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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14)화 (14/200)

14화

대한민국이 IMF 즉 국제 통화 기금의 관리 체제에 들어선 가운데, 정우현 가족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아버지 정기석이 퇴사한 것이다.

실은 아들 정우현이 아버지에게 자진 퇴사를 설득한 끝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버지는 유선 전화기 제조 회사의 사원이었다. 곧 다가올 핸드폰의 보급화 이후 빠르게 사라지는 유선 전화기 말이다.

다른 전자 전기 제품을 함께 생산하는 것도 아닌, 오로지 유선 전화기로만 매출을 올리는 업체라 체질 변화를 꾀하지 않는 한 장차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지어 때는 외환 위기. 잘나가던 대기업도 망하는 등 대한민국 기업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당시 30대 대기업 중 무려 17곳이나 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정도였다.

그래서 정우현은 아버지가 이번 경제 위기에도 어떻게든 직장에서 버텨 봤자, 사양 업종 특성상 금방 불안정해지리라 생각했다. 미래가 없는 것이다.

‘전생에서 원치 않는 등산을 강요해, 젊었던 아버지가 목숨을 잃게 되는 데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회사이기도 하다.'’

정우현이 지난 삶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우리 집은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 얼마 하지도 않는 차도 팔아 버리는 등 고난의 나날이 시작되었지.’

그런 그가 아버지의 회사를 좋은 시선으로 볼 수는 없었다.

결국 정우현은 이래저래 아버지가 그런 회사로부터 해고당하느니, 적게나마 퇴직금을 챙기며 자진 퇴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에 곧장 아버지에게 퇴사를 권유했고, 처음엔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하던 아버지도 끝내 그의 뜻을 따랐다.

천재적인 아들의 능력을 믿는 데다, 자신의 연봉보다 수 배는 더한 금액을 단번에 벌어들이는 정우현에게 결국 설득당한 것이다.

“잘하셨어요, 아빠. 어차피 다른 일을 하셨어야 해요.”

정우현이 퇴사 후 조금은 맥이 빠진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를 위로하며 말했다.

“…그래도 좀, 기분이 그러네… 쥐꼬리만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월급도 제때 나오던 회사였는데… 막상 집에만 있으려니 또 그렇고.”

“아녜요, 금방 상황이 달라질 거예요.”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정우현을 불렀다.

“…예, 아빠?”

“…네 말이 맞았다.”

“…뭐가요?”

“아빠가 다니던 회사, 심상치 않아. 거기 버티고 있던 동료한테 어제 전화가 왔는데, 한두 달 월급이 밀리더니 결국 그제 이만 나가라고 했대. 해고당한 거지.”

“…아.”

“응, 그렇게 잘린 사람들이 꽤 있나 봐. 심지어 회사가 조만간 아예 망해 버릴 거라는 소문도 돈다고 하더라.”

“그렇군요.”

그러면서 아버지가 정우현의 손을 굳게 잡았다. 평소에 함께 놀 때처럼 다정하게 느껴지는 손과 또 다른 감촉이었다. 다소 절박함이 느껴졌달까.

“고맙다, 우현아.”

“….”

“네 덕분에 아빠는 그런 수모를 겪지 않게 됐구나. 비록 지금 집에 있는 건 똑같지만, 내 발로 자진해서 회사에 나오는 것과 누가 강제로 가라고 해서 회사에 나오는 건 차이가 꽤 크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버지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한 가정을 지키고 먹여 살리던 가장이 한순간 여지없이 무너지던 시기, 그 시기가 바로 외환 위기의 대한민국이었으니까.

띠리리링!

그때 집 전화의 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기 옆에 있던 아버지가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더니 사뭇 가라앉았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예? 백호 영화제요?”

백호 영화제는 국내 최고의 영화제다.

국내 영화제 중 역사도 가장 오래되고, 권위도 가장 높은 영화제가 바로 백호 영화제다. 한 해 국내에서 제작해 개봉한 모든 영화를 대상으로 우열을 가리며 상을 주는 영화인들의 최대 축제이기도 하다.

처음 아버지는 전화를 받고, 단순히 아들 정우현에게 참석을 요청하는 줄만 알았다.

실상 올 한해 최고로 흥행한 영화의 주인공이니만큼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한데 아니었다.

무려 수상 후보에 정우현의 이름 석 자가 당당히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우현아!”

아버지가 전화를 끊고 흥분한 표정으로 크게 말했다.

“네?”

“네가 수상 후보에 올랐대!”

