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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9)화 (9/200)

9화

“…혹시 어머님이나 아버님이 이쪽 일하시는 분인가요…? 방송이라든가, 영화라든가 하여간….”

장필도 감독과 정우현 그리고 어머니 황희진 셋만 있는 공간. 감독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다잡으며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 아뇨. 애 아빠는 평범한 회사원이고요, 저는 주부인데….”

“…아….”

감독이 정우현을 내려보며 곧장 말을 이어 물었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 연기 수업을 받은 겁니까? 학원에 보냈나요? 아니면 개인 교습? 그래도 그렇지, 단순히 수업만으로는….”

하는데 어머니가 감독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

장 감독은 자신의 말을 끊는 어머니를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연기 수업,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어요. 그냥 어쩌다가 여기 배우 모집에 지원하고, 며칠 아이가 혼자 준비한 거밖에 없어요.”

“…며칠이요?”

믿을 수 없다는 듯 감독이 되물었다.

“예.”

“…그것도 아이 혼자요?”

“예, 제가 좀 봐주려 했더니 괜찮다고 해서. …하하, 우리 우현이는 더 어렸을 때부터 뭐든지 혼자 공부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아아….”

하더니 감독이 급기야 어지러운 듯 한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다른 손으로는 잠시 벽을 짚은 채 서 있어야 했다.

“감독님,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우현이 어른들의 얘기는 관심 없다는 듯 그저 해맑게 외쳤다.

“…아니다, 네가 이렇게 지금, 눈앞에 나타나 줘서 내가 고맙지.”

하고서 감독은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비록 잠깐이지만 내 안목이 맞다면 너는….”

입을 다물고 속으로 생각하는 감독이었다.

‘…대한민국의… 아니다. 세계에 길이 남을 명 배우가 되고도 남을 것이야….’

* * *

촬영 전 모든 출연진이 모임을 갖는 날이었다.

정우현의 상대 역 즉 깡패 삼촌은 김도진이라는 유명 배우였다.

3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비록 조연이긴 했지만 천만 관객이 넘는 작품도 벌써 하나 있고, 남자다우면서도 대중적인 호감형 외모에 탄탄한 몸으로 주로 액션 영화 쪽에서 활약이 두드러졌다.

“네가 정우현이냐?”

김도진이 정우현을 처음 만나고선 단둘이 있을 때 불쑥 물었다.

“예, 안녕하세요.”

“감독님이 직접 심사하는 오디션을 통과했다고?”

“네!”

“…장 감독 저 사람 까다롭기가 보통 아닌데, 어떻게 통과했지….”

그러자 정우현이 웃으며 답했다.

“아저씨도 통과하셨잖아요!”

“…아저씨가 아니고, 선배님, 선배님이라고 불러.”

“…아, 예.”

“…그리고 나는 애초 회사랑 계약이 되어 있었어. 너랑은 케이스가 많이 다르지, 하여간 잘 부탁한다.”

“저도 잘 부탁합니다!”

“근데 너 올해 몇 살이야? 여섯 살? 일곱 살?”

정우현은 신체 성장도 남달라 실제 나이보다 키도 컸다. 더군다나 특유의 어른스러움으로 나이보다 더 성숙해 보이기도 했다.

“아니요, 아직 네 살이에요! 좀 있으면 다섯 살 되고요!”

“…뭐?”

하고선 김도진이 놀랐다. 아무리 아역 배우라지만, 연기를 하기엔, 특히 이렇게나 대사가 많은 영화에서 주인공을 하기엔 무리로 느껴졌던 것이다.

사실 장필도 감독 또한 정우현의 실제 나이를 알고 또 놀랐다. 극 중 주인공 아이의 나이는 그보다 더 많은 초등학교 1학년, 즉 8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우현은 키가 이미 120cm에 가까웠기에 누가 봐도 초등학교 저학년의 모습 같았다.

사실 이러기까지 어머니 황희진의 영리함이 빛을 발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프로필을 제출할 때, 나이를 기입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 및 전신사진과 나이를 제외한 간략한 프로필만 제출한 것이다. 행여 나이를 이유로 서류에서 떨어질까 봐 그랬다.

