 아역 배우의 기사로, 미국인들 중 일부는 자연스레 정우현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심지어 영화를 좋아하는 어떤 이들은, 정우현이 열연해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상을 받았다는 즉 영화 겨울 방학을 어떻게든 찾아보고 그의 팬이 되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즉 현시대 영화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벌써부터 정우현의 팬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어 미국에 있는 팬들에게도, 정우현 군이 몇 마디 고마움을 표해 주면 우리 방송사가 잘 통역해서….”

하는데 정우현이 불쑥 말했다.

“Thanks American for writing me letters. (저에게 편지를 써 주신 미국인들에게 감사합니다.)”

영어였다. 정우현의 입에서 유창한 영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I am really happy and surprised that my heart has been delivered to the United States. (미국에까지 제 마음이 전달됐다니, 참으로 기쁘고 놀랍습니다.)”

심지어 원어민과 다를 바 없는 정확한 표준 발음이었다. 누군가가 화면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었다면 미국 공영 방송을 듣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

시청률이 더 치솟는 가운데, 앵커와 PD를 포함한 모든 스태프는 정우현을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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