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새로운 집은 무척이나 넓고 좋았다.
발코니의 커다란 통유리를 통해 푸르른 한강이 보였고, 밤이면 반짝거리는 강변 및 도시의 야경에 황홀해질 지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강남 아파트에서 살게 됐어… 그것도 한강 뷰라니….’
정우현도 모처럼 감상에 젖었다. 그러면서 새 삶을 살게 된 이래 스스로가 만족스러웠고, 행복해하는 가족들을 보며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삶은 이제 시작이었기에, 더 잘 해내리라 다짐했다.
역시 말없이 감상에 젖어 푸른 한강을 보고 있는 부모에게 정우현이 다시 통장을 펼쳐 보였다.
“엄마.”
“으응?”
“5천만 원이 남았어요.”
“…하하, 그러게.”
그러고서 어머니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한강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우현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우현이가 열심히 해서 번 돈이니까. 엄마는 욕심 없어.”
정말이었다. 솔직히 티브이만 틀면 가장이 실직했다, 가족이 붕괴됐다, 심지어 누군가는 자살했다는 등 안 좋은 소식만 들리는데 자기 가족은 이렇게나 잘살고 있다는 것이 조금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어머니였다.
하지만 이내 무거운 마음을 털어놓고 그저 감사하게 생각하자고 마음먹은 그녀에게는 이 정도만 해도 더 이상 욕심이 없었다.
아들의 통장에 5천만 원이 남아 있든, 아니 5억, 50억이 남아 있든 별다른 감흥이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지금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요?”
정우현은 이번엔 아버지의 동의를 구하는 듯 그를 보고 말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 돈은 정우현의 돈이었기에 그의 뜻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 부모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혼자 독단적으로 돈을, 그것도 수천만 원이나 되는 거금을 마구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우현아,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아들은 그래도 되지.”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또한 아들이 허튼 데다 돈을 쓰지 않을 것을 알고 또한 믿고 있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 저 그거 살래요.”
“뭐?”
“주식이요.”
“…주식?”
부모가 거의 동시에 한강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려 아들을 바라봤다.
뭔지는 대략 알고 있지만 대체 그런 게 실제 존재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들에게 주식이란 마치 유니콘이나 용처럼 상상 속의 그 무엇과도 같았다.
“예. 에스전자라고요. 주로 반도체 만드는 전자 회사인데요. 이번에 엄청나게 폭락했더라고요. 그걸 사야겠어요.”
전생에서, 정우현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은 에스전자의 제품이었다.
비록 그 당시에도 주식을 몰랐던 정우현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었으니, 지금은 국내에서만 두각을 내는 에스전자가 훗날 국내는 물론 세계 제1위의 스마트폰 생산 업체가 된다는 것이었다.
즉 수년 후 세계적 기업으로 당당하게 발돋움하는 회사가 현재 연일 주가 폭락을 면치 못하고 있는 에스전자였다.
“…으응, 그래.”
떨떠름했지만, 애초 아들보고 알아서 하라고 한 돈이기에 부모로서는 딱히 반대를 할 수도 없었다.
* * *
아버지와 함께 증권사에 갔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직접 가서 증권을 사야만 했다.
정우현은 즉각 에스전자의 주가를 확인했다. 35,000원이었다. 폭락하고 폭락한 주가였다.
그는 아버지를 시켜 즉각 에스전자의 주식을 정확히 1,000주, 즉 3,500만 원어치를 샀다.
증권사 직원은 강남의 공인 중개사처럼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기분 좋게 할 일을 다 했다. 그들로서는 수수료도 챙기고 나쁠 건 없으니까.
그렇게 증권사 빌딩에서 나온 아버지는 에스전자의 종이 증권을 보며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정우현에게 물었다.
“…우현아, 이게 정말 3천 5백만 원의 가치가 있다는 거야?”
“예! 당연하죠!”
“…그래? 난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네.”
걱정이었다. 아버지는 회사를 다닐 때 주위에서 주식을 하면 패가망신한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주가가 곤두박질칠 때 주식을 사자고 하는 아들이 선뜻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이거 원금 보장은 되는 거지? 아니면 나중에라도 환불된다거나….”
아버지가 계속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하하하! 아빠! 원금뿐이겠어요? 나중에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예! 원래 주식은 일정 금액이 보장되지도 않고 환불은 더더욱 안 되지만, 에스전자만큼은 마음 놓으셔도 돼요!”
이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정우현을 믿기로 한 것이다.
