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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13)화 (13/200)

13화

1억, 정확히 하면 1억 1,200만 원을 받았다.

그게 이번 영화로 정우현이 얻은 수입이었다.

출연료 및 흥행에 따른 부가 수입 즉 러닝 개런티까지 포함된 액수였다.

물론 정우현의 전생, 즉 2022년 기준으로 보면 흥행 수입치고 조금 적어 보일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몸담고 있는 시대는 1997년이다. 즉 1억 원은 2022년의 화폐 기준으로 하면 대략 3억 원이 넘는 금액이다.

더군다나 정우현이 아역 배우임을 감안해야 했다. 아역은 보통 성인 배우보다 몸값이 떨어져 벌이가 더 적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어쨌든 그는 아무 커리어도 없는 신인 배우이기도 했다. 신인 배우는 러닝 개런티 즉 흥행에 따른 추가 수입도 없는 게 일반적이다. 작품이 얼마나 흥하든 간에 그저 계약한 출연료만 받는 것이다.

하지만 장필도 감독이 이번 영화를 만들며 뒤늦게 제작사를 찾아가 출연 배우와 관련해 계약 사항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아역 배우 정우현에게도 러닝 캐런티를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인 배우에게, 그것도 아역에게 러닝 개런티라니요. 충무로엔 그런 선례가 없는 거로 아는데요?”

배가 볼록 나온 제작 책임자가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반문했다.

그러자 장 감독이 예의 낮은 음성으로 흔들림 없이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이 영화를 더 이상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감독님?”

“말 그대롭니다. 예, 정우현은 신인이고, 그것도 아역 배우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모든 면에서 불가능했을 영화입니다. 그러니 꼭 제 뜻대로 해 주셔야 합니다.”

“…으음, 장 감독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논의는 해 보겠는데…. 내 말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얘기입니다….”

“예, 필요 있습니다. 영화를 못 보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조만간 누구보다 생생하게 느끼실 겁니다.”

장필도의 말은 그대로 실현되어, 현재 배 나온 책임자는 매일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겨울 방학>으로 투자 대비 순수익만 족히 3,000%를 훌쩍 넘은 것이다.

겨울 방학은 애초 제작비가 많이 들지 않았었다. 코미디 및 드라마 장르로서 스케일 큰 씬이 거의 없었던 데다 출연료 및 개런티가 높은, 기존의 스타 배우는 또 김도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관객은 1,000만 명 이상을 끌어모았으니, 그야말로 대박 중 대박이었다.

제작사 및 투자자 등이 벌어들인 돈에 비하면 정우현에게 할당된 러닝 개런티는 그야말로 새 발의 피에 불과했지만, 애초 받지도 못할 수 있는 돈이었다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장 감독의 도움으로 정우현은 1억 원 넘게 챙길 수 있었다.

* * *

정우현이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고 부모의 소망대로 슬슬 이사를 가야겠다 생각을 하다가는, 한순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언제쯤 시기가 좋을까 달력을 보다가 1997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지, 1997년… 이건… 우리나라에 IMF가 찾아온 해잖아….’

솔직히 하자면 그는 전생에선 IMF가 정확히 뭔지도 몰랐다. 다만 그 당시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뉴스에서 연일 경제 위기라느니 주가가 폭락했다느니 실업이 급증했다느니 이런 소리뿐이었다.

당시 정우현네 가정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맨몸으로 식당에 나가 허드렛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고 살았다.

즉 애초 가난했기에 그 이상의 극적인 변화를 또 겪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다니던 식당이 자주 바뀌고 때론 집에서 쉬는 날이 많아지기도 했다.

식당 주인들이 손님이 없다며, 더 이상 올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다.

또 갑자기 전세금을 빼 달라는 집주인의 채근으로 몇 번 원치 않게 쫓겨나듯 이사를 가야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집이 더 작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이 순간 중요한 건 지난 아픈 기억이 아니었다.

당시 누군가는 웃었다는 게 중요했다. 즉 IMF 때 대다수는 자산을 잃었지만, 소수는 자산을 불렸다.

‘…으음.’