아까 전 수심에 젖은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정말요?”

“그래! 그것도 두 부문이나!”

“와아아! 뭐요?”

“신인상이랑 남우주연상!”

하고서는 껄껄 웃는 아버지였다.

“하하하하!”

이에 정우현도 따라 웃었다.

기뻤다, 물론 무척이나 기뻤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아버지가 다시 웃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정우현이었다.

* * *

“함께 잘 다녀오겠습니다.”

장필도 감독이 말했다.

시상식 날 직접 차를 끌고 정우현의 집에 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어머니가 말했다.

시사회와 달리 시상식에는, 가족이 함께할 수 없다. 배우 및 감독 등 영화 관계자들과 일반 방청객의 좌석이 분리되어 있기에, 같이 간다고 해도 큰 의미는 없었다.

한데 마침 장필도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와 정우현을 데려갈 것을 청했고, 부모들은 흔쾌히 승낙한 것이다.

“우현아, 아빠가 집에서 열심히 응원할게!”

모처럼 어린이 정장을 깔끔하게 맞춰 입은 정우현에게 아버지가 크게 말했다.

미용실에서 머리도 하고 옷도 멋지게 입으니, 자신의 아들이지만 그렇게 눈이 부실 수 없었다.

“파이팅이다, 파이팅!”

“네, 아빠!”

* * *

시상식이 시작됐다.

정우현은 장필도 감독과 김도진 사이에 앉아 있었다.

“…긴장되니, 우현아?”

김도진이 정우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니요, 삼촌!”

“하하, 그래, 넌 도무지 긴장이란 걸 하지 않는 아이지.”

하는데 반대쪽에서 장필도가 말했다.

“우현아.”

“예?”

“넌, 상을 받을 거다.”

그러고서 예의 낮은 음성으로 힘주어 한 번 더 강조했다.

“무조건 받을 거다.”

그러는 와중 몇 번의 수상을 마치더니 드디어 신인상 부문이 시작됐다.

무대 뒤쪽 커다란 스크린엔 올 한해 개봉한 다양한 영화에 등장해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신인 배우들이 한 명씩 비쳤다.

“아아, 제가 너무 좋아하는 배우인데요.”

이윽고 스크린에 <겨울 방학> 속 정우현의 모습이 나타나는 가운데 여성 사회자가 말을 이었다.

“바로 정우현 군입니다. 우현 군 역시 올해 신인상 후보입니다.”

라는 말이 마치기가 무섭게 배우들이 앉은 좌석 뒤편 방청객에서 무지막지한 소리가 들렸다.

“와아아아아!”

남녀노소 불문한 정우현의 팬들이 방청객에 자리를 잡고 그의 수상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남성 사회자가 말을 했다.

“이야, 어떤 성인 배우도 갖지 못한 팬덤입니다. 이렇게나 팬층이 다양하다니요!”

“하하하, 그러게요!”

하고서는 곧장 발표의 시간이 다가왔다.

“…제33회 백호 영화제 신인상.”

두구두구두구….

무대 한편에서 긴장을 자아내는 효과음이 들리는 가운데 수상자가 발표됐다.

“…<겨울 방학>의 정우현!”

“와아아아아아!”

뒤편에 있던 팬들이 또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즉각 스크린에 현재 객석에 앉아 있는 정우현의 모습이 비치는 가운데, 그가 벌떡 일어났다.

왼쪽에 있던 김도진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정우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오른쪽에 있던 장필도는 따라 일어나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장하다, 우현아.”

“…고맙습니다!”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정우현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의젓한 모습으로 무대에 섰으나, 사람들은 또 그 모습이 귀여워서 연신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고서 그는 막힘 없이 소감을 밝혔다.

“감사합니다! 신인상은 평생 딱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을 저에게 주셨다니, 저는 참으로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하면서 그가 트로피를 들고 있는 손을 뻗어 객석에 앉아 있는 장필도와 김도진을 가리켰다.

“우리, 장필도 감독님과 도진이 삼촌! 감사합니다! 이분들이 아니었다면, <겨울 방학>이란 좋은 영화는 지금 없었을 테고 저는 여기 서 있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고서 머리를 꾸벅 숙였다.

미리 준비해 온 교과서적인 수상 소감이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 있는, 더 많은 말을 늘어놓고 싶기도 했지만, 공식 석상이니만큼 배우로서 그저 진심 어린 예의를 다할 뿐이었다.