정우현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에스전자의 주가는 역시 2022년을 기준으로 350만 원에 달했다. 물론 액면 분할 즉 하나의 주식을 여러 개로 나눠 주당 10만 원 안쪽에서 거래가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1998년 정우현이 산 주가 대비 순수한 수익률로 따지면 무려 백 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즉 정우현은 오늘 3,500만 원어치 매수한 주식을 2022년 35억 원에 되팔 수 있었다.
‘강남에 아파트랑, 현시점 우리나라 최고의 성장주이자 장차 최고의 우량주가 될 에스전자 주식까지 모두 헐값에 잔뜩 샀다. 이 정도면 지금 가지고 있는 자본금은 잘 굴린 것 같고, 남은 돈은 음….’
하면서 정우현이 통장을 봤다. 1,500만 원을 조금 넘기는 액수가 남아 있었다.
“KBC 뉴스입니다.”
때마침 거실에선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남자 앵커가 한껏 숙연한 얼굴로 멘트를 했다.
“이 엄청난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고자 앞장서는 사람들은 정치인도, 기업인도 아니었습니다. 다름 아닌 시청자 여러분들, 바로 일반 국민입니다. 오늘도 각지에서 금 모으기 운동이 뜨거운 가운데 우리 KBC와 건설은행이 공동으로 주관해 집계한 금이 오늘부로 드디어 100톤, 100톤을 돌파했습니다...”
정우현이 조용히 화면을 주시했다.
“이와 관련해 나랏빚을 하루라도 빨리 갚는 데 동참하실 분들은 아래 번호로 문의 주시면 저희 방송사가 상세히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뉴스를 보고서 정우현은 어머니를 시켜 방송사에 전화를 걸었다.
자신부터 돌보며 행복해지고 그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풀든 말든 알아서 해라.
염라대왕이 두 번째 삶이라는, 표현할 수 없이 귀한 기회를 주면서 정우현에게 한 말이다.
그리고 살게 된 새 삶에선 천재 이상의 존재가 되어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유명 배우가 됐고, 자산도 전생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돌아가셨어야 할 아버지를 살렸다. 원래는 지금 세상에 계시지 않았던 아버지가 정우현의 옆에 건강한 모습으로 있었다.
이는 실상 어떤 천문학적인 액수로도, 즉 돈으로는 절대 환산할 수 없는 가치였다.
'이 정도면 좀 베풀어도 되지 않을까?'
그가 생각했다. 물론 정우현의 삶은 이제 시작이다. 하지만 그간의 놀라운 변화와 넉넉해진 재산에, 조금은 다른 사람을 도와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아파트와 주식을 살 수 있었던 건 배우가 되어 찍은 첫 작품이 흥행해 자본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야.’
그러고서 그가 영화를 보며 열광하고 자신을 보며 귀엽다고 했던 관객들과 팬을 떠올렸다.
‘…즉 나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지금과 같은 자산은 갖지 못했겠지. 더군다나 때마침 이렇게 폭락한 시기에.’
이런 생각을 끝으로 그는 자신의 돈을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1,000만 원. 1,000만 원을 정우현은 방송사를 통해 쾌척했다.
2022년을 기준으로 하면 6살 된 아이가 영화 한 편에 출연했다고 약 3,000만 원을 사회에 기부한 것과 다름없는 놀라운 일이다.
“우리 아들 좋은 일 했네.”
어머니 황희진이 한껏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너무 복이 많다. 우현이 같이 완벽한 아이를 아들로 둬서 말이야.”
“하하하, 고맙습니다!”
역시 잘한 것 같았다. 기부한 것만으로 마음이 푸근했는데 어머니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정우현 또한 더 만족스러웠다.
한데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정우현의 기부는 곧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KBC를 중심으로 각종 방송사 및 신문 잡지사 등 언론들이 하나같이 그의 기부 소식을 크게 기사화한 것이다.
‘천만 아역 배우는 기부 천사.’
‘가슴 따뜻한 연기는 진심이었다.’
‘영화의 감동, 현실로 이어져.’
이에 사람들의 극찬이 쏟아졌고, 어느 날 결국 정우현의 어머니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예, 거기 아역 배우 정우현 군 댁이죠?”
“예, 그런데요?”
“아, 안녕하세요, 일단 정우현 군이 촬영한 영화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연락처를 알게 되어 전화 드리는 것이니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하고 말을 하는 남자는 자신의 신분을 정중하게 밝혔다. 대형 식품 회사 홍보팀장이었다.
“예, 근데 무슨 일이시죠?”
“이번에 저희 회사 식품을 티브이를 통해 프로모션 하려 하는데요, 귀하의 자제분인 정우현 군을 모델로 발탁하려고 합니다.”
“…프로모션이요?”
“예, 보통 CF라고 하죠.”
“아아!”