“…너무 어린데.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대사는 다 외웠고?”

“예! 다 외웠어요!”

“…으음, 그래.”

김도진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히트 배우인 김도진에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바로 대사 암기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촬영에 이따금 어려움을 겪었고, 자연스레 작품 활동도 대사가 적은 액션 영화 쪽으로 많이 하게 됐다.

어떤 감독은 김도진을 위해 대사를 전면 수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 그럼 꼬마야. 촬영 날 보자. 어쨌든 같이 파이팅하고!”

하고 먼저 김도진이 손으로 든 대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선배님!”

정우현은 씩씩하게 인사했다.

* * *

본격적으로 첫 촬영이 시작됐다.

“자, 집중하고 레디….”

장필도가 앵글을 확인하며 외쳤다.

“액션!”

정우현이 거실 바닥에 누워 할 일 없이 귤을 까먹고 있는데, 급하게 삼촌 김도진이 정우현의 집에 들이닥치는 씬이었다. 즉 둘의 첫 만남이었다.

정우현은 역시 또 탁월하게, 마치 연기를 위해 태어난 아이마냥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였다. 대사를 할 때는 물론, 대사를 하지 않을 때조차 표정과 몸짓으로 카메라 앵글 안에서 모든 것을 표현해 내고 있었다.

‘…역시.’

그 모습을 장필도가 보며 생각했다.

‘내가 제대로 봤어…. 천재…? 아니,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하하… 나름 영화판에서 경험이란 경험은 다 해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순간이 올 줄이야…. 내 영화를 빛나게 해 줄 아이를 찾았는데, 반대로 이 아이를 빛나게 해 줄 영화를 찍게 되겠군.’

심지어 정우현은 카메라의 움직임도 정확히 이해했다. 단순히 연기하는 것을 넘어 화면에 어떻게 자신의 모습이 나올지, 이와 같은 카메라 각도와 움직임에선 어떤 식으로 표정을 짓고 동작을 취해야 더욱 인물이 풍부하면서도 명료하게 표현될지도 완벽히 알고 연기하고 있었다.

아니, 안다는 말도 적절치 않았다. 마치 사람이 호흡하듯 연기라는 것을 태어날 때부터 그냥 했었던 것처럼 너무도 쉽고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으니까.

“…아아, 씨발!”

드디어 김도진이 등장하는 씬이다. 김도진이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고 있는 복부를 움켜쥐며 정우현의 집에 들이닥치는 순간이다.

“…어? 누구세요!”

정우현이 김도진을 보고 대사를 시작했다.

“…네 삼촌이다, 인마. 엄마는? 엄마는 어딨어?”

“잠깐 마트 가셨는데요…!”

하고는 그가 뒤늦게 삼촌의 피가 흐르는 배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

“…시끄러워, 인마. …아….”

하고선 김도진이 머뭇거렸다.

대사를 까먹은 것이다.

“…죄송합니다.”

마침내 김도진이 NG를 내며 말했다.

“누나한테 잠깐 들를 수도 있다고 그랬는데.”

순간 정우현이 말했다. 김도진의 다음 대사였다.

“…아, 맞다, 그거였지. 아이고, 하하….”

하면서 김도진이 멋쩍게 웃으며 정우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꼬맹이, 제법이네. 내 대사도 알고 있고?”

물론이었다. 심지어 정우현은 준비 기간 동안 두꺼운 시나리오집을 통째로, 단숨에 외워 버렸다. 보자마자 시나리오를 이해한 것은 물론 안에 있는 모든 지문을 외워 버린 것이다.

이에 반해 일반적으로 연기자들은 자신의 대사만 외운다. 수많은 분량에 자신의 대사만 외우고 상황에 맞춰 내면화하며 연기를 펼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상대의 대사를 안다고 해도 대략적으로 어떤 식으로 흐름이 진행된다는 것만 알 뿐이지, 자신의 대사처럼 상세하게 모두 외우는 연기자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네, 다 알고 있어요.”

“…뭐?”

순간 김도진이 놀라 물었다.

“선배님 대사도, 다 알고 있다고요.”

“…내 대사까지 전부 외웠다고?”