아쉽게도 정우현은 전생에서 경제나 재테크에 관심이 없었다. 모은 돈을 홀랑 남에게 줘 버리기까지 한 그였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먼저 스스로,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한 삶.

결국, IMF 때 돈 버는 방법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생각해 내면 된다.

그간 학습한 방대한 지식을 통해.

‘냉정하고 단순하게 생각하자, 돈의 흐름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면서 그가 두꺼운 경제 서적을 훑어봤다. 이미 그가 여러 번 반복해서 독파한 책이었다.

‘원인이야 어쨌든 외국에 갚을 돈이 부족해서 생긴 경제 위기다. 즉 외환(外換) 위기다. 이는 곧 빚을 갚지 못한 국가의 신용도를 떨어트리고, 국내 화폐 가치의 하락을 야기한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붙은 건 돈이든 뭐든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탁!

그러고서 그가 순간 두꺼운 서적을 덮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

곧장 그가 부모님을 크게 부르며 거실로 나갔다.

“으응?”

이사를 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외치던 아들이 무심결에 달력을 보고서는 한순간 심각한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부모를 찾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했다.

“집은 조금 이따 사요!”

“…왜?”

어머니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래, 여보. 이사가 무슨 애들 소꿉놀이도 아니고 그렇게 갑자기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는 것 같아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아니요! 좀만 더 있으면 더 좋은 집을 더 싸게 살 수 있어요!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의외의 말에, 아버지가 더 의아해하고서는 되물었다.

“…그게 뭔데?”

“달러! 당장 제 통장에 있는 돈을 몽땅 달러로 바꿔야 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니마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말 그대로예요! 세계 기축 통화인 미국 달러를 사야 해요! 조만간 우리나라 화폐 가치가 폭락할 거거든요! 이 얘기는 반대로 달러 가치는 폭등할 거라는 얘기죠!”

“…으음.”

부모로서는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다. 환율이 정해지는 방식은 물론, 1997년 초 현재 대한민국 땅에 드리운 경제적 먹구름의 전조를, 역시 당연히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우현은 마른 침을 꼴깍 한번 삼키고, 마치 경제학 선생님처럼 현재 한국이 처한 경제적 현실과 그에 따라 앞으로 벌어질 놀라운 일들과 그 전망을 최대한 쉽게 설명했다.

그러자 부모들은 무언가 알 것 같다는 듯하면서도 역시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지금 통장에 있는 돈을 모두 달러로 바꿔야 한다는 거야?”

“예! 제가 이번에 번 돈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가 따로 갖고 있는 현금은 모두 달러로 바꾸는 게 좋아요!”

아들의 확신에 가득 찬 말에 부모가 서로의 눈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러고는 둘이서 얘기를 나누다가는 끝내 정우현의 말을 따라 보기로 했다.

아들은 천재다. 이제껏 아들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건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잘되기만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옳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 부모가 끝내 내린 결론이었다.

* * *

집 밖에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집에서 나오자 몇몇 기자는 물론 팬들이 작정하고 몰려들었지만 끝내 무사히 용무를 보러 갈 수 있었다.

처음엔 아버지가 팬들을 가로막았지만, 오히려 정우현이 앞장서서 나아가 예의 바르게 길을 비켜 달라고 한 것이다.

팬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실제로 정우현을 봤다는 사실에 만족하고선 천천히 길을 비켜줬다. 물론 그러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유명인 가족 하기 힘드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아버지가 그들 팬 사이로 차를 운행하며 말했다.

“본인인 우현이는 어떻겠어.”

어머니가 아버지더러 잠자코 있으라는 투로 말했다.

“와아아.”

동생 정다현은 몰려든 사람들이 신기해서 창밖을 보며 연신 무어라고 외쳤다.

‘팬들의 마음은 고맙지만, 그래도 나와 우리 가족이 자유롭게 안정감을 찾는 게 더 중요해.’

정작 이 순간, 정우현의 마음은 다른 데 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은행에서 계획한 일을 잘 처리해야 한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 은행에 도착했다.

부모는 정우현의 말대로 그와 함께 원/달러 환전을 하기 위해 창구에 갔다.