소감을 마치자,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정우현은 트로피와 꽃다발을 들고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장필도와 김도진이 한껏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정우현은 얼마 안 있어 또 나가야 했다.

그가,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된 그가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한 것이다.

솔직히 정우현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해도, 기성 영화인들로 가득한 영화제에서 이제 막 데뷔를 한 다섯 살리 아이에게 남자 최고의 연기상인 남우주연상까지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인상 수상에 만족하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뿌듯했었다.

심지어 그와 함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사람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톱스타이거나 해외 영화제에서까지 연기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 연기파 배우들이었다.

한마디로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었다.

그래서 정우현은 주연상까지는 생각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또다시 그의 이름이 불렸다.

“그거 아십니까?”

정우현의 이름을 부른 직후 남자 사회자가 말했다.

“백호 영화제가 시작된 이래 아까 정우현 군이 신인상을 받음으로써 최연소 신인상 수상자가 됐는데, 이제 새로운 기록이 하나 더 생겼네요. 무려 최연소 주연상이라는!”

정우현이 호명되자 사람들이 모두 일어섰다. 이제껏 그 누가 수상해도 한 번도 일어서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고서는 손뼉을 쳤다. 이는 정우현 양옆에 있던 장필도와 김도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우현은 조금 얼떨떨해서 아까 전 무대로 곧장 나아간 것과 달리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는데, 솔직히 꿈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정우현 군은 어린 나이임에도 대한민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백발의 영화제 위원장이 무대 앞으로 나오고 있는 정우현을 흐뭇한 미소를 짓고 바라보며 말했다.

“천재 배우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정우현 군을 두고 생겨난 말이 아닐까 합니다. 앞으로가 제일 기대되는 올 한 해 최고의 배우, 정우현. 그런 의미에서 우리 영화제는 남우주연상을 정우현 군에게 수상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가 정우현에게 커다란 트로피와 꽃다발을 줬다. 신인상과는 또 다르게 생긴 트로피였다.

정우현이 트로피를 받고 드디어 무대에 서 앞을 바라봤다.

밝았다, 무진장 밝았다.

아까 신인상을 받을 때와는 달리 객석 위 조명이 한없이 밝았으며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일어나 있었다.

그러면서 정우현은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이래, 처음으로 남들 앞에서 눈물을 터뜨릴 수밖에 없게 됐는데, 불현듯 집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각난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감동도 컸다. 새하얀 조명에 둘러싸여 그가 드디어 아이처럼 울며, 준비하지 않았던, 그러나 마음속 깊숙한 곳에 항상 있었던 그런 말들을 꺼냈다.

“…고맙습니다! 너무 고마워요! 저를 낳아 주시고, 그리고 이렇게 연기의 길을 걷게 해 주신 엄마! 엄마가 아니었으면 저는 지금도 좁은 제 방에서 책만 읽고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아빠!”

아버지를 생각하자 마음이 더 울컥했다. 최근 집에서 무기력하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사랑합니다! 누가 뭐래도 아빠는 저의 영웅이에요! 그러니까 힘내세요!”

하고는 그가 뒤늦게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재차 깨닫고 사람들을 향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묵묵하게 온 힘을 다해 가정에 힘쓰시는 대한민국의 모든 아빠와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 모습을 또 눈물을 훌쩍이며 티브이를 통해 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집에 있는 아버지 정기석이었다.

아니, 비단 정기석뿐만은 아니었다. 정우현의 수상을 지켜보던 전국의 아버지들이, 특히나 생활고에 힘겨워하는 모든 아버지가 묵직한 감동을 느끼며 말없이 브라운관을 바라봤다.

그들 아버지들은 오래도록 그날의 어린 정우현을 기억했다.

* * *

한편 이외에도 영화 <겨울 방학>은 최우수 작품상을 받음으로써, 올해 단순히 흥행 성적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도 최고의 영화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마지막으로 장필도 감독이 무대에 나가 트로피를 받고는 짧게 말했다.

“이미 이 영화제의 주인공이 두 번이나 이 무대를 밟고 말을 마쳤기에, 저로서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습니다. 제게 축하를 해 주고 싶다면, 그 모든 걸 저기 앉아 있는 정우현 군에게 해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예기치 못한 장필도의 소감에 정우현이 다시 한번 놀라면서도 끝내 밝게 미소 짓는 가운데, 카메라가 객석에 앉아 있는 정우현을 비쳤다.

온 국민이 그런 정우현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그날 밤을 모처럼 따뜻하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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