“예.”

“헐….”

김도진은 물론 스태프부터 해서 실내가 잠시 조용해졌다.

“뿐만 아니라 지문이나 카메라 시점과 움직임 등 시나리오에 쓰여 있는 건 몽땅 다 외웠어요.”

정우현의 말에 이제는 사람들이 아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촬영하시다 기억 안 나는 부분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시면 돼요!”

“…이럴 수가.”

그러고서는 김도진이 생각했다.

‘…너무 잘됐잖아.’

* * *

김도진은 정우현을 곧 끔찍이 예뻐하게 됐다.

이 어린아이가 자신의 모든 대사까지 외우고 있었기에, 촬영 중 막힐 때마다 언제든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꼬마야.”

김도진이 소시지 하나를 정우현에게 주며 말했다.

“네, 선배님.”

정우현이 곧장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답했다. 

둘은 제법 친해져 함께 있는 게 퍽 자연스러워졌다.

“…넌 어쩜 그렇게 똑똑하냐?”

“…하하!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거든요!”

“어이쿠, 지금도 어린데, 더 어릴 때부터 책을 읽었다고?”

“예!”

“하하하하.”

“그리고 엄마 아빠 말도 잘 듣고요! 동생도 잘 돌보고요! 편식도 안 하고, 양치도 잘하고! 그래서 뭐든지 다 잘될 거라고 엄마가 그랬어요!”

하며 모처럼 아이답게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정우현이다.

“하하, 그래, 그래. 네 말 듣고 보니 나도 더 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근데….”

하면서 김도진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사를 어떻게 그렇게 잘 외워? 비법 있으면 나도 좀 가르쳐 줄래…?”

데뷔한 지 10년이 넘고 작품도 영화만 5편이 넘으며, 천만 관객 배우에 국내 유수의 영화제에서 남우 조연상까지 한 번 받은 히트 스타가 영화를 처음 찍는 4살짜리 아이 정우현에게 연기 비법에 관해 묻고 있었다.

“…아, 그건요….”

하면서 정우현이 나름의 방법을 김도진에게 상세하고 알기 쉽게 알려 줬다.

“…와, 그런 방법이 있었어?”

“예, 클린트 웨스트우드라는 배우이자 감독 아시죠?”

“당연히 알지. 할리우드의 살아 있는 전설이잖아. 얼마 전 은퇴했지만.”

“네, 그분이 쓴 책에서 나오는 방법이에요. 물론 우리나라 영화 촬영 실정에 맞게 제가 좀 변형하기도 했지만.”

“….”

순간 김도진이 그런 정우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너는 참….”

“…예?”

“…아니다.”

무서웠다. 정우현이 순간 무섭게 느껴졌다. 김도진은 정우현이 연기란 연기는 모두 평정할 걸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이 아이는 뭐든지 해낼 것만 같은 강한 직감이 들었다.

김도진은 대사는 잘못 외워도 직감 하나는 좋았다. 대중적인 외모에 탄탄한 근육, 그리고 이 직감으로 지금의 그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촬영 전부터, 히트할 영화의 시나리오를 제법 잘 고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하…. 가자, 다시 촬영하러 가야지.”

김도진이 말했다.

“예, 선배님.”

“아, 선배님 말고.”

“예?”

“삼촌이라고 해, 삼촌.”

“아….”

정우현이 당황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선배에 그것도 ‘님’ 자를 붙여 호칭하라고 해서 조금 거리감을 느꼈는데, 갑자기 영화에서처럼 삼촌으로 부르라고 하다니.

필시 자신을 향해 마음을 연 게 틀림없었다.

“대신 나는 널.”

“…예?”

“선생님이라고 부를게. 내 연기 선생님.”

“…하하하, 그게 뭐예요!”

김도진의 농담 같은 진담에 정우현이 환히 웃었다.

순간 김도진은 상의 안주머니를 보여 주며 말했다.

“소시지 하나 더 줄까?”

안주머니에는 정우현의 손에 들려 있는 소시지가 열 개가량 더 있었다.

“사실 선생님 드리려고 잔뜩 장만해 온 겁니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소시지래요.”

“하하하하, 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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