“…이 금액을 모두 달러로 바꾸신다고요?”

창구에 있는 젊은 여직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1997년, 동네 외환 은행에 법인도 아니고 평범해 보이는 일반 개인이 1억 원이 넘는 금액을 몽땅 환전해 달라고 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

“…어디 미국에서 사업하시거나 이민 준비하시나 봐요?”

“아, 그런 건 아닙니다.”

하고 아버지 정기석이 짧게 답했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그럼 달러 예금으로 하겠습니다.”

“…아니요!”

순간 누군가가 크게 말했다.

젊은 여직원은 분명 전방에서 아니라고 말하는 낭랑한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렸다.

“전부 현금, 달러 현금으로 주세요!”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여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는 어린아이, 정우현이 서 있었다. 직원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는, 아이의 키가 작아 높은 창구 너머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 너 혹시 <겨울 방학>에 나온 그 아이 아니니?”

“예, 맞아요!”

“아아! 누나, 엄청 팬인데!”

이제는 어딜 가나 쉽게 정우현을 알아보는 사람들이었다.

“감사합니다, 누나! 근데 저희 환전 좀…!”

“…아아, 그래!”

어머니는 정우현의 말을 따라 준비해 온 커다란 가방을 창구 위에 올려놓으면서 얘기했다.

“여기에 넣어 주세요.”

순간 은행에 있던 모든 직원이 그들 정우현네 가족을 쳐다봤다. 1억 원이 넘는 돈을 몽땅 달러로 환전해 그것도 현금으로 가져간다니. 혹시 어디 밀입국이라도 꾀하나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직원이 그대로 잠시 뒤로 가더니 상사와 얘기를 했다.

물론 은행으로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불법적인 일과 관련되지만 않았다면, 오히려 환전 업무는 수수료로 인해 남는 장사다. 애초 외환 은행은 그러라고 있는 곳이니. 다만 이례적인 일이어서 조심스러울 뿐이었다.

상사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아역 배우인 정우현네 가족이니 이상한 일을 꾀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고서 본격적으로 환전이 진행됐다.

여직원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곧장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고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달러 다발을 가져왔다. 몇 명의 직원들이 더 와서는 곧장 달러 뭉치를 정우현네 가족의 가방에 함께 집어넣기 시작했다.

* * *

두둑한 달러 가방을 챙기고 드디어 은행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 정기석은 돈 가방을 들고 자신의 차로 가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나 큰돈을 손에 들고 있는 건 생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돈 가방을 차에 넣고 가족 모두가 탑승했다.

“이제 됐어요!”

“으응.”

정우현을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긴장해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운전하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우현아.”

“네?”

“우리, 잘한 거 맞지?”

“그럼요!”

정우현의 쾌활한 대답에 조금씩 마음이 놓였다. 그들 부모에게 정우현은 벌써부터 큰 의지가 되는 믿음직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러다 어머니가 문득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아들, 근데 왜 이렇게 현금으로 바꾼 거야? 그냥 통장으로 갖고 있어도 되잖아?”

“아니에요, 엄마.”

하면서 정우현이 말을 이었다.

“제가 얘기한 대로 외환 위기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뒤늦게 달러를 찾기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그땐 이미 찾을 수 없어요, 은행이 가지고 있는 달러란 달러는 모두 동나게 되거든요. 심지어 달러를 통장 예금으로 갖고 있어도 말이에요. 그래서 미리 현금으로 바꾼 거예요.”

“…아, 그렇구나.”

언제나 그렇듯, 아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부모였다.

* * *

시간이 흘러 1997년 11월 21일.

정우현네 가족은 거실에서 조용히 티브이 뉴스를 보고 있었다.

뉴스에는 현 정권의 부총리 겸 재정 경제원 장관이 굳은 표정으로 등장했다. 그러고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금일 우리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에 긴급 자금 지원을 신청하였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저로서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 경제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현재의 상황을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에 정우현이 조금 더 티브이에 가까이 앉은 채, 전에 없이 눈을 크게 뜨고 화면에 집중했다.

“네 말대로구나, 우현아.”

아버지 역시 계속 화면을 보며 천천히 한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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