어머니는 놀랐다. 물론 아들이 출연한 영화가 크게 히트를 쳤지만, 영화가 아닌 티브이 쪽에서 출연 제의가 온 건 처음이라 느낌이 또 달랐다.
거기에 CF라니. CF에는 보통 한눈에 봐도 친숙하고 유명한 연예인들이 등장하지 않던가.
“이번에 정우현 군이 좋은 일을 해서 말입니다. 이미지도 맑고, 영화로 지명도도 쌓았으니 부디 우리 회사의 모델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아들을 두고 CF 출연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우현아!”
곧장 어머니가 아들을 불렀다. 그러고는 자초지종을 빠르게 설명했다.
“좋아요!”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정우현은 당연히 좋다고 했고, 계약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 * *
이윽고 촬영 날이 되었다.
정우현은 아버지와 둘이 촬영장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집에서 동생과 함께 있었다.
“우현아, 잘할 수 있지?”
“그럼요!”
2시간짜리 영화도, 그것도 인간의 깊고 복합적인 감정을 보이는 연기도 완벽하게 해 냈는데, 이깟 30초도 안 되는 광고 영상 따위 뭐가 어려울까 싶었다.
해 보니까 역시나, 쉬웠다.
모든 무대와 조명이 미리 갖춰져 있었고, 정우현이 등장하자마자 젊은 여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즉각 달라붙었다.
“어머! 너무 귀엽다아!”
“아아, 실제로 보니 더 잘생겼네!”
“안녕! 누나 너 왕 팬이야!”
그러고서 그들은 정우현을 순식간에 메이크업했다.
그러자 이내 푸근한 인상의 촬영 감독이 오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우현이구나.”
“예! 안녕하세요!”
“영화, 너무 재밌게 잘 봤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응, 오늘은 뭐 하러 온 줄 알지?”
“예! 광고 영상 촬영이잖아요! 과자 광고!”
“그래, 다른 거 없고, 그냥 아주아주 맛있게 먹고, 대사 한마디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촬영이 시작됐다. 수십 명의 사람이 정우현만 보는 가운데 카메라도 일시에 여러 대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이라면 겁을 먹을 만했지만, 정우현은 달랐다. 이미 장편 상업 영화의 주인공으로 열연하며, 수많은 사람과 카메라에 둘러싸여 본 경험이 있으니까.
정우현이 과자를 하나 집어 먹는다. 정말 이보다 더 맛있는 과자는 먹어 본 적 없다는 표정으로, 무진장 맛있게 먹는다. 그러고선 드디어 대사를 한다.
“맛있다! 너무 맛있다!”
90년대 광고 문안답게 낯간지러웠지만, 정우현이 하니 또 자연스럽고 정감이 갔다.
그러자 촬영 감독이 즉각 외쳤다.
“컷, 오케이!”
오케이였다. 단 한 번의 촬영으로 오케이 컷이 나온 것이다.
광고 스태프들은 전부 놀랐지만, 정우현은 익숙했다. <겨울 방학> 촬영 당시에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그때, 촬영이 빨리빨리 진행되어 의도치 않게 제작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기도 했다.
“…와, 너 진짜 잘하는구나.”
촬영 감독이 감탄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으음, 그래도 두 번만 더 해보자. 여러 표정을 섞어서 쓰면 더 좋으니까.”
“네!”
그렇게 두 번 더 카메라가 돌아갔고, 그 모두 즉각 오케이 컷이 됐다.
이로써 촬영이 시작한 지 10분 만에 끝이 나버렸다.
“…하하하, 내 오십 평생 살다 살다 이런 광고 촬영은 처음이네.”
촬영 감독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곧장, 마치 보물을 바라보는 듯 경탄의 눈빛으로 정우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고생했다, 우현아. 너 참 대단하다!”
“감사합니다! 감독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순식간에 광고 한 편을 찍었고, 이 모두를 아버지 정기석이 세트장 한구석에서 묵묵히 보고 있었다.
물론 그의 가슴은, 자랑스러운 아들의 모습에 또 한 번 두근거리고만 있었다.
* * *
광고 촬영을 마친 날, 바로 정우현의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
1,500만 원이었다.
1,000만 원 기부라는 선한 행위가 의도치 않게 즉각 1,500만 원짜리 광고 촬영으로 돌아왔다.
그러고서 정우현은 광고를 세 편이나 더 찍었다. 역시 모두 순식간에 성공적으로 촬영할 수 있었다.
‘나부터 행복해지니까….’
정우현이 다시 통장에 쌓이고 있는 돈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모든 게 순조롭잖아.’
그의 표정이 한껏 밝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